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에스겔 9:1-11
찬송: 280장 '천부여 의지 없어서'

탄식하며 우는 자의 이마에 표를 그리라(1~6)
이 정도일 줄은 몰랐습니다. 하나님의 벌하심은 가혹하다 생각했고, 이 현실의 어려움이 정말 억울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아무리 그래도 사랑의 하나님이 너무 심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아니었습니다. 8장에서 이스라엘은 참혹하고 부끄러울 만큼 우상숭배에 빠져있었습니다. 백성의 장로들도, 성전의 제사장들도, 성문 어귀의 여인들도 모두 저마다의 우상숭배에 흠뻑 젖어있었습니다. 가증하고 악한 일을 여호와의 성전에서 아무런 거리낌이 없이 행하던 이들에게 하나님의 진노는 마땅했습니다. 자비도, 불쌍히 여김도 없이 철저하게 내리시는 분노의 하나님 음성은 죄악을 향하여 달려가는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절규이기도 합니다.
1절 또 그가 큰 소리로 내 귀에 외쳐 이르시되 이 성읍을 관할하는 자들이 각기 죽이는 무기를 손에 들고 나아오게 하라 하시더라

하나님의 말씀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여섯 사람이 손에 무기를 잡고 하나님의 심판을 집결하는 이로 서게 됩니다. 각기 손에는 죽이는 무기를 든 파괴의 천사들입니다. 이들은 조직폭력배들처럼 몽둥이나 망치를 드는 수준이 아니라 도시 전체를 파멸할 정도의 강력한 무기를 든 하나님의 군대입니다. 이들은 사람들에게 거부당한 하나님의 사랑에 의해 발생한 하나님의 분노, 슬픔, 좌절의 표상이기도 합니다.

그 중에 한 사람은 가는 베옷을 입고 허리에는 서기관의 먹 그릇을 찼습니다.
2절 내가 보니 여섯 사람이 북향한 윗문 길로부터 오는데 각 사람의 손에 죽이는 무기를 잡았고 그 중의 한 사람은 가는 베 옷을 입고 허리에 서기관의 먹 그릇을 찼더라 그들이 들어와서 놋 제단 곁에 서더라

본문의 ‘그 중에’로 번역된 히브리어 ‘빼토캄’은 문자적인 의미로 ‘그들 가운데 한 사람’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래서 더 정확한 번역은 심판자 6명과 1명의 먹 그릇을 찬 사람으로 총 7명으로 보는 것이 맞겠습니다. 가는 베옷은 가늘고 고운 흰색의 세마포를 의미하면서, 제사장의 의복이기도 합니다. 많은 성경학자들은 이 먹 그릇을 찬 존재를 예수 그리스도로 보기도 하며, 탈무드는 가브리엘 천사로 보기도 합니다.

먹 그릇을 찬 존재를 예수 그리스도로 보는 이유는 그가 담당하는 사역에 있습니다. 살려야 할 사람들에게는 이마에 표를 그리게 했는데, 히브리어 알파벳의 가장 마지막인 22번째 글자 ‘타우’를 그렸습니다. 이 글자는 십자가를 의미하기도 하고, 하나님의 소유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먹 그릇을 든 이에게 내려진 명령은 탄식하며 울고 있는, 반드시 살아야만 하는 이들의 이마에 십자가 표시, 하나님의 소유라는 표시를 하라는 것입니다.
4~6절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너는 예루살렘 성읍 중에 순행하여 그 가운데에서 행하는 모든 가증한 일로 말미암아 탄식하며 우는 자의 이마에 표를 그리라 하시고 그들에 대하여 내 귀에 이르시되 너희는 그를 따라 성읍 중에 다니며 불쌍히 여기지 말며 긍휼을 베풀지 말고 쳐서 늙은 자와 젊은 자와 처녀와 어린이와 여자를 다 죽이되 이마에 표 있는 자에게는 가까이 하지 말라 내 성소에서 시작할지니라 하시매 그들이 성전 앞에 있는 늙은 자들로부터 시작하더라

신실한 자들에게는 하나님께서 이마에 표식을 그려주시며, 심판하는 천사들의 칼날을 피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표식을 받지 못한 이들은 예외 없이 심판을 받게 됩니다. 우상 숭배자들, 부정하고 더러워진 사람들, 죄악에 둔감하고, 교만하며,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고, 하나 됨을 거부하고 늘 분열하고 갈등하는 이들, 예배를 무너뜨리고, 하나님의 권위를 무시하고 경멸하는 이들, 어지러운 세상을 바라보고 아무런 아픔도 느끼지 못하는 차디차게 굳어버린 마음의 사람들은 반드시 심판을 받게 됩니다. 그리고 이처럼 완악해져 가는 세상과 교회를 바라보며 눈물을 흘리고 회개하는 이들에게 하나님은 구원을 베풀어주신다는 약속의 환상이기도 합니다.

가슴 아파하는 이들의 이마에 그려진 표식은 유월절 당시 어린 양의 피로 문설주와 인방에 그려 죽음의 사자가 넘어간 사건(출12:22-28)을 연상시키며,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과 최후 심판 때 이마에 어린 양의 이름과 하나님의 이름으로 인을 맞은 십사만 사천 명을 연상(계7:1-8;14:1)하게 합니다.

중보기도자 에스겔(7~11)
심판자들에게 내려진 두 번째 명령은 이마에 표식이 없음으로 심판받아 죽은 시신들을 우상숭배가 가득했던 성전에 채우라는 것입니다. 이미 8장에서부터 묘사되는 성전에서의 가증스러운 우상숭배는 더 이상 성전이 성전 될 수 없던 상황임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지금 유다가 멸망하는 이유는 분명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모두 깨지고 어긋나버린 이상 성전으로 대표되는 이스라엘의 신앙은 무의미합니다. 하나님은 성전을 심판하심으로 유다의 안일한 신앙에 경종을 울리게 하십니다. 잔혹한 학살, 하나님의 강한 진노와 심판이 내려지자 누구 하나 살아날 수 없었습니다. 그때, 에스겔의 기도가 시작됩니다.
8절 그들이 칠 때에 내가 홀로 있었는지라 엎드려 부르짖어 이르되 아하 주 여호와여 예루살렘을 향하여 분노를 쏟으시오니 이스라엘의 남은 자를 모두 멸하려 하시나이까

유다의 멸망을 바라보던 선지자 에스겔은 홀로 섰습니다. 죄악을 바라볼 때에도, 하나님의 심판이 시작되는 이때에도 선지자는 심적인 고독함과 절망감에 있습니다. 엎드려 부르짖었다는 의미는 얼굴을 떨어뜨릴 정도로 급속히 땅에 이마를 대고 무릎을 꿇었다는 말입니다. 인류 역사상 하나님을 제대로 섬기는 이들은 언제나 소수였습니다. 그 소수의 사람은 극심한 외로움과 고독 속에서 오직 말씀만을 붙들었고, 엎드려 기도할 뿐이었습니다. 세상이 타락해가는 속도는 너무도 빠르고, 나 하나로는 세상과 맞서기에 미약해 보입니다. 그럼에도 선지자는 기도를 멈출 수 없습니다. 중보기도는 선지자들이 역사 속에서 감당해왔던 사명입니다. 아브라함도 멸망 받을 소돔과 고모라를 향해 중보기도함으로 선지자로서의 사명을 감당했습니다(창18). 아모스도 이스라엘에게 임할 재앙을 보자 그 재앙을 거둬달라고 중보기도 하였습니다(암7:1-6). 심판하시는 하나님이 얼마나 무서웠던지 그는 목이 터져라 외쳤습니다. “주 여호와여 청하건대 사하소서 야곱이 미약하오니 어떻게 서리이까”

이처럼 중보기도하는 에스겔에게 하나님은 이미 심판을 거두기엔 때가 너무 늦었다고 말씀하십니다.
9-10절 그가 내게 이르시되 이스라엘과 유다 족속의 죄악이 심히 중하여 그 땅에 피가 가득하며 그 성읍에 불법이 찼나니 이는 그들이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이 땅을 버리셨으며 여호와께서 보지 아니하신다 함이라 그러므로 내가 그들을 불쌍히 여기지 아니하며 긍휼을 베풀지 아니하고 그들의 행위대로 그들의 머리에 갚으리라 하시더라

회개가 없는 사람과 민족은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습니다. 그 죄는 너무나 무겁고 커서 이미 극에 달했습니다. 더 이상 차오를 수 없어 폭발해버린 것입니다. 땅은 피가 가득하였고, 성읍은 불법이 가득 찼습니다. 법과 규정은 무시되었고, 정의는 왜곡되었으며, 악이 득세하는 곳에서는 어떤 희망도 피어나지 못했습니다. 우리가 발붙이고 사는 세상도 그리 다르지 않습니다. 마약과 성범죄 사건, 스스로 목숨을 끊어버렸다는 소식들, 누가 누구를 죽이고 해치며, 회사와 조직을 이용해 공금을 횡령하며, 환경을 파괴하고, 전쟁을 일으키며, 갑질을 행하고, 사람과 짐승을 학대하는 일들은 우리의 일상이 되어버렸습니다. 우리의 죄가 이미 우리에게 심판이 되었습니다. 이 심판은 하나님이 무관심하시거나, 우리에게 무정하심으로 온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과 유다, 그리고 우리가 행한 대로 받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는 빛이 필요합니다. 오직 주님의 손길만이 우리의 굽은 허리를 펴주실 수 있습니다. 사람을 사랑하신 하나님께서 그 마음을 담아 우리에게 율법을 주셨듯이, 그 말씀이 굽어진 우리 삶을 온전케 하셨듯이, 우리 역시 우리의 이웃과 우리의 주변에 하나님의 마음으로 손 내밀고 자유케 하는 율법 위에서 함께 새로워져야 합니다. 빛으로 사는 그리스도인이라면 적어도 이 땅에서 일어나는 참상을 보며 가슴 아픈 눈물을 흘릴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적정믿음입니다. 우리의 눈물을 보시고 하나님의 구원의 표가 우리의 이마에 새겨지게 될 것입니다. 이 아침이 하나님 외에 우상으로 군림하던 모든 것을 과감하게 버리며 잃었던 눈물을 회복하는 거룩하고 복된 아침이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기도
사랑의 주님.
예루살렘 성전의 참상이 우리의 자화상입니다. 겉으로는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지만, 실상 나의 내면은 하나님보다 돈을 더 의지하였고, 사람을 더 신뢰하였으며, 내 이름 석 자 남기는 것이 더 중요했습니다. 악해져 가는 세상을 향해 혀는 찼었지만 가슴은 아프지 않았고, 세상의 아픔과 상처를 보며 아무런 공감 없이 내 배 채우는 것에만 관심이 있었습니다. 뜨겁던 눈물은 사라지고, 신앙의 기쁨도 없어진지 오래되어버린 나를 발견합니다. 주여, 나를 용서하여 주옵소서. 말라버린 우리 두 눈에 뜨거운 눈물을 허락하옵시고, 굳어진 내 심령에 하나님의 마음 심어주옵소서. 무너져가는 교회를 바라보며 기도하게 하옵시고, 잃어버린 영혼들을 바라보며 부르짖는 적정믿음으로 살아가는 하루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묵상을 돕는 질문
1. 성전안에서 일어나던 참혹한 우상숭배를 봅니다. 하나님을 예배하는 곳이 어떻게 우상으로 가득해지게 되었는지 묵상해봅시다.
2. 하나님의 분노, 슬픔, 좌절의 표상인 무기 든 여섯 사람을 보며 하나님의 심정이 어떠할지 상상해봅시다.
3. 탄식하며 우는 자들의 이마에 구원의 표를 주시는 주님을 묵상합니다. 그리고 죄악에 물든 세상의 회복이 어디에서 시작되어야하는지 묵상해봅시다.
4. 중보기도자 에스겔처럼 우리도 중보기도자가 되어 기도제목들을 기록하고 오늘 하루 중보기도자로 살아갑시다.

(작성: 김대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