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사도행전8:26-40
찬송가 195장 '성령이여 우리 찬송 부를때'

오늘 말씀은 빌립과 에디오피아 내시와의 만남에 대한 말씀입니다. 26절 “주의 사자가 빌립에게 말하여 이르되 일어나서 남쪽으로 향하여 예루살렘에서 가사로 내려가는 길까지 가라 하니 그 길은 광야라.” 사마리아에 복음을 전한 빌립에게 주님은 주의 사자를 통해 사마리아에서 남쪽인 예루살렘에서 가사로 가는 광야로 가라고 했습니다. 곧 주님은 빌립에게 사람이 사는 성읍인 예루살렘이나 가사가 아닌 사람이 살지 않는 황량한 광야로 가라고 한 것입니다. 그러기에 본문엔 없지만 빌립은 혹 속으로 ‘광야에 뭐가 있길래 가라시는 거지?’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릅니다.

주님을 믿는 우리에게 때론 우리의 생각과는 다른 주님의 명령과 요구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처럼 직접적으로 주님의 천사가 나타나거나 성령님께서 우리 귀에 대고 직접 말씀하시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가 피하거나 거부할 수 없는 주님의 명령, 주님의 요구입니다.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은 경험했을 신앙적 도전으로 나는 전혀 생각지 못하고 있었고, 생각지 않았던 일인데 주님께서 명령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주님의 명령과 요구가 말씀 속에 있습니다. 바로 주님은 말씀을 통해 우리에게 주님의 명령과 뜻을 전달하십니다. 그리고 그 말씀이 종종 우리의 생각이나 계획과는 다른 것입니다.

사랑하지 않아도 마땅한 사람인데 사랑하라고 말씀하시고, 우리는 급한데 기다리라고 말씀하시고, 난 염려되고 걱정스러운데 믿으라고 말씀하시고, 내가 수고해 번 것인데 나누라고 하시고, 난 다시스로 가고 싶은데 니느웨로 가라고 하십니다. 그러므로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말씀을 청종해야 합니다. 말씀 앞에 자신을 두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 말씀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진정 하나님을 믿는다면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날마다 말씀 앞에 서야 합니다. 말씀 앞에서 우리의 구원은 말씀을 통해 이루어지고, 우리가 가야 하는 길이 말씀의 길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고백해야 합니다. 우리가 늘 기억할 것은 우리의 인내는 말씀에 대한 인내라는 사실입니다. 그 말씀에서 주의 뜻을 깨닫고 의미롭고 복된 인생을 삽니다.

27-28절 “일어나 가서 보니 에디오피아 사람 곧 에디오피아 여왕 간다게의 모든 국고를 맡은 관리인 내시가 예배하러 예루살렘에 왔다가 돌아가는데 수레를 타고 선지자 이사야의 글을 읽더라.” 주님의 명령을 따라 광야로 간 빌립은 그곳에서 에디오피아 여왕 간다게의 재정을 맡고 있는 고위 관리를 만났습니다. 그런데 그 고위관리가 이사야서의 말씀을 읽고 있었던 것입니다.

29-30절 “성령이 빌립더러 이르시되 이 수레로 가까이 나아가라 하시거늘 빌립이 달려가서 선지자 이사야의 글 읽는 것을 듣고 말하되 읽는 것을 깨닫느냐.” 그리고 성령께서 빌립에게 고위관리가 타고 있는 수레로 가라 하셨고 빌립이 고위관리에게 읽고 있는 말씀의 의미를 알겠느냐고 물은 것입니다.

31-40절 “대답하되 지도해 주는 사람이 없으니 어찌 깨달을 수 있느냐 하고 빌립을 청하여 수레에 올라 같이 앉으라 하니라 읽는 성경 구절은 이것이니 일렀으되 그가 도살자에게로 가는 양과 같이 끌려갔고 털 깎는 자 앞에 있는 어린 양이 조용함과 같이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그가 굴욕을 당했을 때 공정한 재판도 받지 못하였으니 누가 그의 세대를 말하리요 그의 생명이 땅에서 빼앗김이로다 하였거늘 그 내시가 빌립에게 말하되 청컨대 내가 묻노니 선지자가 이 말한 것이 누구를 가리킴이냐 자기를 가리킴이냐 타인을 가리킴이냐 빌립이 입을 열어 이 글에서 시작하여 예수를 가르쳐 복음을 전하니 길 가다가 물 있는 곳에 이르러 그 내시가 말하되 보라 물이 있으니 내가 세례를 받음에 무슨 거리낌이 있느냐 이에 명하여 수레를 멈추고 빌립과 내시가 둘 다 물에 내려가 빌립이 세례를 베풀고 둘이 물에서 올라올새 주의 영이 빌립을 이끌어간지라 내시는 기쁘게 길을 가므로 그를 다시 보지 못하니라 빌립은 아소도에 나타나 여러 성을 지나 다니며 복음을 전하고 가이사랴에 이르니라 .”

그리고 빌립이 간다게의 고위관리가 읽고 있던 이사야서의 말씀의 의미를 설명해 주었고 깨달은 고위관리는 세례를 받은 것입니다. 37절의 ‘없음’은 성경은 원본이 없이 여러 사본들뿐인데 한글성경이 원본으로 둔 헬라어 사본에는 37절이 없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해석을 필요로 하는 책입니다. 한 편의 시, 그림에도 해석과 설명이 필요하지만 성경은 세상의 어떤 글과도 차원이 다른 깊고 온전한 해석이 필요한 글입니다. 왜냐하면 성경은 하나님의 구원의 계시로 영원하신 하나님의 뜻이 함축되어 있는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성경을 재료로 하는 설교의 중요한 의미와 설교자의 두렵고 막중한 책임과 사명이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을 자신의 세상적인 성공을 위한 수단으로 사용한다거나, 왜곡되고 극단적인 해석으로 성도들의 신앙과 인생을 빗나가게 하는 것에 대해 조심하고 경계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결국 스스로 하나님의 심판을 부르는 비극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말씀을 전하는 자는 항상 두렵고 떨림으로 말씀을 전해야 하고, 말씀을 듣는 자는 하나님께서 교회 안에 세우신 하나님의 방법과 질서로서 설교를 존중하고 쉽게 평가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말씀의 핵심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곧 말씀에서 살아계신 주님을 만나고 경험하며 주님의 뒤를 따르는 것입니다. 바로 빌립의 설교를 듣고 깨달은 간다게의 고위관리가 주저 없이 당시 자신의 생명과 인생을 바치는 의미의 세례를 받았던 것처럼 말씀이 삶으로 이어지고 드러나야 하는 것입니다.

신앙은 반드시 삶으로 드러나야 합니다. 말씀은 삶으로 드러나야 하는 말씀입니다. 삶으로 드러나지 않는 신앙, 삶으로 드러나지 않는 말씀은 다 허구입니다. 그것은 주님과 아무런 관계가 없는 종교형식주의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말씀을 전했다면 말씀의 삶을 살아야합니다. 말씀을 들었다면 말씀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전하는 재미에 스스로 도취되어 자가당착에 빠져서는 안 되고, 듣는 즐거움으로만 신앙의 완성을 착각해서도 안 됩니다. 한 마디로 복음을 말하고 내세우며 자신은 비복음적이고 지극히 세상적인 삶을 사는 것은 하나님을 우롱하는 것입니다. 그런 인생은 잠시 사람을 속일 수 있을지는 몰라도 하나님을 속이지는 못합니다. 지금은 전하는 자나 듣는 자나 그런 허위적인 신앙이 너무 많은 것입니다. 그러기에 지금은 어느 시대보다 복음의 경험과 복음적인 삶에 대해 진지해져야 하는 때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영원한 상실을 맞이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사는 동안, 죽을 때까지 말씀의 길을 가는 자들입니다. 말씀에서 주님을 만나고 주님께 들으며 주님께서 명하시고 부르시는 길을 가는 것입니다. 우리의 매일은 그런 날들인 것입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오늘도 말씀을 통해 주님께 듣는 자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말씀에서 주님을 만나고, 주님의 명령을 듣고, 보내시고 부르시는 길을 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살아야 하는 삶을 살게 하여 주시옵소서. 복음의 장사꾼이 아니라, 삶으로 복음의 사람임을 입증하는 참된 복음의 사람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말씀의 삶에서 의미롭고 복된 인생을 알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묵상을 돕는 질문
1. 지금까지 주님께서 내 생각과 다르게 말씀하신 적이 있었는지에 대해 뒤돌아봅시다.
2. 그 말씀에 나는 어떻게 반응했었는지 뒤돌아봅시다.
3. 오늘 주님께서 보내시는 나의 광야는 어디인가?
4. 오늘 그 삶의 광야에서 그리스도인 된 나의 역할은 무엇인가?
5. 진정, 복음적이라는 것은 무엇인지 진지하게 묵상해 봅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