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8월 25일, 토요일


본문 : 열왕기상 7장 1절-51절
찬송가 288 예수를 나의 구주 삼고


열왕기상 6장은 솔로몬은 즉위 4년째 둘째 달에 성전 건축을 시작해서 11년째 여덟째 달에 성전 건축을 끝냈으니, 7년 동안 (엄밀히 7년 6개월) 성전을 건축하였다고 하는 것으로 끝이 났습니다. 성전 건축이 끝나자, 솔로몬은 자신의 왕궁을 건축하였는데 그 기간이 13년이 걸렸다고 본문 1절은 증거합니다.
  

영어 성경의 두 번역본에서는 본문 1절을 다음과 같이 해석했습니다. 

It took Solomon thirteen years, “however”, to complete the construction of his palace. (NIV)

“But” Solomon was building his own house thirteen years, and he finished all his house. (KJV)
  

이 두 번역본에서는 성전 건축 후에 시작된 솔로몬의 왕궁 건축 사건에 대해 “그러나” 라는 부정적인 시각으로 7장을 시작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왜 이처럼 부정적인 시각으로 본문은 시작하고 있을까요? 성전을 건축하는데 7년 6개월이 걸렸는데 반해 궁전을 건축하는데 13년이라는 더 긴 기간이 소요되었습니다. 이렇게 많은 시간이 걸린 이유를 본문에서 찾아보면 솔로몬의 왕궁의 크기는 길이 백 규빗, 너비 오십 규빗, 높이 삼십 규빗으로, 높이만 성전과 같지, 길이는 성전보다 40 규빗이 더 길고, 너비는 성전보다 30 규빗이나 더 큰, 성전에 비해 약 2배 정도가 되는 규모였습니다. 또한 내부적으로 보더라도 최고의 건축자재인 레바논의 백향목을 사용하였는데, 2절의 “레바논 나무”를 원어적으로 그대로 해석하면 레바논 숲의 궁이라는 뜻이 되니, 단순하게 건축자재로 백향목을 사용했다는 의미를 넘어서 백향목을 어마어마하게 사용했다는 뉘앙스를 풍기고 있습니다. 또한 솔로몬이 자신이 거할 왕궁뿐만 아니라 장가든 바로의 딸을 위하여 똑같은 집을 지었다고 8절이 증거합니다. 이뿐이 아니라 안팎을 최고급 품질의 돌로 지었고 장식도 해놓았는데, 여호와의 성전 안뜰과 주랑에 놓은 것과 동일한 장식품으로 치장했다고 합니다(12). 
  

어제 저녁 뉴스에 세종시에 건축하고 있는 총리공관에 대한 보도가 나왔습니다. 지방분권화 취지에 맞게 수수하게 건축하겠다고 했던 총리공관을 2만 제곱미터의 대지에 약 3백억의 예산으로 추진하고 있는데, 보안상의 문제를 내세워 추가로 만 제곱미터를 더 늘려서, 그것도 국회 예산 심의도 받지 않고 다른 사업비를 67억이나 더 끌어다가 거대한 공관을 건축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뿐만이 아니라 총리가 가끔 총리가 서울에 들를 때 머물기 위해 현재의 삼청동 공관도 그대로 유지한다는 계획을 갖고 있다고 합니다. 서민들이 지금 어떤 처지에 몰려있는지를 아는지 모르는지 국민세금을 이처럼 펑펑 쓰고자 작정하는 이들이 과연 누구를 위한 공무원일까요!

물론 성전과 왕궁의 규모를 비교하기에는 무리가 있습니다. 왕궁은 단순히 왕이 사는 공간만이 아니라 본문에서처럼 재판을 하는 공간도 필요하고, 국정을 운영하는데 많은 인력들이 있어야 하기에 성전에 비해 규모가 훨씬 더 클 것입니다. 또한 왕비로 맞아들인 바로의 딸을 위해 따로 궁궐을 지은 이유에 대해 역대하 8:11은 다음과 같이 증거합니다.
“솔로몬이 바로의 딸을 데리고 다윗 성에서부터 그를 위하여 건축한 왕궁에 이르러 이르되 내 아내가 이스라엘 왕 다윗의 왕궁에 살지 못하리니 이는 여호와의 궤가 이른 곳은 다 거룩함이니라 하였더라”(역대하 8:11)
  

즉 솔로몬이 왕비로 맞아들인 바로의 딸에게 왕궁을 지어준 것은 결코 왕으로서 자신을 과시하기 위해서거나 또는 이방인인 바로의 딸로 인해 하나님을 져버린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결코 더럽히지 않으려는 그의 하나님을 향한 경외함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것입니다. 남편으로서 이방 여인인 부인에게 자신과 같은 규모의 궁을 지어주었다는 것은 그가 바로의 딸을 얼마나 사랑하고 배려하고 있는가를 잘 나타내주기에 긍정적인 면도 있지만, 한편으로는 이방 여인을 향한 그의 모습에 앞으로 어떤 모습으로 변해갈까? 불안감을 감출수가 없습니다. 

100주년기념교회의 본당은 교회 출석인원 규모에 비하면 상당히 협소합니다. 최근 사회적으로 이슈가 되고 있는 강남의 모 교회의 입장은 우리보다 더 심각했습니다. 결국 이 교회는 성도들을 위해 교회를 새로 건축하기로 했지만 그 교회의 규모와 건축비 예산이 발표되자 사회적인 비판에 시달렸고, 건축 진행상의 적법성 여부로 인해 지역주민들과의 마찰도 있는 등 여러 면에서 사회적인 이슈가 되고 있습니다. 교인들을 위한다면 교회가 크면 클수록 더 좋을 것입니다. 흔히 초심을 잃지 말라는 이야기를 많이 합니다. 많은 교회들이 교회의 증축이나 신축 후 잡음이 심합니다. 최악의 경우에는 목회자가 마치 자기가 교회의 주인으로 착각해서, 교회의 예산을 마음대로 사용하는 경우도 있고 이로 인해 사회법으로 심판받는 경우도 있고, 성적인 유혹에 빠지는 경우들도 주변에 있습니다. 

그러나 계속해서 이어지는 다음 문장들은 솔로몬을 향한 일말의 불안감을 어느 정도는 해소시켜 줍니다. 문맥상으로는 성전의 내부공사 완료 후에 7장 13절 이하 성전 외부에 야긴과 보아스 두 기둥을 설치하고, 성전제사에 사용될 기구들을 만들고, 성전봉헌식을 한 후에 7장1절-12절까지의 솔로몬의 왕궁을 건축하는 순으로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열왕기서 기자는 이 순서를 따르지 않고 성전이 완공된 후에 솔로몬의 왕궁을 건설하고 이후에 성전제사에 필요한 기구들을 만드는 과정의 순으로 기술을 했습니다. 

납달리 지파 여인이 이방인인 두로 남자와 결혼했습니다. 두로 남자는 놋쇠 대장장이로 그들 사이에는 히람이라는 아들이 있었는데, 히람은 아버지가 죽기 전에 놋 일에 대한 모든 기술을 전수받았습니다. 솔로몬은 두로에 있던 놋쇠 대장장이로서는 최고의 경지에 오른 히람을 데려와서 성전에 필요한 기둥과 성전제사에 사용될 기구들을 만들게 합니다. 유대인들은 우리와는 달리 모계혈통주의 전통을 지니고 있습니다. 즉 아버지가 이방인이라 할지라도 어머니가 유대인이면 그 자식은 유대인이지만, 아버지가 유대인이고 어머니가 이방인이면 그 자식은 유대인으로 취급하지 않습니다. 이런 면에서 히람은 디아스포라 유대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놋 다루는데 있어서 당대 최고의 기술자 히람은 야긴과 보아스 기둥도 세웠고, 바다와 수레와 물두멍, 성전에 필요한 모든 기구들을 놋으로 정교하게 만들었습니다. 놋으로 만든 그 양이 얼마나 되었는지를 이렇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기구가 심히 많으므로 솔로몬이 다 달아보지 아니하고 두었으니 그 놋 무게가 능히 측량할 수 없었더라”(47)
 

만약 두로의 히람이라는 사람이 없었다면 성전의 놋 장식은 누가 했을까를 생각해보면, 하나님의 놀라우신 섭리하심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당시 유대 여인이 이방인 두로 사람과 결혼하기까지 얼마나 많은 사연이 있었겠습니까? 만나서는 안 될 두 사람의 만남이었지만, 하나님께서는 이 사건을 당신의 사역에 꼭 필요한 한 사람을 양성하도록 역사해주셨습니다. 히람이라는 인물에 대해  

“히람은 모든 놋 일에 지혜와 총명과 재능을 구비한 자이더니 솔로몬 왕에게 와서 그 모든 공사를 하니라”(14)


즉 본문에 의하면 히람은 두로에 있었지만 그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을 살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만약 그가 두로라는 이방국가에 살면서 그곳 이방신을 섬기고 있었다면 아무리 솔로몬이 초청했다 했을지라도 하나님의 성전에 들어가는 온갖 장식품과 기구를 만드는 일에 참여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삶의 터전을 떠난다는 것은 일반인으로서는 참으로 어려운 결단입니다. 두로에 살던 그에게는 자신의 고향인 두로를 떠나 외지인 이스라엘로 올 수 있었던 것은 그에게 신앙심이 있었다는 것이고, 이는 히람의 어머니의 교육에 의해서였을 것이라고 유추할 수 있습니다. 한 집안에서 여인이 어떤 역경에서도 자신의 중심을 지키고 있다면, 그 집안에는 반드시 하나님의 섭리하심이 이처럼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이러한 일들의 가장 가까운 예는 이재철 목사님 아니겠습니까! 믿지 않던 저 역시 제 아내가 신앙의 중심을 잡고 있었기에 주님께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가냘퍼 보여도 여인의 힘은 이처럼 남자를 훨씬 능가할 때가 많습니다. 

다시 솔로몬으로 되돌아오면, 불안한 마음을 떨쳐버리기 어려운 솔로몬의 중심은 히람을 통해 세운 야긴과 보아스의 두 기둥에 있습니다. 

“이 두 기둥을 성전의 주랑 앞에 세우되 오른쪽 기둥을 세우고 그 이름을 야긴이라 하고 왼쪽의 기둥을 세우고 그 이름을 보아스라 하였으며”(27)

야긴과 보아스는 바로 2007년도 100주년기념교회의 표어이기에 너무나 잘 아실 것입니다. 야긴은 '그가 세우셨다'라는 뜻이고, 보아스는 '그 안에 능력이 있다'라는 뜻입니다. 성전 건축을 마치고, 왕궁을 건설하는 동안 솔로몬은 결코 자만하거나 교만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자신이 이스라엘의 왕이 된 것이 그리고 현재의 이스라엘이 존재하는 것이 하나님께서 세워주셨기에 가능했다는 사실과 하나님의 능력에 의해서였음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했기에 그는 가장 귀하다는 정금을 하나님보다 더 귀히 여기지 않고 기꺼이 하나님께 드릴 정도로 순수한 정금 같은 삶을 살 수 있었던 것입니다. 또한 성전 건축을 마치자 아버지 다윗이 하나님께 드린 물건 “곧 은과 금과 기구들을 가져다가 여호와의 성전 곳간에 둘(51)” 정도로 사심이라고는 일말도 없었습니다. 이같이 야긴과 보아스의 하나님을 경외하며 정금 같은 삶을 사는 솔로몬은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지혜로 이스라엘을 다스리게 되고, 비록 성전보다 더 큰 왕궁을 건설하고 그 안에 살지라도 결코 자만하지 않고 하나님을 경외하며 겸손한 삶을 살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이후 야긴과 보아스의 두 기둥을 의지하지 않고, 자신의 지식에 의존하여 이방국들과 정략결혼을 하는 등 자신을 의지하면서 그는 타락의 나락으로 떨어져버립니다. 

혹 우리의 마음속에 있는 야긴과 보아스의 두 기둥이 흔들리고 있다면, 그 원인이 무엇일까요? 원인은 멀리 있지 않습니다. 원인은 바로 나 자신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다시 한 번 이 두 기둥을 우리 가슴에 굳게 세워보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어떠한 상황에 있다할 지라도 야긴과 보아스의 기둥을 굳게 의지한다면 우리는 좌절하거나 교만하지 않고, 하나님과 동행하는 정금과 같이 순수한 삶을 살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기도)
야긴과 보아스의 하나님, 본문에 등장하는 솔로몬 왕과 이방 두로에 살던 히람을 하나님의 도구로 세우신 분이 바로 야긴의 하나님이시오, 그들에게 왕으로서 놋 기술자로서 능력을 주신 분도 보아스의 하나님이심을 알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솔로몬과 히람의 하나님이 바로 우리가 믿는 하나님임에 감사합니다. 어떤 상황에 있다할지라도 나를 세워주시는 야긴의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해주신다는 희망 속에 감사하며 살게 해주시옵소서. 내가 가진 것이 하나님의 능력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닌 것임을 잊지 말도록 해주시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능력이 우리의 삶의 원동력이 되게 해주시옵소서. 우리에게 육적인 영적인 자녀들을 허락하셨습니다. 야긴과 보아스의 하나님을 중심으로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을 통해 자녀들 역시 야긴과 보아스의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은혜 베풀어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