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9월 18일, 화요일
본문 : 열왕기상 22장 1절-28절
찬송가 322 세상의 헛된 신을 버리고
“아람과 이스라엘 사이에 전쟁이 없이 삼 년을 지냈더라”(1)
20장과 21장에서 살펴보았듯이, 이스라엘과 아람은 두 번의 전쟁을 치렀습니다. 아람의 병력의 규모나 전투력은 감히 이스라엘이 상대가 되지 않을 정도로 막강했으나, 아람은 이스라엘과의 전쟁에서 대패했습니다. 산지에서 벌어진 첫 번째 전쟁에서 패하자, 평지에서 싸우면 승산이 있다고 생각하고 갈릴리 호수 동편에 위치한 아벡으로 올라가서 전투를 벌였으나, 대패하고 말았습니다. 철병거로 무장한 아람이 이처럼 철저하게 두 번에 걸쳐 패한 것은 하나님께서 두 번의 전쟁에 직접 개입하셨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첫 번째 아람의 침공 때에 하나님께서 한 선지자를 통해 아합에게 아람의 군대를 그의 손에 넘겨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두 번째 침공 때에도 선지자가 나와서 이스라엘 왕과 온 백성들 앞에서 하나님께서 아람 사람들을 이스라엘의 손에 넘겨주어서 저들로 하여금 여호와를 알게 할 것이라는 말씀을 전했습니다(20:28). 그러나 전쟁에서 승리한 아합 왕은 승리에 도취되어 아람 왕 벤 하닷을 너그럽게 대해주는 우를 범하고 맙니다. 이 잘못된 점을 한 선지자가 지적하자, 그는 매우 기분이 상해서 다시 사마리아 돌아갔고, 이로 부터 삼년이 지났습니다.
어느 날 이스라엘의 오므리 왕조와 평화로운 관계를 유지하고 있던 유다 왕 여호사밧이 이스라엘 왕 아합을 방문하였습니다. 아합은 이스라엘을 방문한 유다 왕에게 라못 길르앗을 다시 수복하는데 동참할 것을 권합니다. 이에 여호사밧은 아합 왕의 제안을 받아들이되, 먼저 여호와의 말씀을 들어보자고 말합니다. 이스라엘 왕이 선지자 400명을 모아 놓고 라못 기르앗으로 싸우러 가도 되는가를 묻자, 그들 모두는 한결같이 이번 전쟁에서 승리할 것이라고 대답합니다. 400명 선지자들의 대답에도 불구하고, 여호사밧 왕은 다시 이스라엘 왕에게 물어볼 만한 다른 선지자가 요청하고, 항상 자신에게 나쁜 말만 하기에 싫어하는 미가야라는 선지자가 있다는 답변에 마지막으로 그에게도 물어보자고 간청하였습니다. 미가야 선지자는 이번 전쟁의 승패를 묻는 아합 왕의 질문에 “올라가서 승리를 얻으소서 여호와께서 그 성읍을 왕의 손에 넘기리이다(15)”라고 역설적으로 대답합니다. 미가야 선지자가 오기 전에 모여 있던 모든 선지자들은 이스라엘의 승리를 확신하고 있는데, 미가야 선지자는 이들과는 정반대로 패할 것임을 전하고 있습니다. 미가야 선지자는 모여 있는 선지자들이 전쟁에서 승리할 것이라고 예언하는 것은 바로 여호와께서 자신을 떠나 악행을 일삼는 아합을 죽이기 위해 거짓말 하는 영들을 모든 선지자들에게 보냈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미가야의 말에 격앙된 시드기야 선지자는 미가야의 뺨을 때리고, 아합 왕은 화가 나서 미가야를 잡아 옥에 가두어 자신이 무사히 돌아올 때 까지 죽지 않을 정도의 음식만 제공하라고 합니다.
“미가야가 말하였다. "임금님께서 정말로 평안히 돌아오실 수 있으면, 주께서 나를 시켜서 이런 말씀을 하시지도 않으셨을 것입니다." 미가야는 한 마디 더 붙였다. "여기에 있는 모든 백성은 나의 말을 잘 기억하여 두시오!" (28. 표준새번역)
하나님께서 아람 연합군의 두 번에 걸친 침공에 두려워 벌벌 떨던 이스라엘의 아합 왕을 승리자로 만들어 주신 이유는 아합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믿게 하기 위함이셨습니다(20:13, 28). 그러나 아합은 하나님의 은총을 입은 사람답게 살지 않았습니다. 나봇의 포도원 사건을 통해 그는 인간의 탐욕이 얼마나 끝이 없는 지를 보여주었습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에서처럼 자신에 대해 바른 말을 하는 것을 거부하는, 즉 하나님의 말씀을 더 이상 들으려 하지 않는 그야말로 오만한 인간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아합의 이 같은 모습은 본문의 아합 한 사람으로 국한 된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역사 속에서, 인류의 역사 속에서 그리고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의 삶속에도 그대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에게 등 돌리는 인간들에게 왜 이처럼 먼저 다가오셔서 은총을 베풀어 주시는 것일까요?
이러한 질문은 창세기에서부터 시작됩니다. 도자기를 만들면서, 자신의 생각대로 되지 않으면 흙을 뭉개고 다시 빚습니다. 그리고 설사 잘 만들었다 할지라도, 가마에서 구워지면서 모양이 변형되거나 마음에 들지 않으면 깨버립니다. 전지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자신과의 약속을 어긴 아담과 하와를 없애버리고, 흙으로 다시 인간을 창조하시는 것이야말로 전혀 어려운 일이 아닐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에덴동산에서 당신의 말씀을 저버린 아담과 하와를 내치지 않으시고, 오히려 그들로부터 파생된 죄악으로부터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해 결국에는 독생자 예수님을 십자가 대속의 재물로 삼으셨습니다. 이유는 단 한 가지,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둘째가 첫 돌이 채 안되었을 때, 컵을 들고 넘어져서 유리조각에 손바닥이 찢어졌던 적이 있습니다. 황급히 응급실로 달려갔느데, 의사가 유리 파편은 X-Ray로도 잘 나타나지 않으니, 찢어진 부위를 핀셋으로 일일이 들어서 육안으로 확인해야 한다고 하면서, 아이들 붙잡고 손바닥의 찢어진 부위를 들쳐보는데, 갑자기 제 손바닥이 찌릿찌릿 아리는 아픔이 왔습니다. 그때 저는 “아! 이것이 바로 자식을 향한 부모의 사랑이구나”라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항상 사람들에게 먼저 손을 내미십니다. 우상숭배가 만연한 이스라엘, 그리고 이방인 여인과 결혼한 아합 왕에게 하나님께서 먼저 손을 내미신 것은 그들로 하여금 여호와 하나님과의 관계성을 회복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인간은 단순히 진흙으로만 창조된 존재가 아닙니다. 바로 여호와 하나님께서 흙을 당신들의 형상대로 빚으시고, 그것에 생령을 불어넣어주셨기에 인간이 된 것입니다. 이 말은 인간은 하나님의 영이 함께 하지 않는 한, 인간이 아니라는 의미입니다. 즉 인간을 인간답게 살게 하기 위해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먼저 다가오셔서 은총을 베풀어주십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하나님의 은총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으로부터 등을 돌리곤 합니다.
어제 “광해, 왕이 된 남자“라는 영화를 보았습니다. 왕위를 둘러싼 권력다툼과 당쟁으로 혼란이 극에 달하자, 왕 광해는 위험으로부터 자신을 대신할 대역을 찾게 되고, 마침내 저잣거리에서 걸쭉한 만담가로 살아가고 있는 하선이라는 천민을 발탁합니다. 어느 날 왕 광해가 의식을 잃게 되자 의식이 회복할 때까지 하선이 왕 노릇을 하게 되면서 일어나는 사건들을 이 영화는 감동적으로 풀어나갔습니다. 광해의 호위 무사 도부장은 하선이 가짜 왕임을 알고 죽이려 하지만, 중전의 증언으로 자신이 잘못 판단했다는 사실에 칼로 자결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그의 시도는 성사되지 못하고, 이후 가짜 광해가 자신을 불러 ”너의 죽음은 너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왕의 목숨과도 직결되니, 너는 함부로 죽어서는 안 된다“는 이야기에 충성을 맹세합니다. 그리고 그는 나중에 하선이 가짜 왕 노릇을 했다는 사실을 알고도 하선을 죽이려고 급파된 무사들과 결전을 벌이고 결국 최후를 맞이하게 됩니다. 이런 말이 있습니다.
“사람은 구하면 앙분을 하고 짐승은 구하면 은혜를 한다”
사람은 죽을 고비에서 구해 주면 그 은혜를 쉽게 잊고 도리어 은인에게 앙갚음을 하지만, 짐승은 죽을 고비에서 구하여 주면 은인을 따른다는 뜻으로, 은혜를 쉽게 잊어버리는 사람을 짐승만도 못하다고 비난하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은총을 입었건만, 짐승만도 못한 사람으로 살아가는 사람이라고 비난받아서야 되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저버리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그냥 내버려 두지 않으십니다. 이스라엘 선지자들이 아합 왕에게 전쟁에서 승리하게 될 것이라고 한 것은 하나님께서 아합을 길르앗 라못에서 죽게 하려고 선지자들에게 거짓말 하는 영을 보내셨기 때문이라고 선지자 미가야는 증언하고 있습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진정으로 아합을 죽이려 하셨다면, 아합에게 미가야 선지자들 보내지 않으셨어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마지막까지 미가야 선지자를 통해 아합에게 기회를 주셨습니다. 그러나 결국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진 아합의 귀에는 결국 하나님의 말은 거짓으로 들렸습니다. 오늘 날 얼마나 많은 거짓이 난무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이제 얼마 남지 않은 대선 기간 동안이 이 사회에는 서로 상대방을 음해하는 온갖 루머와 거짓이 넘칠 것입니다. 정치권에서만 이런 것이 아니라 종교계에도 똑같은 현상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교단 내의 분란, 교회내의 분란, 교단끼리의 분란 속에서 서로 자신의 옳다고 주장합니다. 누가 옳고 누가 잘못인지를 어떻게 구별할 수 있겠습니다. 솔로몬의 간구처럼 하나님께서 주시는 지혜가 아니라면 참과 거짓을 구별하기 어렵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입었건만 하나님으로부터 돌아서서 자신의 욕망 속에 빠져버린 아합처럼 살아가는 사람에게는 참은 거짓이요, 거짓이 참이라고 믿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소명의 자리에서 바로 서있는 선지자 미가야처럼 살아간다면, 어떠한 상황 속에서도 거짓과 참을 구별할 수 있게 됩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주님께로 향하는 우리의 시선을 가로막는 세상적인 것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하나님의 시선보다는 세상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할 때가 더 많이 있습니다. 거짓과 불의가 난무하는 사회를 살아가면서 무엇이 참이고 거짓인지 판단하기 어려울 때가 많이 있습니다. 주님, 독생자 예수님의 대속의 보혈로 구원받은 주님의 자녀답게 살아갈 수 있도록 도와주시옵소서. 나 한 사람을 향하신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이 얼마나 크고 넓은지를 한시라도 잊지 않도록 도와주시옵소서. 주님의 사랑에 힘입어 지금의 내가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 앞에서 늘 감사하며 살아갈 수 있도록 도와주시옵소서. 우리를 지금의 자리에 세워주신 주님의 우리를 향하신 소명이 무엇인지를 바로 인지하고, 소명의 자리로 불러주신 주님의 은총에 감사드리며, 맡은 바 최선을 다하는 사람다운 사람으로 살게 도와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작성자 이창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