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7월 14일 토요일
<본문> 열왕기상 13장 11-34절

오늘 말씀에 젊은 선지자와 늙은 선지자가 등장합니다. 11-12절을 통해 늙은 선지자가 어떠한 사람인지를 살펴볼 수 있습니다. 늙은 선지자에게 아들들이 있었는데 그들이 젊은 선지자의 행적을 그의 아버지 선지자에게 보고한 것을 보면, 그의 아들들은 여로보암이 세운 우상숭배의 절기 행사에 참여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여로보암 시대에 하나님을 구하기 위해 많은 선지자들이 남유다로 넘어갔는데(대하 11:16) 이 선지자는 여전히 벧엘에 남아 있었습니다. 또한 젊은 선지자를 유혹하기 위해 늙은 선지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받지도 않았음에도 받았다고 거짓말한 점 등을 감안해볼 때 그는 이미 여로보암의 종교정책에 동의하고 있던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오늘 본문에서는 신실하지 아니한 그 늙은 선지자는 북 이스라엘 땅에 버젓이 잘 사는데, 하나님의 사람이었던 무명의 선지자는 한 순간의 잘못으로 생을 마감해야 했습니다.

오늘 문제의 발단이 된 것처럼, 왜 늙은 선지자는 자신의 사명을 끝내고 돌아가던 무명의 젊은 선지자를 따라갔습니까? 12-14절을 읽어 보면, 늙은 선지자는 굳이 젊은 선지자를 따라가기 위해 나귀를 타고 서둘렀습니다. 그리고 그를 자신의 집에 데리고 가려고 했습니다. 늙은 선지자는 젊은 선지자를 자신의 집으로 데리고 오기 위해 능수능란한 거짓말을 시도했으며 그 젊은 선지자는 한두번 버티다가 결국 그를 따라 집으로 가게 됩니다. 성경은 늙은 선지자가 왜 그를 따라가 유혹했는지 명확하게 밝혀주지 않고 있습니다. 다만, 늙은 선지자가 무명의 선지자에게 호감을 갖고 있다는 것과 그가 진정한 하나님의 선지자임을 이미 알고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29-31절에서 젊은 선지자가 하나님의 명령을 어긴 결과로 죽게 되었을 때에 그 늙은 선지자가 그 젊은 하나님의 사람의 시체를 붙들고 울었으며 무덤을 마련해 묻어주었으며, 자신이 죽거든 그 사람의 묘에 함께 묻어달라는 당부까지 그의 아들들에게 남겼습니다.

하나님의 대책으로 살지 아니하고 자신의 종교 정책에 충실하게 살았던 여로보암 왕의 죄악을 지적하기 위해 북 이스라엘 제사 행사에 나타났던 무명의 신실한 선지자는 어떤 거짓말에 속았습니까? 늙은 선지자가 말한 18절을 읽어 보겠습니다. “나도 그대와 같은 선지자라. 천사가 여호와의 말씀으로 내게 이르기를 그를 네 집으로 데리고 돌아가서 그에게 떡을 먹이고 물을 마시게 하라 하였느니라.” 나도 선지자이며 내게도 천사가 나타나 말씀을 주셨는데, 당신에게는 하나님이 먹지도 말고 마시지도 말라 했는지 몰라도 하나님은 내게 오히려 당신에게 떡과 물을 주라고 명하셨다는 것입니다.
바로 직전까지 선지자답게 철저히 하나님 말씀을 마음에 담고 있던 그 하나님의 사람은 순간적으로 그 늙은 선지자에게 경계심을 풀게 되었으며 순순히 그를 따라 집으로 가게 되었습니다. 결국 한번의 실수가 엄청난 결과를 초래하게 됨을 성경은 매우 엄중하게 다루기 위해 무명의 선지자의 죽음을 통해 경고하고 있는 것입니다.

20절에서는 하나님의 사람에 대해 얼마나 엄중한 경고를 내리시는지 그 하나님의 사람이 먹으려고 상 앞에 앉아 있을 때에, 그것도 아이러니하게 하나님의 말씀이 그 자신을 속였던 늙은 선지자에게 임하여 말씀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21-22절에서 하나님은 한때 신실했었던 그 선지자에게 이렇게 말씀합니다. “여호와의 말씀에 네가 여호와의 말씀을 어기며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내리신 명령을 지키지 아니하고 돌아와서 여호와가 너더러 떡도 먹지 말고 물도 마시지 말라 하신 곳에서 떡을 먹고 물을 마셨으니 네 시체가 네 조상들의 묘실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하셨느니라.” 먹지 말고 마시지 말한 떡과 물을 마셨으니 죽게 될 것이라는 예언이었습니다.
그러하기에 이어서 나오는 23절을 이해하기가 좀 어렵습니다. 그 무명의 하나님의 선지자는 자신에 관한 예언의 말씀을 들었음에도 떡과 물을 먹고 마셨을 뿐 아니라 나귀 선물까지 받아 길을 떠났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이었던 솔로몬의 타락과 그의 아들 르호보암의 폭정으로 민심이 멀어졌을 때, 하나님께서 그 대안으로 여로보암을 보내셨지만 그 또한 왕가를 부흥시키려는 야욕을 종교 정책을 통해 드러내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은 급기야 그 거국적인 제사를 벌이는 행사에 그 누구보다 철저히 말씀에 붙잡혀 있었던 무명의 선지자를 통해 그 제단을 박살내고 여로보암의 손을 무력화시키기까지 하셨습니다. 그때 그 하나님의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 앞에 그 누구보다 철저한 사람으로 보였습니다.
하지만 오늘 성경이 보여주는 그 젊은 선지자의 이해 못할 하나님 말씀에 대한 명령 불순종은 그러하기에 너무나 크게만 느껴집니다. 그리하여 그 결과로 신실했던 하나님의 사람은 길에서 사자를 만나 죽임을 당했으며 사자는 그 하나님의 사람을 물어 죽였지만 타고온 나귀는 건들지 않았을 뿐 아니라 물어 죽인 시체를 뜯어먹지도 않았습니다. 짐승에 불과한 사자임에도 하나님의 심판의 대리자로 정확하게 그 일을 마무리짓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러면 성경은 왜 이토록 냉정하게 하나님의 사람의 죽음을 상세하게 다뤄주고 있습니까? 왜 우상의 도시 벧엘에서 거짓말을 능숙하게 구사하면서도 그 늙은 선지자는 징계받지 않고 잘 살아가고 있는데, 오히려 한순간 잘못한 선지자가 죽어야 하는 걸까요? 33-34절입니다. “여로보암이 이 일 후에도 그의 악한 길에서 떠나 돌이키지 아니하고 다시 일반 백성을 산당의 제사장으로 삼되 누구든지 자원하면 그 사람을 산당의 제사장으로 삼았으므로 이 일이 여로보암 집에 죄가 되어 그 집이 땅 위에서 끊어져 멸망하게 되니라.”
성경은 여로보암의 죄악이 얼마나 큰지 일반 백성들 중에 원하기만 하면 산당의 제사장으로 삼을 정도였기 때문에 그 완악한 죄악을 외치는 자 또한 철저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받들지 않으면 실패할 수밖에 없음을 증거합니다. 그러므로 몇 번씩이나 분명한 경고와 예언이 주어졌음에도 여로보암과 그 백성들은 회개하지 않고 악행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이로 인해 하나님은 실패한 선지자의 죽음을 통해 그가 전한 예언의 권위를 더욱 확고하게 보여주셨으며, 그의 죽음 또한 여로보암 왕가의 불순종에 대한 철저한 심판이 있을 것임을 드러내준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솔로몬과 르호보암, 여로보암, 그리고 그 무명의 하나님의 사람을 통해 하나님의 부르심 앞에 철저히 망각하며 살아갈 수 있는지를 배우게 되었습니다. 여로보암이 하나님께 부름받았다는 사실은 잊어버리고 여전히 우상숭배에 몰입하여 스스로 하나님을 잘 섬기고 나라를 잘 다스린다는 착각에 빠져 있었을 때, 하나님은 그와 이스라엘 백성에게 정신이 번쩍 들 정도로 회개의 기회를 주었습니다. 하지만 끝내 그 모든 하나님의 진심을 묵살해버린, 예전의 그 하나님의 대책이었던 여로보암의 모습을 성경은 보게 해줍니다. 그러므로 이를 우리에게 보여주시는 교훈의 거울로 삼고 오늘도 겸비로 허리를 동이는 우리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오늘의 기도>
주님. 그렇게 신실했던 무명의 선지자의 죽음을 우리의 삶을 돌아봅니다. 르호보암의 폭정에 지친 백성을 위해 그 대책으로 여로보암을 보내주셨으나 그 또한 우상숭배와 혼합주의에 빠져 살게 되었습니다. 세속의 가치관에 충실한 이 땅의 교회와 세상을 변혁시키는 주님의 도구로 쓰임받겠다는 우리의 삶에, 한때 그르친 그 잘못에 대해서도 철저히 회개하는 영성이 우리 가운데 있게 하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