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1월 12일 (화)
<본문> 마태복음 20:1-39/383장 '눈을 들어 산을 보니'

 오늘 본문은 포도원품꾼의 비유로 많이 알려져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늘나라의 특징을 이 비유를 들어 말씀하신 것은 베드로의 질문에 연유한 까닭입니다.
19장 27절에서 베드로가 이렇게 예수님께 묻습니다.
“이에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보소서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따랐사온대 그런즉 우리가 무엇을 얻으리이까” 보상에 관한 문제입니다.
‘우리가 이만큼 했습니다. 우리에게 돌아오는 것이 무엇입니까?’ 이 질문입니다.
 이 질문에 원칙적인 답을 주십니다. 나중에 너희가 열두 보좌에 앉아 열두지파를 심판할 것이고, 이생에서 너희가 버린 것의 몇 배를 받을 뿐만 아니라 나중에 영생까지 받을 것이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말미에 단서를 붙이십니다. 먼저 된 자가 나중 되고 나중 된 자가 먼저 된다고 덧붙이심으로 그 묻는 동기에 문제가 있음을 지적하십니다.

 질문의 포인트가 어디에 있느냐에 따라 의미가 달라집니다. ‘나의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따르는 것’에 포인트가 있었다면 먼저 된 자가 나중 되고 나중 된 자가 먼저 된다는 말씀이나 오늘 포도원품꾼 비유는 없었을 수도 있을텐데 베드로의 질문은 그것이 아니었나 봅니다.
 앞의 내용보다는 뒤에 나오는 ‘우리가 무엇을 얻으리이까?’에 강조점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열두 제자들은 누구보다 먼저 주님의 제자가 되었고, 뒤늦게 예수님을 따라다니던 사람들보다 상대적으로 많은 헌신을 했을 것입니다. 따지고 보면 베드로는 주님께서 말씀하신 먼저 된 자에 속하는 사람입니다.
 어쩌면 모든 소유를 팔고 따르라는 예수님의 요청에 부자청년이 근심하며 돌아가는 뒷모습을 보면서 속으로 쾌재를 부르며 의기양양하게 이 질문을 했을지도 모릅니다. 나중 된 자인데 보니까 돈도 많고 계명도 잘 준수하는 경건도 있다고 하니 그 모습이 아니꼽게 여겨졌을 지도 모릅니다.
 어찌됐던 예수님은 베드로를 비롯한 먼저 된 자들의 내면을 들여다보시고 단서를 붙이셔서 그들의 그릇된 동기와 오해를 바로잡아 주시려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무엇을 얻으리이까’라는 우리의 본성에 바탕한 질문은 사실 베드로만의 질문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가지고 있는 것이기에 예수님께서는 포도원 품꾼의 비유를 통해서 오해되고 있는 하나님나라의 원리를 설명하시는 것입니다.

 포도원비유는 자본주의 경제체제에 익숙한 우리에게는 선 듯 이해가 어려운 이야기일 수 있습니다. 일한 만큼 받아가는 것, 우리의 정서에 쉬 납득이 되는 것입니다. 
 이 관점에서 보면 포도원 주인은 경제관념이 도무지 없는 사람 같습니다. 당시에도 요즘처럼 최소의 투자로 최대의 이윤을 창출하는 것이 능력이고 미덕이었을 법한 시대인데도 말입니다.

 사실 이 논리가 베드로의 질문 속에도 그대로 녹아 있습니다. ‘먼저 왔고 더 많이 일했다!’ 질문 속에 이 논리가 들어 있습니다. 그리고 오늘 비유 내용 중에 제일 처음 와서 일한 사람들의 불평도 바로 이 논리입니다. 제일 먼저 와서 일했는데 이게 뭐냐는 것입니다.

 우리는 내심 베드로나 먼저 와서 더 받을 줄 알았던 품꾼들의 이의제기에 더 공감이 갈 수도 있을 것입니다. 새벽부터 와서 한낮의 뙤약볕을 견뎌가며 일했는데 뒤늦게 와서 한 시간 일한 사람들과 같은 대우를 받는다는 것은 합당하지 않다고 여길 수 있습니다.
 이것은 언뜻 보기에 굉장히 논리적이고 합리적인 것 같지만 그 밑바탕에는 인간의 이기적 본성이 깔려 있는 논리이고 합리성입니다. 세상의 문화와 세상의 논리는 그러할지 몰라도 예수님께서 꿈꾸셨던 하나님나라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누구보다 먼저 예수님을 따라다니며 함께 했던 제자들이야 말로 예수님과 더불어 하나님나라를 꿈꾸며 완성시켜가야 하는데 여전히 인간의 악한 본성에 바탕한 그릇된 논리를 버릴 줄 몰랐습니다. 동기가 이기적입니다.

 먼저 와서 일한 품꾼들의 불평에 포도원주인이 한마디 합니다. 14절입니다.
“네 것이나 가지고 가라 나중 온 이 사람에게 너와 같이 주는 것이 내 뜻이니라”
‘네 것이나 가지고 가라’를 원문에서 문자적으로 직역하면 ‘너희 눈이 악하도다’가 됩니다.
그러니까 ‘너희 눈이 악하다. 나중에 온 이 사람에게 너와 같이 주는 것이 내 뜻이다’ 로 번역할 수 있을 것입니다.
 너희의 논리와 너희의 합리성이라는 것이 실은 너희의 악한 마음을 감추기 위한 것이 아니냐는 뜻입니다.
자기중심적인 시기심으로 눈이 멀었기 때문에 이미 합당하게 받은 것에도 감사하지 못하고 불평하는 품꾼의 모습을 지적하며 베드로를 비롯한 제자들의 잘못된 동기를 드러내시고자 하셨던 것입니다.
 사실 이것은 이 시대를 사는 우리의 맹점이기도 합니다. 번듯한 논리와 합리성을 가지고 이면에 있는 시기심 가득한 마음을 곧 잘 가리곤 합니다. 내가 받은 것을 생각하지 못합니다. 속 깊이 들여다보면 셈법도 자기중심적입니다. 내가 다른 이들에 비해 이만큼 했으니 마땅히 챙겨야 할 내 몫이 있다는 것입니다. 대게 보면 자기합리화입니다.

 당시 장터는 일거리가 없는 사람들이 자신의 노동력을 사 줄 사람을 기다리는 장소이기도 했습니다. 새벽인력시장 정도 되는 곳입니다. 우리 성경에는 장터에서 ‘놀고 있다’로 표현 되었는데, 일을 구하지 못해 서성이고 있다는 것이 정확한 표현입니다. 품꾼들이 장터에 모여 자신을 고용해줄 사람을 애타게 기다리는 것입니다.
 당시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사는 사람들에게 하루의 일이 없다는 것은 그의 아내와 자녀들이 굶주림을 겪어야 한다는 뜻 입니다. 포도원 주인이 불러 주었기 때문에 오늘 그 가족이 먹을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새벽인력시장에서 일을 할 수 있는 기회가 제공된 것 자체가 실은 큰 은혜입니다. 제육시와 제구시에도 여전히 일할 기회를 얻지 못해 발을 구르고 있는 사람이 있었고, 심지어 요즘 시간으로 저녁 다섯 시에 해당하는 제십일시에 이르도록 일을 얻지 못해 애타하는 사람들이 있는 것만 보아도 새벽 6시 경인 이른 아침에 바로 일할 수 있는 기회가 제공된 것 자체가 은혜인 것입니다.  다른 모든 사람들은 제쳐두고 자신을 고용해준 주인에게 고마워하지 않았겠습니까? 그런데 불과 하루가 못되어 품꾼의 눈은 더이상 주인이 베푼 은혜에 가 있지 않고 어느 새 자신의 계산기에 가 있습니다. 눈이 악해진 것입니다.
 경제논리가 아닌 은혜에 의해 부름 받은 품꾼이 정작 은혜에 값하지 못하고 도리어 자신이 받은 은혜를 경제논리로 덧칠하여 불평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처음 마음 다르고 나중 마음 다른... 

  오늘 1절에서 이렇게 시작하고 있습니다.  “천국은 마치 품꾼을 얻어 포도원에 들여보내려고 이른 아침에 나간 주인과 같으니...”
천국은 품꾼에게 일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기 위하여 이른 아침에 나간 주인과 같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주인이 세상의 메마른 경제논리가 아니라 은혜의 논리를 가진 사람입니다. 이 주인은 시간단위까지 계산해서 각박하게 값 매기는 이 시대이 경제논리로 무장한 주인이 아닙니다. 15절에서 주인이 자신에 대해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내 것을 가지고 내 뜻대로 할 것이 아니냐 내가 선하므로 네가 악하게 보느냐”
주인은 그가 주인으로서의 권리를 행사할 수 있는 포도원에서 세상논리가 아니라 은혜의 논리로 운영하려는 뜻이 있었습니다. 목적 자체가 최소의 투자를 통한 최대의 포도 소출에 있는 것이 아니라 단 한사람이라도 일을 구하지 못해 발을 구르는 사람이 있으면 제육시에도 제구시에도 심지어 제십일시에도 나아가 그의 능력과 결과에 상관없이 하루의 일용할 양식을 얻을 수 있도록 선처를 베푸는 데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나라의 원리이자 특징입니다.

 하나님이 진정 바라시는 것은 그분이 다스리시는 하나님나라가 바로 이 은혜의 논리로 운영되는 것입니다. 당신의 백성들이 하나님의 선하심을 맛보며 사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너희는 여호와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지어다”(시34:8)

 베드로를 비롯한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 이 비유를 들어 부연하신 까닭이 여기에 있습니다. 제자들이 잊지 말아야 할 것이 두 가지 있었습니다.
 첫 번째가 먼저 따라다닌 자신들이 이미 여호와의 선하심을 맛본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세상논리, 경제논리라면 이 사람들 안 부르십니다. 부를 만한 사람들이 얼마나 많았습니까. 가치 없는 인생 살다가 부스러질 인생들인데 하나님의 은혜의 논리 덕분에 부름 받았습니다. 제자들은 자신들이 이미 은혜의 논리 속에 들어와 있다는 것. 이것 잊지 말아야 했습니다. 남들과 비교하며 내가 받을 몫을 계산하는 것은 은혜속에 들어와 있는 그들에게 합당하지 않은 모습입니다.
 두 번째, 내가 그 은혜를 받았고 그것 아는 사람이라면 나도 다른 사람들을 판단하고 대할 때 경제논리, 기업의 논리가 아니라 똑같이 은혜의 시각을 가지고 바라봐야한다는 것입니다. 적어도 예수공동체 안에서는 그러해야 합니다. 그래야 받을 것 받고 줄 것 주는, 경제논리가 판치는 세상에 대해 우리 예수공동체가 대항공동체, 대안공동체가 되지 않겠습니까? 그렇지 못하다면 세상과 다를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예수님의 제자들이 만들어갈 공동체가 세상과 다른 논리로 움직이지 않는다면 그들의 존재 의미는 어디에 있는 것이겠습니까?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받은 것을 남과 비교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것이 어느 통로로 왔건 다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입니다. 은혜입니다. 내가 한 일과 내가 받을 몫을 계산하고 그것을 동료의 것과 비교하고 평가하기 시작할 때 우리는 한없는 하나님의 은혜를 천한 경제논리로 값 매기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싸구려로 만들고 스스로 천해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우리가 우리의 동료들을 바라볼 때 포도원 주인과 같은 이 시각을 가져야합니다.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이 비유를 들려주실 때 원하신 것이 소극적으로 그렇게 받을 것만 생각하지 말라 정도가 아닙니다. 네가 포도원 주인으로 상징된 하늘 아버지와 같이 네 지체들을 그런 시각으로 바라보라는 것입니다. 그래야 우리를 통해 하늘아버지의 사랑과 생명이 전해지겠지요. 우리가 안경을 바꿔 써야 합니다. 경제논리라는 안경을 쓰고 살아서 우리의 눈이 너무 악해져 있습니다.  

 우리가 모두 특별한 은혜로 부름 받은 사람들입니다. 남들 일자리 구하지 못하고 발 동동 구르고 있을 때 일찍부터 부르심 받은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이제는 은혜 입은 사람에게 합당한 은혜의 논리로 우리의 이웃들을 바라보고 섬겨야 할 것입니다. 
 가진 것 버리지 못해 돌아가는 풀죽은 부자청년의 뒷모습을 보고 같이 안타까워 할 줄 알아야 하고, 빈손으로 돌아갈 뻔하다가 마지막 한 시간을 남겨놓고 부름 받아 가족을 부양할 수 있게 된 동료들을 보고 함께 기뻐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리하여 이른 새벽에 부르심 받은 사람들과 제삼시에 부르심 받은 사람들과 제육시에, 제구시에 그리고 마지막 제십일시에 부르심 받은 사람들이 모두 모여 이렇게 여호와께 감사하며 찬송해야하지 않겠습니까?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는 선하시며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시107:1)
이것이 바로 예수님이 꿈꾸셨던 하나님나라의 모습일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를 통해 이 땅에 이루어지길 원하시는 하나님나라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여기 있는 우리 모두 우리가 먼저 된 자이건 나중 된 자이건 예외 없이 한없는 하나님의 은혜를 입고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기억하고 세상의 논리가 아닌 은혜의 논리로 우리에게 주어진 영역을 하나님나라로 일구어 가는 예수님의 참 제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