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에스겔 1:1-28
찬송 27장 ‘빛나고 높은 보좌와’



에스겔은 주전 6세기의 선지자 이름이자, 그를 통한 말씀 선포를 기록한 책의 제목입니다. 에스겔의 이름은, ‘하나님께서 강하게 하신다’라는 뜻으로 타협하지 않는 심판의 메시지와 이후 회복의 메시지를 선포하도록 부르심 받은 선지자에게 적절한 이름입니다. 에스겔은 고향에서 강제로 끌려 온 공동체, 하나님의 말씀을 버리고 우상을 섬긴 이스라엘의 죄를 폭로하고,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영광을 이스라엘과 모든 열방 위에 드러내는 직무를 감당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선택하셔서 자신의 언약 안에 두신 이스라엘은 수 세기에 걸쳐 불순종하여 스스로 하나님의 심판을 초래했습니다. 신명기 29-31장에서 이스라엘의 불신앙과 열국을 사용한 하나님의 징계에 대한 궤적은 이미 주어졌습니다. 또한 이스라엘과 유다를 정복한 이방 나라들 역시 하나님 앞에서 무죄한 것은 아니며 자신들의 죄악에 대한 대가를 치를 것을 선언하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자신의 이름을 위하여 이스라엘의 조상들과 맺은 언약을 지키실 것이며 이스라엘을 새롭게 하심으로 영원히 그들과 함께 하실 것입니다. 에스겔서는 삼중구조로서 1-24장은 예루살렘에 임한 파멸, 25-32장은 열방에 임하게 될 심판, 33-48장은 하나님의 백성의 회복을 알려줍니다. 오늘 1장의 내용은 에스겔 선지자를 부르신 하나님의 영광과 그를 보좌하는 네 생물과 네 바퀴에 대한 환상입니다.

에스겔의 소명(1-3)

(1-3) 서른째 해 넷째 달 초닷새에 내가 그발 강 가 사로잡힌 자 중에 있을 때에 하늘이 열리며 하나님의 모습이 내게 보이니 여호야긴 왕이 사로잡힌 지 오 년 그 달 초닷새라 갈대아 땅 그발 강 가에서 여호와의 말씀이 부시의 아들 제사장 나 에스겔에게 특별히 임하고 여호와의 권능이 내 위에 있으니라

에스겔은 주전 597년 겨우 세 달 동안 왕위에 있었던 유다의 왕 여호야긴과 함께 바벨론으로 잡혀온 예루살렘 사회의 상류 계층에 속한 제사장이었습니다. 1절의 서른째 해가 어떤 연대인지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에스겔의 나이로 보는 견해가 가장 가능성이 있다고 여겨집니다. 레위인 제사장으로서 회막의 일을 시작할 수 있는 나이가 30세부터 50세까지인데(민 4:3), 에스겔이 첫 환상을 봤을 때 서른 살이었다면, 그가 50세가 되었을 때인 바벨론 유수가 있은 지 25년 째, 새로워진 이스라엘을 위한 새로운 체제를 자세히 설명하는 두 번째 성전 환상을 소개하며 그의 사역은 마쳐집니다(겔 40:1). 포로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예루살렘 성전의 제사 의식에 참여할 수는 없었지만 그가 제사장으로 일한 기간이 되었을 시기와 일치합니다. 성전 제사장으로 공직을 시작하는 대신 사로잡힌 자 중에 있을 때, 그는 선지자의 소명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에스겔서에는 선지자와 제사장의 흥미로운 조합을 접하게 됩니다. 그발 강가에 서 있는 에스겔 선지자에게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모습이 나타난 것은 마치 서른 살에 그리스도께서 요단강에서 세례 받으실 때를 떠올리게 합니다. 성령님께서 예수님 위에 내려와 머무시고 사역 내내 성령 충만하셨던 것처럼, 에스겔에게도 하나님의 권능이 임하였습니다. 이렇게 그가 계시를 받은 연대를 이중으로 밝히고 장소를 설명하는 것은, 계시 받은 사건의 역사성을 이야기하기 위함입니다. 또한 여기서 하나님의 사람, 하나님께서 부르신 자는 언제나 성령의 힘을 받아 사역했음을 볼 때, 우리 역시 성령을 통해서 말씀에 순종할 능력을 갖출 수 있음을 알게 됩니다.

네 생물과 네 바퀴 환상(4-21)

(4-5) 내가 보니 북쪽에서부터 폭풍과 큰 구름이 오는데 그 속에서 불이 번쩍번쩍하여 빛이 그 사방에 비치며 그 불 가운데 단 쇠 같은 것이 나타나 보이고 그 속에서 네 생물의 형상이 나타나는데 그들의 모양이 이러하니 그들에게 사람의 형상이 있더라

‘북쪽에서부터 폭풍과 큰 구름’을 동반한 하나님의 현현입니다. 선지자가 하나님의 영광을 보는 것은 특별히 새로운 것은 아닙니다. 이사야는 높은 보좌 위에 계신 여호와의 환상 중에 하나님의 영광을 보았고(사 6장), 모세는 시내 산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보았습니다(신 18장). 그러나 에스겔에게 새로운 것이 있다면 하나님 영광의 현현이 정적이지 않고 포로들의 땅에서 움직임이 가득 찬 “폭풍” 가운데 계신 여호와로 시작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살아계시고 활동하시며 움직이고 계십니다. 다만, 그의 백성을 구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의 백성과 싸우기 위해서 오고 있습니다. 유다와 예루살렘 즉, 하나님의 집에서부터 시작하여 열방을 심판하실 것을 예시하고 있습니다. 이제 그런 하나님을 수종하는 임무를 가진 폭풍과 구름 속에 있는 네 생물과 네 바퀴의 환상이 드러납니다.

(10-11) 그 얼굴들의 모양은 넷의 앞은 사람의 얼굴이요 넷의 오른쪽은 사자의 얼굴이요 넷의 왼쪽은 소의 얼굴이요 넷의 뒤는 독수리의 얼굴이니 그 얼굴은 그러하며 그 날개는 들어 펴서 각기 둘씩 서로 연하였고 또 둘은 몸을 가렸으며 영이 어떤 쪽으로 가면 그 생물들도 그대로 가되 돌이키지 아니하고 일제히 앞으로 곧게 행하며

성경은 하나님의 계시를 인간의 언어를 통해서 표현하고 있기에 생물에 대한 이런 상징적인 묘사 하나하나를 문자적으로 해석하고 의미를 부여하려면 혼란에 빠질 수가 있습니다. 선지자는 나중에 네 생물의 정체가 그룹임을 밝혀주고 있습니다(겔 10:15). 그래서 이 생물은 하나님을 수종하는 특별한 임무를 가진 천사들로 볼 수가 있습니다. 이 놀라운 환상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영광이 얼마나 위대하며 이해하기 어려운 것인지를 보여줍니다. 네 생물에 대하여 신약의 네 복음서를 나타낸다고 보는 해석이 있고, 예수 그리스도 생애의 다양한 측면을 나타내는 해석도 있습니다. 또한 하나님의 자녀와 주의 종 된 우리에게 주는 교훈으로 관련지어 볼 수도 있는데 그런 관점으로 보면, 날개로 몸을 가렸다는 말씀은 이들의 겸손을 나타냅니다. 이사야서에 등장한 그룹도 여섯 날개 가운데 둘로는 얼굴을 가리고 둘로는 발을 가리었습니다. 또한 이 생물이 갈 때에는 돌이키지 아니하고 일제히 앞으로 곧게 행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행하기를 기뻐하며 뒤로 물러나지 않습니다(히 10:38). 이는 하나님의 명령을 시행하는 데 있어서 늦장을 부리지 않으며 신속한 민첩성을 보여줍니다. 이를 통해 우리가 말씀을 대하는 자세를 돌이켜 볼 수 있습니다. 겸손하고, 나의 욕심을 따라 돌이키지 않고 곧게 행하며, 신속히 순종합니다.

(19-21) 그 생물들이 갈 때에 바퀴들도 그 곁에서 가고 그 생물들이 땅에서 들릴 때에 바퀴들도 들려서 영이 어떤 쪽으로 가면 생물들도 영이 가려 하는 곳으로 가고 바퀴들도 그 곁에서 들리니 이는 생물의 영이 그 바퀴들 가운데에 있음이니라 그들이 가면 이들도 가고 그들이 서면 이들도 서고 그들이 땅에서 들릴 때에는 이들도 그 곁에서 들리니 이는 생물의 영이 그 바퀴들 가운데에 있음이더라

바퀴에 대한 언급은 다니엘서에도 나타나는데, “보좌는 불꽃이요 그 바퀴는 붙는 불이며”(단 7:9)라고 합니다. 바퀴는 보좌가 이동을 할 때 필요한 장치입니다. 다윗이 성전을 건축하려 할 때, 하나님께서는 “내가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던 날부터 오늘날까지 집에 거하지 아니하고 장막과 회막에 거하여 행하였나니”(삼하 7:6)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움직일 수 없는 성전과 다르게 회막은 간편하게 이동을 할 수 있었습니다. 애굽을 나올 때부터 하나님께서는 백성 앞에서 행진하시는 왕이셨습니다. 이제 이스라엘 백성의 죄악으로 인하여 예루살렘 성전에 계시던 하나님께서 바벨론으로 행차를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퀴는 하나님의 섭리를 비유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뜻과 계획을 모든 피조물들의 활동으로 만들어지는 사건 위에서 천사들을 통해 주관하고 움직이십니다. 어디든지 영이 가려 하는 곳에 생물도 가고, 바퀴도 그 곁에서 들려 그 명령에 전적으로 순종하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주의 종 된 우리는 생물처럼, 바퀴처럼 성령을 따라 순종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보좌 위의 사람 같은 이(22-28)

(22-23) 그 생물의 머리 위에는 수정 같은 궁창의 형상이 있어 보기에 두려운데 그들의 머리 위에 펼쳐져 있고 그 궁창 밑에 생물들의 날개가 서로 향하여 펴 있는데 이 생물은 두 날개로 몸을 가렸고 저 생물도 두 날개로 몸을 가렸더라

에스겔은 이제 땅을 벗어나 하늘에서 펼쳐지는 광경을 환상으로 봅니다. 창세기에서 나타난 궁창은 하늘의 지붕을 형성하는 반면 여기서는 생물들의 날개로 지탱되며 그 너머로 환상의 절정이 나타나는 경계선을 형성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전달하고자 앞으로 곧게 행하며 번개 모양같이 왕래하고 돌이키지 않던 그룹들이 궁창 밑에서 몸을 가리고 있습니다. 무엇 때문에 생물들이 자신들의 날개를 내려 몸을 가리게 했겠습니까?

(26-28) 그 머리 위에 있는 궁창 위에 보좌의 형상이 있는데 그 모양이 남보석 같고 그 보좌의 형상 위에 한 형상이 있어 사람의 모양 같더라 내가 보니 그 허리 위의 모양은 단 쇠 같아서 그 속과 주위가 불 같고 내가 보니 그 허리 아래의 모양도 불 같아서 사방으로 광채가 나며 그 사방 광채의 모양은 비 오는 날 구름에 있는 무지개 같으니 이는 여호와의 영광의 형상의 모양이라 내가 보고 엎드려 말씀하시는 이의 음성을 들으니라

그 중심은 “보좌 위의 사람 같은 이”에 있습니다. 하늘을 뜻하는 궁창 위에 보좌가 있는데, 비어 있지 않고 사람의 모양 같은 분이 계십니다. 에스겔은 궁창에서 나는 음성을 들었을 때에 요한이 그랬던 것처럼 그에게 말한 음성을 알아보려고 올려다보았으며, 그 때에 인자 같은 이를 보았습니다(계 1:12-13). 천사들의 머리 위에 있는 궁창이 그의 발아래에 있습니다. 사람의 모양을 한 이가 왕으로서 보좌 위에 나타나셨지만 인간의 영광보다 더 큰 영광으로 나타나셨습니다. 단 쇠 같은 모습, 즉 그 속과 주위가 불같으며 사방의 광채가 나는 모습은 마치 빛을 옷으로 입으신 것 같습니다. 그 분에 대한 묘사를 볼 때 금세 이 분이 하나님이심을 깨닫게 됩니다. 본래 볼 수 없는 하나님께서 볼 수 있도록 나타나셨다면, 이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고, 하나님의 본체의 형상이신, 성육신하시기 이전의 그리스도임을 알게 됩니다. 28절에서 이는 여호와이셨다고 말하지 않고 여호와의 영광의 형상이었고, 이 영광의 형상 속에서 하나님께서 자신을 영광스러운 존재로 나타내시기 기뻐하신 것을 보게 됩니다. 낯선 땅에서 포로로 살아가는 에스겔이었지만, 여전히 하나님은 그에게 말씀하시고 자신을 영광 가운데 계시하셨습니다. 이것은 죄악 된 세상 속에서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동일합니다. 우리의 영적 눈을 들어 하나님의 영광을 말씀 속에서 보고 말씀하시는 그의 음성을 듣고 가르침을 받아야 합니다. 이는 에스겔 위에 하나님의 권능이 임한 것처럼, 성령의 능력을 구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영광 앞에 에스겔이 엎드린 것처럼 우리도 겸손히 말씀에 나타난 하나님의 영광에 엎드려 경외함으로 환난가운데 있는 우리와 공동체를 위하여 간구로 나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모두에게, 우리를 위하여 나타나신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이시며, 본체의 형상이신 그리스도의 사랑과 친밀하심이 경험되길 소망합니다. 영광 가운데 높이 계신 하나님께서 삶의 여러 문제를 통과하는 우리 교우님들의 심령 가운데 함께 하셔서 죄는 모양이라도 버리고 약자를 도우며 말씀을 삶으로 드러내도록 힘을 주실 것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정직하게 행하고 어려운 자를 돕는 하루가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기 도
하나님 아버지!
거룩하시고 영광가운데 계신 하나님. 하나님의 말씀을 버리고 죄와 허물로 죽은 우리를 사랑하심으로 영광의 광채이시며 본체의 형상이신 그리스도를 보내주심으로, 성령을 통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는 백성으로 삼아주신 은혜에 감사드립니다. 말씀 앞에 겸손히 나의 생각을 내려놓고 신속히 순종하며 약자를 사랑하기에 힘쓰는 오늘 하루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살아계신 하나님과 동행하는 친밀함이 가득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묵상을 돕는 질문
1. 에스겔의 이름 뜻을 볼 때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백성을 어떻게 대하시는 분으로 여겨집니까?
2. 네 생물과 바퀴의 환상을 보면서 하나님 말씀 앞에 우리의 자세는 어떠해야 하겠습니까?
3. 보좌 위의 사람의 모양 같은 형상을 볼 때 에스겔은 어떤 태도를 취했으며, 동일하게 하루를 살아갈 때 말씀을 대하는 당신의 태도는 어떠해야 하겠습니까?



(작성 : 김소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