2021/04/08(목) “빌립보서 1:1-11” / 작성: 김광욱
[본문] 빌립보서 1:1-11
[찬송가] 299장 ‘하나님 사랑은’

빌립보서는 옥중서신인 에베소서처럼 주후 62-63년경 사도 바울이 로마에서 가택 연금된 상태에서 빌립보 성도들에게 보낸 편지입니다. 빌립보는 사도 바울이 2차 전도여행 중 전도한 도시입니다. 바울이 빌립보에서 전도하게 된 이유를 사도행전 16장이 증거하고 있습니다. 바울이 오늘날 터키 서부 지역의 유명한 유적지 ‘트로이(성경에는 드로아)’로 불리는 곳에서 전도 중 환상을 보았습니다. 그 환상에 나타난 사람이 ‘마게도냐로 건너와서 우리를 도우라’고 말했습니다. 이에 바울은 배를 타고 ‘에게해’를 건너 오늘날 발칸반도의 그리스로 갔습니다. 당시 마게도냐의 첫 성으로 불리던 빌립보는 알렉산더 대왕의 부왕이 자신의 이름을 따서 건설한 도시였습니다. 빌립보는 데살로니가와 함께 마게도냐의 중심 도시였습니다. 빌립보 시민들은 로마시민권을 가졌을 정도로 로마와 동등한 특권을 누렸습니다. 빌립보는 유럽과 아시아를 연결하는 교통의 요충지였고 또한 경제가 발달하였습니다. 바울은 빌립보에서 전도할 때 자색 옷감 장사 루디아에게 복음을 전하고 세례를 주었습니다. 또한 귀신 들린 여종을 고쳐주었다가 그 ‘여종의 주인’의 고발로 감옥에 갇혔고, 감옥에 갇혔을 때는 간수에게 복음을 전하고 그와 그의 가족에게 세례를 주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세워진 빌립보 교회는 바울이 개척한 유럽 최초의 교회가 되었습니다.
이후 약 10년의 세월이 지나서 사도 바울은 로마에서 갇혔습니다. 이를 알았던 빌립보 교회 성도들은 ‘에바브로디도’라는 사람을 파송하여 투옥된 바울을 물질적으로 도왔습니다. 그런데 ‘에바브로디도’가 로마에서 바울을 섬기다가 병들어 죽을 지경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빌립보 성도들이 근심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에 바울은 빌립보서를 쓰면서 ‘에바브로디도’가 하나님의 긍휼로 회복된 것과 ‘에바브로디도’를 빌립보로 복귀시킬 것과 빌립보 성도들에게 위로와 감사를 전합니다. 비록 바울이 자유의 몸이 아니지만, 빌립보 성도들에게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거나 동정심을 구하지 않고 오히려 그들을 위로하고 주님 안에서 기뻐하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바울은 빌립보서를 통해 예수님의 성육신과 십자가의 죽음, 겸손과 희생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빌립보서는 다른 서신들처럼 특정한 주제나 문제를 다루지 않고, 성도들이 일상에서 만나는 보편적인 주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빌립보서에는 ‘기쁨’이나 ‘기뻐하라’는 말이 자주 나옵니다. 그래서 빌립보서를 ‘기쁨의 서신’으로 부릅니다. 빌립보서는 어려운 환경에 처한 성도들에게 주님 안에서 기쁨을 잃지 않도록 하는 희망을 주는 편지입니다. 오늘 본문은 서신의 첫 인사말과 빌립보 성도들에 대한 사도 바울의 감사와 중보기도가 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종(1-2절)]

[1 그리스도 예수의 종 바울과 디모데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빌립보에 사는 모든 성도와 또한 감독들과 집사들에게 편지하노니]

빌립보서의 공동 발신자로 디모데가 언급되어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디모데를 언급한 이유는 약 10년 전 바울이 빌립보에서 전도할 때 디모데를 대동하였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디모데를 빌립보로 속히 보낼 계획(빌2:19)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자신을 소개하기를 ‘그리스도 예수의 종’이라고 합니다. 바울은 항상 자신이 주님의 종임을 잊지 않았습니다. 종으로 번역한 ‘둘로스’는 집사의 개념이 아닌 의사 결정권이 없는, 주인의 뜻에 전적으로 복종하는 노예를 뜻합니다. 바울이 주님의 말씀에 철저히 순종하는 주님의 종임을 자신 있게 밝힐 수 있었던 것은, 바울이 그렇게 살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스스로 ‘주님의 종’이라고 부르거나 타인에 의해 이렇게 불린다면 주님의 말씀에 철저히 순종하는 사람일 것입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종 바울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라고 말합니다. 이 표현은 바울이 서신에서 자주 사용하는 말입니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의 중요성을 말해주고 있는데 그 대상은 자신과 디모데를 비롯하여 빌립보 교회의 모든 성도입니다. 성도는 구별된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거룩하다’를 뜻하는 히브리어 ‘카도쉬’와 같은 의미입니다. 성도는 세상과 구별된 사람입니다. 빌립보 성도들이 주님과 연합한 자로서 거룩한 삶을 살고 있음을 바울은 알았습니다. 성도 다음으로 언급한 ‘감독’은 교회의 직분을 나타내며 당시 빌립보 교회의 영적인 일에 대한 책임을 지고 있었고, 행정과 복지에 중요한 역할을 맡고 있었습니다. 종교개혁자 칼빈은 ‘감독’과 ‘장로’를 직무상 동일한 사람으로 보았습니다. 성도와 감독 다음으로 언급한 ‘집사’는 초대 교회에서 일곱 집사를 세운 목적처럼 구제하는 직무를 맡았습니다.

[2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은혜와 평강은 사도 바울이 자주 사용하는 인사말이자 축복의 말입니다. 우리 역시 교우에게 하나님과 예수님으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임하기를 축복하십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은혜와 평강이 없이 한순간도 살아갈 수 없는 존재입니다.

[나의 하나님께 감사하며(3-8절)]

[3 내가 너희를 생각할 때마다 나의 하나님께 감사하며]

‘생각’으로 번역한 ‘므네이아’는 ‘기억’ 또는 ‘회상’을 뜻합니다. 사도 바울이 빌립보 성도들에 대한 좋은 기억을 갖고 있었기에 하나님께 감사했을 것입니다. 좋은 기억이란 바울이 약 10년 전에 그들에게 복음을 전할 때 복음의 열매를 맺고, 주님 안에서 그들과 기쁨을 누렸던 시간이었을 것입니다. 빌립보 성도들은 사도 바울과 헤어진 후 지속적으로 바울의 소식을 전해 들으며 관심을 가졌습니다. 그래서 바울이 로마에 갇혔을 때, 빌립보 성도들은 바울을 후원하기 위하여 연보를 하였습니다(빌2:25, 빌4:18). 우리가 누군가를 생각할 때마다 하나님께 감사할 정도로 서로 기쁨을 주고받았다면, 그 좋은 기억이 항상 자신을 감사의 생활로 이끌 것입니다. 그러므로 좋은 기억을 많이 남기기 위해 현재의 삶 가운데 기쁨을 주고받는 성도의 교제가 있으시길 바랍니다.

[4 간구할 때마다 너희 무리를 위하여 기쁨으로 항상 간구함은 5 너희가 첫날부터 이제까지 복음을 위한 일에 참여하고 있기 때문이라]

‘간구’로 번역된 단어의 원형은 ‘결핍’과 ‘부족’을 나타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할 때는 우리가 무언가 결핍되어 있거나 부족할 때이지 않습니까? 그런데 사도 바울은 자신의 결핍과 부족을 위해 하나님께 기도한 것이 아니라 빌립보 성도들을 위하여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그것도 억지나 의무감이 아닌 기쁨으로 항상 기도하였습니다. 우리가 바울처럼 되면 좋겠지만 그 정도는 아닐지라도, 자신의 결핍과 부족을 위해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는 것만큼 구역 식구와 교우를 위해 기쁨으로 간구하는 성도가 되십시다. 사도 바울이 빌립보 성도들을 위해 간구한 이유는, 복음을 위한 일에 참여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5절의 ‘첫날부터 이제까지’는 빌립보 성도들이 복음을 듣고 주님 안에서 변화된 이후부터 바울이 로마에서 편지를 쓰는 순간까지입니다. 물론 빌립보 교회의 관심은 지속되었을 것입니다. 우리가 서로에게 기쁨이 되는 일은 복음을 위한 일에 참여할 때입니다. 죄로 인해 죽어가는 사람을 살리는 일보다 더 큰 기쁨을 누리는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6 너희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는 확신하노라]

‘너희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누구이겠습니까?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 성도인 우리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는 모든 착한 일은 우리 스스로 행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착한 일을 하도록 인도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말하는 ‘착한 일’이란 정직하고 올바르게 행하는 일, 모든 종류의 선행을 뜻하기도 하지만 착한 일의 핵심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한 구원의 완성입니다. 구원의 완성은 ‘그리스도 예수의 날’에 이루어집니다. 이는 하나님의 구원이 불완전하다는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각자를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하심으로 의롭게 해 주셨고 자녀 삼아주셨습니다. 구원의 완성이란 주님께서 재림하시는 날, 주님께서 예비하신 곳으로 들어가는 날에 이루어집니다. 그날까지 성도를 인도해 주시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잊지 마십시다. 바울이 이를 확신하고 이렇게 생각하는 이유를 7절에서 알려주고 있습니다.

[7 내가 너희 무리를 위하여 이와 같이 생각하는 것이 마땅하니 이는 너희가 내 마음에 있음이며 나의 매임과 복음을 변명함과 확정함에 너희가 다 나와 함께 은혜에 참여한 자가 됨이라]

바울이 빌립보 성도들을 위하여 6절과 같이 생각하는 이유로 첫째는, ‘너희가 내 마음에 있다’입니다. ‘마음’으로 번역된 ‘카르디아’는 ‘심장’을 뜻합니다. 이 단어는 주로 ‘정신적으로 중요한 자리’를 표현할 때 사용합니다. 이처럼 빌립보 성도들이 사도 바울의 마음에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는 뜻입니다. 둘째 이유는, 바울이 로마에서 연금이 된 상태에서도 빌립보 성도들이 바울을 멀리하지 않고 바울과 함께 복음을 전하는 일에 참여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말하는 ‘나의 매임’은 사슬에 매인 상태를 뜻합니다. ‘변명함’은 복음에 반하는 가짜 복음을 반박하고 진리를 변증했던 일을 뜻합니다. ‘확정함’은 진리를 변증함으로써 복음을 굳게 세웠음을 뜻합니다. 이 모든 과정에 빌립보 성도들이 바울과 함께 참여하고 있었음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빌립보의 성도들이 바울을 따라다니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이 ‘너희가 다 나와 함께 은혜에 참여한 자가 됨이라’라고 말했다는 점은 우리에게 귀한 가르침을 줍니다. 오늘날 교회가 국내외 전도를 위해 수고하는 선교사나 선교단체를 기도와 물질로 돕는 일이, 결코 가벼운 일이 아님을 잊지 마십시다. 바울은 비록 몸은 빌립보 성도들과 떨어져 있으나 빌립보 성도들의 마음을 모르지 않았습니다. 바울 역시 그들을 얼마나 사모하고 있는지를 8절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8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너희 무리를 얼마나 사모하는지 하나님이 내 증인이시니라]

‘심장’은 7절의 ‘마음’으로 번역한 단어와 다릅니다. 8절에서 심장으로 번역된 헬라어의 원형, ‘스플랑크논’은 심장, 창자, 간, 폐 등 중요한 장기를 총칭하는 단어입니다. 상징적 의미로는 ‘애정’, ‘자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은 ‘예수 그리스도의 애정 또는 사랑’입니다. 주님의 사랑은 자신을 십자가에서 몸이 찢기게 하시고 피를 흘리게 하시기까지 하셨던 희생적 사랑입니다. 이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바울은 빌립보 성도들을 사모하였습니다. 바울은 단지 문학적으로 자신의 감정을 표현한 것이 아니었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 ‘하나님이 내 증인이시니라’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누구를 사모한 적이 있으십니까? 이 질문에 고개를 숙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 역시 사도 바울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성도를 사모하는 사람이 되었으면 합니다.

[내가 기도하노라(9-11절)]

[9 내가 기도하노라 너희 사랑을 지식과 모든 총명으로 점점 더 풍성하게 하사]

바울이 빌립보 성도들을 위하여 하나님께 기도한 내용이 9절에서 11절까지입니다. ‘내가 기도하노라’는 직설법 현재 시제로 바울이 한 번만 기도한 것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기도해 왔다는 뜻입니다. 중보기도의 첫째는 빌립보 교회가 사랑이 점점 더 풍성해지길 원함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사랑은 ‘아가페’입니다. ‘아가페’는 하나님의 사랑이며 하나님으로부터 기인된 사랑입니다. 무조건적인 사랑입니다. 이기적이지 않고 조건이 없는, 자기희생적 사랑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해야 함을 알지만 아가페 사랑을 충족하기에는 부족함이 많이 있습니다. 우리에게 사랑의 결핍이 있기에 결핍된 사랑을 점점 더 풍성하게 만들어야 합니다. 바울의 기도 내용을 통해, 아가페 사랑이 점점 더 풍성해지기 위해서는 지식과 총명이 필요함을 알 수 있습니다. ‘지식’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고, ‘총명’은 통찰력과 분별력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부족하고 ‘분별력’이 떨어지면 교회에서 주님을 위한 헌신과 사랑이라는 것들이 오히려 오해와 다툼을 일으킬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점점 더 풍성해지려면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통찰력과 분별력이 있어야 합니다. 이를 위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가까이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하나님을 더 깊이 알아가게 하며 통찰력과 분별력을 높여 줍니다.

[10 너희로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하며 또 진실하여 허물 없이 그리스도의 날까지 이르고]

중보기도의 둘째는 빌립보 성도들이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하기’를 원함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악한 것과 선한 것을 분별하고 선한 것 중에서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를 위하여 지식과 통찰력과 분별력을 키워야 합니다. 바울은 이어서 ‘진실하여 허물이 없기’를 기도합니다. 이는 세속적인 가치관에 빠지지 않고 구별된 삶을 유지하기를 원함인데 언제까지 이렇게 되기를 원하느냐면, ‘그리스도의 날까지’입니다. ‘그리스도의 날’은 6절에서 말한 ‘예수의 날’과 같은 날로서, 주님께서 다시 오실 날입니다.

[11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의 열매가 가득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찬송이 되기를 원하노라]

중보기도의 셋째 내용입니다. 의의 열매는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는 삶, 성화의 삶을 뜻합니다. 의의 열매가 가득히 맺히려면 자신이나 세속적인 가치관을 주춧돌로 삼지 않고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신 주님을 주춧돌로 삼아야 합니다. 머릿돌 되신 주님 없이 우리 스스로 의의 열매를 맺을 수 없으며 성화의 삶을 살아갈 수 없습니다. 오직 주님을 주춧돌로 삼을 때 가능합니다. 우리에게 의의 열매가 가득할 때 이로 인해 우리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며, 하나님을 찬송하게 될 것입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날마다 은혜와 평강, 감사와 기쁨이 넘치도록 은총을 베풀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하지만 저희가 그것을 온전히 누리지 못함을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을 주춧돌로 삼아 사람의 생명을 살리는 ‘복음을 위한 일’에 참여함으로 감사와 기쁨을 누리게 하시옵소서. 바울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성도를 사모하는 자가 되도록, 지식과 총명이 동반된 하나님의 사랑이 저희 안에 점점 더 풍성해지게 하시옵소서. 주님께서 오시는 그날까지 ‘진실하고 허물없는’ 삶을 살고, ‘의의 열매’를 풍성하게 맺어, 하나님께 ‘영광과 찬송’을 돌리게 하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묵상을 위한 질문]
1. 1절에 언급하고 있는 ‘그리스도 예수의 종’, ‘성도’, ‘감독’, ‘집사’ 중 어느 ‘호칭이나 직분’이 마음에 끌립니까? 주님의 종은 어떤 사람입니까?
2. 누구를 생각할 때마다 하나님께 감사가 나오는 사람이 있습니까? 그런 사람이 없다면 그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3. 빌립보 성도들이 ‘복음에 참여하는 일’은 무엇입니까? 내가 복음에 참여할 수 있는 일은 어떤 일이 있는지 생각해 봅시다.
4.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사람을 사모한다는 의미가 무엇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은 어떻게 이식받을 수 있겠습니까?
5. 바울의 중보기도 중 영과 진리로 예배하는 사람에게 필요한 실천 사항은 어떤 것이 있다고 생각합니까?

(작성: 김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