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요한계시록 10:1-11
찬송가 484장 ‘내 맘의 주여 소망되소서’


오늘 본문 전, 9장까지 여섯번째 나팔에 대한 묘사가 나왔습니다. 그렇다면 자연스럽게 10장에서는 일곱번째 나팔에 대한 묘사가 나와야 하지만 10장에서는 등장하지 않고 11장에서 나옵니다. 즉 10장은 여섯번째 나팔과 일곱번째 나팔 사이에 삽입된 말씀입니다. 이로 볼때 일곱번째 나팔이 등장하기전 반드시 기억해야 할 어떤 사건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 구체적인 내용은 무엇입니까?

힘 센 천사와 일곱 우레(1-7절)

1 내가 또 보니 힘 센 다른 천사가 구름을 입고 하늘에서 내려오는데 그 머리 위에 무지개가 있고 그 얼굴은 해 같고 그 발은 불기둥 같으며

요한은 하늘로부터 힘센 다른 천사가 내려오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 천사는 구름을 입고 하늘에서부터 내려오는 데 머리위에는 무지개가 있었고 얼굴은 해 같고 그 발은 불기둥 같았습니다. 이 표현들은 하나같이 하나님의 영광과 권능을 의미합니다. 성경에서 구름은 하나님의 현현을 상징할 때, 무지개와 해는 하나님의 심판자 되심과 절대 주권을 상징할 때 사용되었습니다. 그리고 불기둥은 모든 것을 태우고 정화시키는 능력을 상징한다 볼 수 있습니다. 주님을 끝까지 따르던 성도들은 이러한 하나님의 영광을 기뻐하며 맞이하겠지만, 끝까지 불순종한 자들에게는 무시무시한 심판의 두려움으로 맞이하게 될 것입니다.

2 그 손에는 펴 놓인 작은 두루마리를 들고 그 오른 발은 바다를 밟고 왼 발은 땅을 밟고

하나님의 심판을 선포하기 위해 등장한 힘 센 천사는 작은 두루마리를 손에 펴 들고 있었습니다. 지난 새벽기도회 설교에서도 언급되었듯이 5장에서는 두루마리는 아무도 펼칠 사람이 없었지만 10장에서 등장하는 두루마리는 펴져 있습니다. 심판을 하는 분에게 두루마리가 펴져있다면 그것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이겠습니까? 하나님의 심판은 즉흥적인 것이 아니라 오랫동안 기록이 누적되었고 빈틈없이 준비되어졌다는 뜻입니다. 그 심판을 선포하는 자의 발은 바다와 땅에 서 있습니다. 바다와 땅은 온세계를 의미한다고 봤을 때 이 심판의 선포는 이 세상 어느 곳에든지 사각지대 없이 전우주적으로 선포되고 실행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3 사자가 부르짖는 것 같이 큰 소리로 외치니 그가 외칠 때에 일곱 우레가 그 소리를 내어 말하더라

힘 센 천사가 사자가 부르짖듯이 큰 소리로 외칠 때 일곱 우레가 소리를 냅니다. 여기서 우레는 단순히 천둥소리라기보다 하나님의 음성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음성이 일곱 우레로 등장하는 데 계시록에서는 일관되게 7, 일곱이 등장합니다. 즉, 무질서와 우연이 넘치는 세상 속에서 완전한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는 것입니다.

4 일곱 우레가 말을 할 때에 내가 기록하려고 하다가 곧 들으니 하늘에서 소리가 나서 말하기를 일곱 우레가 말한 것을 인봉하고 기록하지 말라 하더라

일곱 우레가 하나님의 음성이었기에 사도 요한은 그 말씀을 기록하고자 하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 말씀을 기록하지 말고 인봉하여 열어볼 수 없게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인봉하다’라는 말은 옛날 비밀을 유지하기 위해 편지 봉투나 두루마리 위에 촛농을 붓고 도장을 찍는 것을 의미합니다. 흥미롭게도 1장 19절에서는 사도요한에게 기록하라는 명령을 하셨는데 10장에서는 기록하지 말라고 합니다. 이는 일곱 우레의 내용이 인간의 이성과 상식을 뛰어넘는 말씀이기에 기록되어 전파될 경우 곡해되거나 악용될 여지가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비밀의 말씀은 언제 밝히 드러나게 되겠습니까?

5-7 내가 본 바 바다와 땅을 밟고 서 있는 천사가 하늘을 향하여 오른손을 들고 세세토록 살아 계신 이 곧 하늘과 그 가운데에 있는 물건이며 땅과 그 가운데에 있는 물건이며 바다와 그 가운데에 있는 물건을 창조하신 이를 가리켜 맹세하여 이르되 지체하지 아니하리니 일곱째 천사가 소리 내는 날 그의 나팔을 불려고 할 때에 하나님이 그의 종 선지자들에게 전하신 복음과 같이 하나님의 그 비밀이 이루어지리라 하더라

이 비밀은 11장에 등장하게 될 일곱번째 천사가 나팔을 불 때 모든 것이 드러난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것보다 더 중요한 사실은 이 비밀이 이루어지는 그때가 절대로 지체되지 않는다는 것 입니다. 이 서신을 보았던 1차 독자는 환난과 핍박 속에서 겨우 믿음의 끈을 붙잡고 있었던 초대교회의 성도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신앙을 지키기 위해 너무나 많은 어려움을 당하고 있었습니다. 그런 그들이 했던 생각이 무엇이었겠습니까? “하나님! 언제까지 침묵하십니까? 언제까지 저들의 악행을 모른척 하십니까?” 라며 탄식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런 그들에게 하나님께서는 절대로 지체하지 않을 것이며 하나님의 정확한 때에 반드시 심판하시고 신원하여 주시겠다고 말씀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보기에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는 것 같지 않고 일하시지 않으시는 것 같고 뜻과 계획이 더디 이루어지는 것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초지일관 하나님의 뜻과 계획은 결코 지체되지 않는다고 교훈합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이 경험했던 어려움들을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 속에서 똑같이 경험할 수는 없습니다. 그럼에도 우리의 신앙을 흔들어 놓는 요소들은 여전히 우리 가운데 존재합니다. 2천년 전 계시록을 읽고 다시 힘을 얻었을 초대교회 성도들처럼, 이 새벽에 동일한 은혜를 누리며 모든 것을 지켜보고 동행하여 주시는 주님을 바라보시는 우리 교우님들 되시길 소망합니다.


두루마리를 갖다 먹어 버리라(8-11절)

8-10 하늘에서 나서 내게 들리던 음성이 또 내게 말하여 이르되 네가 가서 바다와 땅을 밟고 서 있는 천사의 손에 펴 놓인 두루마리를 가지라 하기로 내가 천사에게 나아가 작은 두루마리를 달라 한즉 천사가 이르되 갖다 먹어 버리라 네 배에는 쓰나 네 입에는 꿀 같이 달리라 하거늘 내가 천사의 손에서 작은 두루마리를 갖다 먹어 버리니 내 입에는 꿀 같이 다나 먹은 후에 내 배에서는 쓰게 되더라

다시 하늘에서 사도요한을 향한 음성이 들립니다. 이번엔 천사가 들고 있던 펴진 두루마리를 받아서 먹어버리라고 말씀합니다. ‘갖다 먹어 버리라’는 말은 완전히 삼켜버리라는 강한 의미가 내포된 명령입니다. 물론 이것은 환상이고 상징이기 때문에 실제로 글자가 기록된 문서를 씹어먹은 것으로 이해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무엇을 먹는다는 것은 씹고 맛보면서 즐기면서 그것이 내 위장을 통과하여 내것으로 흡수되는 과정을 말합니다. 그러니 사도요한이 그 두루마리를 먹는다는 것은 그 두루마리의 말씀을 맛보고 소화시켜서 자신의 것으로 체화되는 과정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그 하나님의 말씀이 입에서는 꿀 같이 단데 배에 들어가게 되면, 즉 소화시켜서 흡수되고 체화될 때는 쓰다고 합니다. 두루마리에 어떤 내용이 적혀 있기에 이렇게 되겠습니까? 계시록 전반적인 문맥으로 보건대 그 내용은 구원과 심판일 것입니다. 우리가 복음은 듣고 받아들일 때 어떠했는지 생각해보십시다. 주님께서 죄인인 우리에게 값없이 구원을 선물로 주셨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큰 기쁨과 감격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구원의 이면에는 불순종한 자들을 향한 심판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복음은 구원 받은 자들에게는 큰 기쁨과 감격으로 다가오지만 끝까지 그리스도를 부정하는 자들에게는 무시무시한 심판으로 다가옵니다. 또한 그렇기에 복음대로 살려는 성도들은 복음을 거부하는 세상 속에서 고난과 핍박을 받을 수 밖에 없기도 합니다. 이러한 복음의 이중성 때문에 먹을 때는 달지만 배에서는 쓰게 되는 것입니다.

이 땅에서 구원을 받아 성도가 된 우리는 이 사실을 잘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지금 당장은 복음대로 산다고 해서 현실 속에서 불신자들보다 더 나은 형편을 누리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그들과 비슷하거나 아니면 그들보다 더 많은 어려움을 당할 수도 있습니다. 불신자들은 자신의 상황을 탓하며 창조주를 비난하거나 하나님이 없는 인생을 선택할 것입니다. 그러나 성도는 동일한 상황에 있다 할지라도 삶의 태도가 완전히 다릅니다. 왜냐하면 우리들에게는 미래에 대한 소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입에는 달고 배에는 쓴 이 복음을 사랑하고 수호하는 은혜가 있으시길 소망합니다.

11 그가 내게 말하기를 네가 많은 백성과 나라와 방언과 임금에게 다시 예언하여야 하리라 하더라

지금까지 사도 요한이 보았고 또 선포해야 할 하나님의 비밀은 믿는 성도에게는 크나큰 기쁨이지만, 불순종하는 세상에서는 달갑지 않은 것 입니다. 쓰디 쓴 말씀을 다른 사람에게 전하는 일은 기쁠리 없습니다. 그러나 요한은 이제 이 비밀을 선포해야 합니다. 그는 소망이 있는 이 말씀을 담대하게 기록하여 지금 2021년을 살아가는 저와 교우님들에게까지 선포하고 있습니다.

성도는 주님의 다시오심에 관한 예언을 받을 때에 두려워 떨고 있기만 해서는 안됩니다. 성도는 앞으로 일어날 일을 먼저 목격한 증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증인된 우리들에게 세상을 향해 구원과 심판이 있음을 증언할 것을 요청하셨습니다. 이제 일곱째 나팔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마지막 나팔은 절대로 멈추지도, 지체하지 않을 것이며 하나님의 때에 반드시 불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하루, 하나님 나라를 바라보며 종말을 기대하고 소망하며 사십시다. 더 나아가 아직까지 복음을 알지 못하는 가족, 이웃들이 있다면 그들에게 말과 행동과 삶으로 그리스도를 전하는 삶을 살아내십시다. 그것이야 말로 요한계시록을 증인 된 우리에게 남겨주신 주님의 가장 큰 목적이기 때문입니다.


기 도

사랑과 은혜가 풍성하신 아버지 하나님. 아무도 마지막 때에 관심을 갖지도, 알아야 할 필요도 느끼지 못하던 때에 우리에게 종말을 깨닫게 하시고 준비하는 삶을 살아갈 수 있게 하시니 감사드립니다. 2천년전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불의한 재판에 침묵으로 임하셨던 주님. 주님의 십자가 사건 때문에 우리는 종말의 날을 심판의 날이 아닌, 구원과 기쁨의 날로 기다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제 이 은혜를 힘입어 교회 공동체 안에서 서로 용서하고 사랑하고 섬기는 성도되게 하옵소서. 더 나아가 아직까지 심판의 날을 알지 못하는 가족과 이웃들에게 긍휼한 마음으로 다가가 구원의 길이 있음을 증거하는 증인이 되게 하옵소서. 주님 다시 오실 그날을 신실하게 준비하며 기다리는 성도가 되길 소망합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묵상을 돕는 질문
1.인생을 돌아보면서 하나님을 향한 믿음이 희미해진 경험이 있습니까? 그때 왜 그랬다고 생각하십니까?
2.하나님이 주신 복 중에 나의 기도의 내용보다 더 나았던 것은 무엇이었습니까? 그 사건 때문에 나에게 있었던 변화는 무엇입니까?
3.설교때 들었던 말씀을 실생활에서 적용했을 때 구체적인 어려움이나 받았던 은혜는 무엇입니까?
4.말씀을 통해 종말을 보게 하신 주님께서는 안으로 집중된 우리의 시선을 밖으로 향하게 하십니다. 내 주변에 있는 사람들의 구원을 위해 어떤 결단을 하시겠습니까?

(작성 : 김호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