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송가 : 90장 '주 예수 내가 알기전' 
 

오늘 본문10절부터 15절 까지 내용을 살펴보면 보디발의 아내가 자꾸 귀찮게 엉겨 붙으니깐 아예 곁에 있지도 않습니다. 거기다가 어떻게 하다 둘이 있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아줌마가 완전 눈이 돌아가서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요셉의 옷을 벗기려 듭니다. 그러자 요셉은 옷을 벗어 두고 도망을 나갑니다. 한 편의 드라마처럼 너무도 자세하게 설명이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엄청난 반전이 일어납니다. 이 여자가 요셉에게 누명을 씌운 것입니다. 오히려 요셉이 자기를 범하려 했다고 누명을 씌웁니다. 그런데 보디발은 아내의 말을 듣고 요셉을 감옥에 가두게 됩니다.



 
저는 여러 목사님들이 창세기 39장을 설교하시면서 요셉이 굉장히 어려운 유혹을 뿌리쳤다고 설교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어릴 때부터 이 본문을 보면 궁금했던 것은 이거였습니다. 보디발의 아내가 이뻤을까 아니었을까가 굉장히 궁금했습니다. 십대의 잘생긴 총각인 요셉에게 뚱뚱하고 포악스러운 아줌마의 유혹은 뿌리치기가 상당히 쉬웠을 것입니다. 한편 젊고 이쁜 아줌마였다면 쉽지 않았겠지요. 그런데 성경은 그것을 얘기해 주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요셉의 사건에서 보디발의 아내의 유혹을 뿌리 쳤다는 것이 핵심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보디발의 아내는 끊임 없이 요셉을 유혹했고 요셉은 이 유혹을 뿌리쳤다습니다. 그것을 성경은 자세히 기록해 놓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요셉이 그만큼 억울하게 감옥에 갔음을, 아무런 자기의 잘못이 없이 감옥에 갔음을 이야기하기 위함입니다. 

  창세기 39장에서 우리는 성경에서 가르치고 있는 다양한 메시지를 찾을 수 있습니다. 이 창세기 39장을 우리가 볼 때 보통은 두 가지의 메시지를 찾는 것 같습니다. 하나는 요셉이 보디발의 아내가 유혹해도 넘어가지 않았다. 여자의 휴혹을 이겼다. 죄악을 이긴 사람이다. 죄의 유혹에 넘어가지 않았다. 이것을 창세기 39장 설교때 참 많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창세기 39장의 이야기는 여기 뿐만 아니라 성경의 여러곳에서 나옵니다. 그런데 보디발의 아내의 유혹을 이겼다. 죄를 뿌리쳤다. 이런 측면에서 창세기 39장을 이야기하고 있는 성경은 별로 없습니다.


그리고 창세기 39장에서 일반적으로 듣는 이야기 또 하나는 요셉의 인생이 하나님께서 함께 하심으로 말미암아 형통하더라. 이 이야기를 많이 듣습니다.


물론 두 부분 다 맞습니다. 특히 39장 9절을 보면 내가 어찌 큰 악을 행하여 하나님께 죄를 지으리이까. 이런 말을 요셉이 합니다. 그러니까 이 말이 무슨 말이냐 하면 애굽 여인아 너는 죄인이다. 죄를 짓고 있다. 이 말입니다. 그리고 요셉은 하나님을 대표하는 사람으로서 죄악된 세상에 대해 질타하고 있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창세기 39장에서 말하고자 하는 핵심적인 이야기는 아닙니다.



 
창세기 39장의 핵심은 어떤 반복되는 한 단어에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형통함입니다. 요셉의 삶에 대해 성경은 형통이라는 단어를 계속 사용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요셉의 삶은 형통한 삶이라고 쉽게 생각합니다. 39장 3절에 보면 그의 주인이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하심을 보며 또 여호와께서 그의 범사에 형통하게 하심을 보았더라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요셉이 감옥에 갇히고 나서도 그와 동일한 내용을 볼 수 있습니다. 39장 23절을 보면

간수장은 그의 손에 맡긴 것을 무엇이든지 살펴보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심이라 여호와께서 그를 범사에 형통하게 하셨더라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요셉의 인생을 보면서 형통한 인생이라고 생각합니다. 요셉의 인생은 분명 형통한 인생이 맞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간과하고 있는 중요한 사실이 하나 있습니다. 우리가 생각할 때 형통함이란 어떤 어려움이 없이 성공적인 삶을 사는 것을 형통하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생각할 때 형통한 인생이란 고등학교 때까지 공부 잘하고 대학도 재수 안하고 취업도 좋은 곳에 하고 결혼도 좋은 사람이랑 해서 행복하게 사는 삶. 그런 삶이 형통하다고 하지 않습니까? 아들이 삼수해도 대학 떨어지고, 고생해서 취업했는데 억울하게 짤리고, 힘들게 대학 졸업해서 대기업에 취업했더니 전공에 관계된 일은 안시키고 커피 심부름에 인격적인 모욕만 당하고, 신뢰할 수 있는 사람에게 소개 받아 결혼했는데 사기 결혼이고, 이런 인생을 절대 형통하다고 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요셉의 인생을 보십시요. 도대체 어느 구석이 형통함이 보입니까?



 
애굽으로 종으로 팔려가서 인정 받는 것이 형통함입니까? 아니면 아예 종으로 팔려가지 않고 아버지 집에서 편안하게 지내는 것이 형통함입니까? 우리가 생각할 때 정말 형통한 인생이라면 억울하게 애굽으로 팔려가지 않아야 되는 것 아닙니까? 그리고 감옥에 가서 잘되는 것이 형통함입니까? 아니면 감옥에 안 가는 것이 형통함입니까? 애굽으로 팔려 갔더라도 억울하게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갇히는 일은 없어야 되는 것 아닙니까? 그런데 요셉은 형제들이 시기하여 억울하게 애굽으로 팔려가고 보디발의 아내에게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갇히게 됩니다.



 
그런데 이런 요셉의 인생을 성경은 형통하다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이 요셉의 인생을 형통하다고 우리가 쉽게 받아들이는 것은 결과가 좋기 때문일 것입니다. 요셉이 결국 애굽의 국무총리가 되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결과만 좋으면 앞의 어떤 것도 좋게 해석하는 그런 문화에 우리가 익숙해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아마도 우리가 군대문화에 익숙해서 그런 듯 합니다. 군대는 결과만 좋으면 무조건 좋은 것입니다. 과정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이런 우리의 결과중심적인 사고는 분별력을 약하게 만듭니다.


 
성경이 요셉의 인생을 형통한 인생이라고 하는 데에는 요셉을 봐라. 그렇게 고생을 하더니 고생 끝에 낙이 오더라. 결국 국무총리가 되지 않았냐는 식의 결과론적인 이유 때문이 아닙니다. 성경은 요셉이 국무총리가 되었기 때문에 형통한 인생이라고 하지는 않습니다.



 
우리가 주목해서 보아야 할 것은 요셉의 인생을 형통한 인생이라고 할 때 누가 볼 때 형통한 인생이냔 말입니다. 40장 15절을 보면 요셉은 자기 스스로의 인생을 평가할 때 무엇이라고 평가합니까? 억울한 인생이라고 평가합니다. 자기 인생을 억울하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요셉의 인생을 누가 볼 때 형통하다고 하는 것입니까? 바로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형통하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요셉의 인생을 어떤 측면에서 형통하다고 하시는가?


시편 105편 17절부터 19절까지입니다.

그가 한 사람을 앞서 보내셨음이여 요셉이 종으로 팔렸도다

그의 발은 차꼬를 차고 그의 몸은 쇠사슬에 매였으니

곧 여호와의 말씀이 응할 때까지라 그의 말씀이 그를 단련하였도다


요셉이 종으로 팔리고 몸이 쇠사슬에 매인 것이 여호와의 말씀이 응할 때까지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호와의 말씀이 응한다는 것은 요셉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이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요셉에게 일어난 일들을 보면 요셉을 통해 주위 사람들이 복을 받습니다. 보디발이 요셉을 인정해 주자 39장5절을 보면 애굽 사람의 집에 복을 내리십니다. 이 내용이 어디서 본 것 같지 않습니까?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한 약속 창세기 12장3절을 보면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하신지라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요셉을 축복하고 인정하는 자에게 하나님께서는 복을 내리십니다. 요셉을 인정하고 요셉을 좋게 본 보디발의 집에 하나님께서는 요셉 때문에 복을 내리신 것입니다.



 
요셉을 통해 성경이 말하고 있는 형통함이란 하나님의 형통함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나를 통해 이루어지는 것을 경험하는 것이 바로 형통함입니다.

우리의 삶이 참으로 요셉처럼 고통으로 얼룩지고 억울한 일로 비참하다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우리를 통해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보여주고 계신다면,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를 통해 이루고 계시다면 우리의 삶은 형통한 삶인 것입니다.

그 삶이 우리들의 눈과 세상 사람들의 눈으로 볼 때는 억울한 삶일 수 있습니다. 실패한 삶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통해 이루시고자 하는 뜻이 있다면, 그리고 그 뜻을 이루는데 우리들의 치욕과 모욕과 손가락질 받음과 부끄러움과 실패와 억울함을 사용하시고자 한다면 그것조차 성경이 말하는 형통한 삶인 것입니다.



 
부디 이 하나님의 형통함 가운데 굳게 서 계십시오. 성도들이 이 하나님의 형통함에 서 있지 않으면 사람들의 평가와 세상의 공격에 이기지 못합니다. 세상 사람들의 하나님과 상관없는 인생의 가치관이 우리에게 파고들 때 버틸 수 있는 힘이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성경이 말하는 바른 형통함에 서 있다면, 요셉을 통해 하나님의 형통하심을 보여 주셨던 그 하나님께서 요셉과 마찬가지로, 동일하게 우리들을 통해, 그리고 교우님들의 자녀들을 통해 하나님의 형통하심을,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하나님 말씀이 우리를 통해 이루어지는 참된 형통함을 보여주시리라 믿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께서는 어떤 목적 가운데 우리 인생을 이끌고 계심을 믿습니다. 그 과정속에 때로는 실패가 있고, 고난이 있고 때로는 억울함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이, 하나님의 약속이 나를 통해 드러날 수 있다면 그것으로 기뻐할 수 있는 신앙을 주시기를 원합니다. 이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고난 없는 만사형통이 아니라 나를 통해 하나님의 말씀이 이루어지는 참된 형통함을 소망하는 인생들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