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8월 11일 토요일
<본문> 열왕기하 3장 1-12절

오늘 본문 3장 바로 앞 구절인 2장 25절은 엘리야의 뒤를 이은 엘리사가 사마리아로 돌아왔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는 그가 북이스라엘의 선지자 사역을 본격적으로 시작하게 되었음을 뜻합니다. 이어서 오늘 본문 1절은 아합의 아들 여호람이 사마리아에서 이스라엘을 12년간 다스렸음을 언급합니다.
아합의 아들 아하시야의 뒤를 이어 왕이 된 사람은 그의 형제인 여호람이었습니다. 아하시야가 아들이 없이 죽어서입니다. 하나님은 열왕기상 21장에서 나봇의 포도원을 빼앗고 나봇을 죽인 아합과 이세벨을 향해 아합의 가문이 끊어질 것이라 말씀하신 바 있습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아합의 집을 단번에 제거하지 않으시고, 아합의 또 다른 아들 여호람을 왕으로 세우셨습니다.
왕위에 오른 여호람은 나름대로의 종교개혁을 단행했습니다. 2절입니다. “그가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였으나 그의 부모와 같이 하지는 아니하였으니 이는 그가 그의 아버지가 만든 바알의 주상을 없이하였음이라.” 그는 아버지 아합이 만든 바알의 주상을 제거했습니다. 아마도 아버지 아합과 형 아하시야가 하나님의 징계로 망하는 것을 보면서 그들이 섬기던 바알이 참 구원자가 되지 못한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것입니다. 바알을 섬기면 섬길수록 나라가 혼란하고 아람과의 전쟁에서 패하고 고통을 겪는 것을 보았기에 바알의 주상을 없애기로 결정한 것입니다.
그가 이렇게 결정하게 된 데는 하나님을 향한 신앙이 그 동기가 된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자신을 위한 개혁이었으며 효과적인 국가 통치를 위한 한 방편이었을 뿐입니다. 왜냐하면 진실한 회개와 온전한 돌이킴이 그 안에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그가 하나님 보시기에 악을 행했지만 그의 부모와 같지는 않았다고 말한 것입니다. 여호람은 그의 아버지 아합만큼 악한 왕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진실한 왕도 아니었습니다. 더 나쁜 죄를 짓지 않았을 뿐 하나님 앞에서 적극적인 믿음의 선, 곧 하나님을 사랑하는 일에는 역시 실패했던 것입니다. 천국 문 가까이 나아오는 것이 멀리 떨어져 있는 것보다 훨씬 아름답고 복되지만, 가까이 있기만 할 뿐 문 안으로 들어오지 않는 것은 멀리 있는 것과 본질적으로는 다르지 않은 불행입니다. 그러하기에 2절 말씀에 이어 3절 말씀이 바로 기록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가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이 이스라엘에게 범하게 한 그 죄를 따라 행하고 떠나지 아니하였더라.”
오늘날 우리들의 삶도 다르지 않습니다. 겉으로 봐선 기독교 신앙인처럼 말하고 행동합니다만 그 저의는 너무나 인간적인 것에 머물러 있습니다. 100주년기념교회는 시편 1편 1절에서처럼 복 있는 자의 길을 걸어가기로 결정한 공동체입니다.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기로 선언했습니다. 그렇다고 1절 말씀에만 머문다면 우리는 오늘 본문의 여호람 같이 의롭게 살려고 남들에게 내비치는 정도의 삶을 산 것밖에는 더도 덜도 아닐 것입니다. 시편 1편 2절,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 이 세상의 방법과 죄악의 자리에 서지 않기로 한 만큼 오직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의 기쁨이 되고 삶의 목적이 되고 우리 인생의 동기가 되지 아니한다면 빛 좋은 개살구요 허울 좋은 기독교인에 지나지 않을 뿐입니다. 그러므로 이번 주일이 다가오기 전에 우리 자신의 내면적인 동기가 무엇인지를 다시 한번 물어보면서 오직 주님만이 우리의 진정한 동기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여호람의 첫 번째 행적은 모압 정벌이었습니다. 모압은 아합이 죽은 후 혼란스러운 틈을 타 이스라엘을 배반했습니다. 힘의 원리로 맺어진 주종 관계는 그 힘의 균형이 깨지게 되면 언젠가는 그 관계도 같이 깨지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성도와 그리스도의 관계는 힘과 위협이 아닌, 사랑과 경외심으로 맺어진 영원한 언약 관계입니다. 따라서 우리의 주님은 그 백성을 배반하지 않으시고 그 백성 또한 그분을 신실히 따릅니다.
7절입니다. “또 가서 유다의 왕 여호사밧에게 사신을 보내 이르되 모압 왕이 나를 배반하였으니 당신은 나와 함께 가서 모압을 치시겠느냐 하니 그가 이르되 내가 올라가리이다 나는 당신과 같고 내 백성은 당신의 백성과 같고 내 말들도 당신의 말들과 같으니이다 하는지라.” 여호람은 모압의 배반을 응징하여 다시 이스라엘의 속국으로 만들고자 합니다. 하지만 그 계획을 가지고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지는 않았습니다. 그가 바알의 주상을 제거하는 데는 성공했지만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분을 섬기는 길로 완전히 돌아서지는 않았음을 잘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그는 하나님을 의지하는 대신 남 유다 왕 여호사밧에게 모압을 함께 ‘치자’, 즉 전쟁하자고 요청합니다.
아합 시절부터 북 이스라엘과 화친정책을 취해 온 남 유다 여호사밧 왕은 이에 기꺼이 응합니다. 화친정책 자체는 문제가 아니지만 그것을 하나님의 뜻보다 우선시하는 것은 엄연한 잘못이었습니다. 여호사밧 역시 모압 정벌 계획에 대해 하나님의 뜻이 어떤지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던 것입니다. 인간의 어떠한 약속도 하나님의 은혜가 없다면 뿌리 없는 나무와 같아서 아무런 열매도 거둘 수 없는 법입니다. 그러므로 100주년기념교회가 오직 시편 1편 1-2절 말씀처럼 살아가려 한다면 3절 말씀처럼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철을 따라 열매를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을 것이요 “하는 모든 일이 다 형통”하게 될 것입니다.

여호람과 여호사밧의 연합군은 곧 위기에 직면합니다. 모압을 향해 진격하던 중 에돔 광야에서 물이 떨어진 것입니다. 하나님을 의지하기보다 자신의 계획이나 주변 사람들의 도움을 의지하는 자들은 예기치 못한 위기가 발생할 때 속수무책으로 무너질 수밖에 없습니다. 여호람은 그 위기 속에서 하나님을 부르고 찾을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와 함께 있던 여호사밧의 반응은 달랐습니다. 11절입니다. “여호사밧이 이르되 우리가 여호와께 물을 만한 여호와의 선지자가 여기 없느냐 하는지라. 이스라엘 왕의 신하들 중의 한 사람이 대답하여 이르되 전에 엘리야의 손에 물을 붓던 사밧의 아들 엘리사가 여기 있나이다 하니.” 그는 즉시 여호와께 ‘물을 만한’ 선지자를 찾았습니다. 비록 군대를 출정하기 전에는 어정쩡하게 하나님의 뜻을 묻지도 않고 여호람과 동행했지만 믿음조차 버려두고 떠나온 것은 아니었습니다. 믿음이 있으면 언제나 선지자, 곧 자신을 하나님께로 인도할 통로를 찾게 해줍니다. 어떤 종류의 위기라도 그 해결책이 여호와 하나님 그분께만 있음을 알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아이러니한 것은 남 유다 왕에게 엘리사를 소개한 것은 남 유다의 신하가 아니라 북 이스라엘의 신하였습니다. 또한 하나님의 뜻을 분명하게 드러내준 선지자도 남 유다에 있었던 게 아니라 북 이스라엘의 선지자 엘리사였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사람은 하나님의 뜻을 구함에 있어 겸비해 있어야 합니다. 그렇게 해야 그 어디에서도 하나님의 분명한 인도하심을 경험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교우님들.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위기는 잠자던 우리의 믿음을 깨워 하나님께 전심으로 향하게 만드는 인생의 도우미입니다. 그러므로 이번 주일을 위해 온전히 주님께 우리의 마음을 전심으로 고백하는 시간이 되었으면 합니다.

<오늘의 기도>
오늘 우리는 아합의 또 다른 아들 여호람의 교훈을 하나님에게서 듣습니다. 여호람은 할아버지 오므리나 아버지 아합처럼 바알신에 매여 살지는 않았습니다. 하지만 정책적으로 이 일을 선택했을 뿐이지 하나님을 사랑해서 바알을 포기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저희의 삶 또한 여호람처럼 무늬만 기독교인에 머물지 않게 하옵소서.
여호람과 여호사밧의 차이를 다시금 분명하게 깨닫게 됩니다. 비록 여호사밧이 예전처럼 해오던 북 이스라엘과의 화친정책을 못 버려서 잠시 위기 가운데 몰리게 되었지만, 끝내 하나님의 선지자를 찾으며 하나님의 뜻을 물어보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약간의 윤리적인 개선이 아니라 근본적인 영적 거듭남이기에 오늘도 저희가 전심으로 하나님을 찾는 자가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