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창세기 32장 1-32절
찬송가 312장 ‘너 하나님께 이끌리어’

오늘 본문은 야곱의 얍복강 씨름 사건으로 잘 알려진 장입니다. 야곱이라는 인물은 태중에서부터 형 에서와 다투고, 출생할 때도 형에게 지지 않으려는 듯 형의 발꿈치를 붙들고 태어났고, 성장해서는 형의 장자권을 팥죽 한 그릇으로 쟁취했고, 장자의 축복을 받기위해 거짓 분장을 하여 아버지를 속인 그야말로 자신의 유익을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탐욕적인 사람입니다. 하나님에게 속한 사람이라기보다는 오히려 하나님의 대적자라고 평가할 만한 인격의 소유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야곱을 먼저 찾아와주시는 하나님의 모습에 의아하기만 합니다. 아버지를 속이고 장자의 축복을 받은 후에 형 에서의 보복을 피해서 외조부가 거주하는 하란으로 도피하던 중 벧엘에서 잠 잘 때, 하나님께서는 야곱에게 다시 돌아올 것과 은혜를 베풀어 주실 것을 먼저 약속해주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라반이 야곱을 해하려고 하자 하나님은 야곱에게 조상의 땅으로 돌아가라고 말씀하셨고, 야간도주한 야곱의 뒤를 쫓는 라반에게 나타나셔서 야곱을 해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형 에서와의 만남을 앞두고 극심한 두려움에 휩싸인 야곱은 마하나임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던 하나님의 사자들과 만났고, 이 만남을 통해 포기하고 싶었던 귀향길을 계속 갈 수 있게 됩니다.

“야곱이 길을 가는데 하나님의 사자들이 그를 만난지라 야곱이 그들을 볼 때에 이르기를 이는 하나님의 군대라 하고 그 땅 이름을 마하나임이라 하였더라” (1-2절)

야곱을 향하신 하나님의 이러한 모습에서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인간적인 욕망이 가득한 야곱, 그가 바로 다름 아닌 우리 자신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착하거나 선하게 살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찾아오신 것이 아니라, 어쩌면 야곱보다도 더 세상적인 욕망과 야욕에 눈이 멀어서 하나님을 부인하다 못해 대적하고 있던 패역한 우리를 하나님께서 먼저 찾아오셔서 구원의 손길을 내미셨습니다. 야곱은 기약 없이 고향을 등지고 떠나 벧엘에서 돌로 베개를 삼아 자고 있는 처량한 자신을 찾아오신 하나님의 은혜의 손길을 잡았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소위 만사형통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라반의 집에서 과거 자신이 행했던 대로 되갚음을 겪었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하나님의 손길을 놓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해서 믿지 않는 일반인들과 달리 역경과 시련이 없는 것은 아니라 똑같이 고통스러운 삶의 질곡에 처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는 신앙인은 그 고통의 순간에도 자신을 향하신 하나님의 은혜의 손길을 믿기에 미래에 대한 소망을 품고 역경을 극복할 수 있습니다.

마하나임에서 하나님의 사자를 만나서 귀향의 길을 포기하지 않았지만, 에서와의 만남을 앞두고 야곱은 여전히 두려움에 휩싸여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이 두려움을 어떻게 극복해야 할까요?

하나님께 기도만 하면 될까요? 올해 장년교구는 여름수련회 2박3일간 느헤미야를 공부했습니다. 동생으로부터 예루살렘의 처참한 현황을 들은 느헤미야가 첫 번째로 행한 행동은 기도였습니다. 기도를 하되 마치 감이 떨어지기를 기다리며 감나무 아래에서 멍하니 입을 벌리고 있지 않고, 그는 4개월간 예루살렘 성벽을 증수하는 데 필요한 제반사항과 어떻게 증수할 것인가를 치밀하게 계획하면서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기도에 대한 응답은 이처럼 준비가 되었을 때 받게 됩니다. 만약 느헤미야가 4개월간 아무런 계획도 세우지 않고 그저 주문처럼 하나님께 자신의 기도를 들어달라고만 기도했다면 4개월이 된 시점에 왕이 예루살렘 성벽을 증수하는데 필요한 것들을 물었을 때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야곱도 느헤미야처럼 단순히 기도만 하는 것이 아니라 위기의 순간을 어떻게 극복해야 할지에 대해 현명하게 대처하고 있습니다. 혹자는 오늘 본문에 나오는 야곱의 행동들을 세상적인 방법을 동원해서 위기를 모면하려 한다고 해석하기도 하지만, 저는 본문에서 취하는 야곱의 행동이야 말로 참으로 현명했다고 평가합니다. 고향으로 향하는 야곱은 무엇보다도 에서의 자신을 향한 마음이 어떤지를 알아보기 위해 사자들을 보냈습니다. 에서를 만나고 온 사자들이 에서가 사백 명을 거느리고 야곱을 향해 온다고 하자, 에서가 자신에 대한 미움과 적개심이 가득하다는 사실을 알게 된 그는 바로 무리를 두 떼로 나누어 혹여 에서가 한 떼를 칠지라도 나머지 한 떼는 살아남을 수 있도록 조치를 취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기도하면서 자신을 향하신 하나님의 언약을 다시 한 번 상기합니다.

“야곱이 또 이르되 내 조부 아브라함의 하나님, 내 아버지 이삭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께서 전에 내게 명하시기를 네 고향, 네 족속에게로 돌아가라 내가 네게 은혜를 베풀리라 하셨나이다 / 나는 주께서 주의 종에게 베푸신 모든 은총과 모든 진실하심을 조금도 감당할 수 없사오나 내가 내 지팡이만 가지고 이 요단을 건넜더니 지금은 두 떼나 이루었나이다 / 내가 주께 간구하오니 내 형의 손에서, 에서의 손에서 나를 건져내시옵소서 내가 그를 두려워함은 그가 와서 나와 내 처자들을 칠까 겁이 나기 때문이니이다 / 주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반드시 네게 은혜를 베풀어 네 씨로 바다의 셀 수 없는 모래와 같이 많게 하리라 하셨나이다” (9-12절)

기도한 후 그는 또 다른 대비책을 세웁니다. 즉 자신을 향해 미움이 가득한 에서의 마음을 누그러뜨리기 위해 선별된 염소와 양과 낙타와 소와 나귀를 예물로 택하되 세 떼로 나누어 자신에 앞서 한 떼씩 가서 에서를 만나서 예물을 바치게 합니다.

“그것을 각각 떼로 나누어 종들의 손에 맡기고 그의 종에게 이르되 나보다 앞서 건너가서 각 떼로 거리를 두게 하라 하고 /그가 또 앞선 자에게 명령하여 이르되 내 형 에서가 너를 만나 묻기를 네가 누구의 사람이며 어디로 가느냐 네 앞의 것은 누구의 것이냐 하거든 대답하기를 주의 종 야곱의 것이요 자기 주 에서에게로 보내는 예물이오며 야곱도 우리 뒤에 있나이다 하라 하고 그 둘째와 셋째와 각 떼를 따라가는 자에게 명령하여 이르되 너희도 에서를 만나거든 곧 이같이 그에게 말하고 / 또 너희는 말하기를 주의 종 야곱이 우리 뒤에 있다 하라 하니 이는 야곱이 말하기를 내가 내 앞에 보내는 예물로 형의 감정을 푼 후에 대면하면 형이 혹시 나를 받아 주리라 함이었더라“ (16-20절)

에서에게 화해와 용서를 바라는 예물을 보낸 후에 그는 밤에 가족들과 소유들을 얍복강을 건너가게 하고, 하나님께 결사적으로 철야기도를 했습니다. 당시의 상황을 본문은 다음과 같이 증거하고 있습니다.

“야곱은 홀로 남았더니 어떤 사람이 날이 새도록 야곱과 씨름하다가 / 자기가 야곱을 이기지 못함을 보고 그가 야곱의 허벅지 관절을 치매 야곱의 허벅지 관절이 그 사람과 씨름할 때에 어긋났더라” (24-25절)

24절에서 “씨름하다”로 해석된 원어 “아바크(abak)" 동사는 본문에서 '니팔 와우 연속 미완료형'으로 사용되어서 야곱이 어떤 사람에게 잡혀 땅에 먼지가 일어날 정도로 격렬하게 씨름을 계속하고 있음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즉 가족과 무리를 다 먼저 보내고 홀로 남은 야곱, 하나님께서 사자들을 보내주셨고 나름대로 에서와의 만남에 대비하고 있지만, 아직도 이 문제들을 하나님께 온전히 의탁하지 못하고, 자신을 향한 증오로 돌진해오고 있는 에서에 대한 두려움과 불안감에 사로 잡혀 있는 그에게 하나님께서 먼저 찾아오셨습니다. 야곱은 자신을 찾아오신 하나님께 울며 간구합니다. 그런데 야곱의 기도에 대해서 하나님은 뜻밖에도 야곱의 허벅지 관절을 탈구시켜 이후 야곱은 절뚝거리며 걸어야 했습니다. 하나님이 이처럼 야곱의 허벅지 관절을 탈구시키셨다는 것은 세상적인 욕망에 휩싸야 살아왔던 야곱의 인생관을 완전히 꺾어버렸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자신의 잘못된 인생관이 무너져 버린 그는 이제 오로지 자신이 의탁해야 할 분이 바로 하나님 한 분임을 깨닫고 떠나려는 하나님을 붙잡았습니다.

“그가 이르되 날이 새려하니 나로 가게 하라 야곱이 이르되 당신이 내게 축복하지 아니하면 가게 하지 아니하겠나이다” (26절)

지금까지 세상적인 욕망의 끈을 완전히 놓지 못하고 잡고 있던 그 손으로 이제 하나님을 붙들고 매달려 간구합니다. 이런 그에게 하나님께서는 “네 이름이 무엇이냐”라고 물어보셨고, 그 물음에 야곱은 “야곱입니다”라고 대답합니다. 야곱은 “발꿈치를 잡은 자”라는 뜻 외에도 “속이는 자”, “찬탈자”라는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즉 하나님은 야곱에게 “너의 실상은 무엇이냐?” 물어보였고 이에 야곱은 자신의 실상이 “남을 속여서 남의 자리에 대신 앉은 죄인”이라고 자백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 다가갈 수 있는 유일한 길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실상이 무엇인지를 깨닫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깨달음과 고백이 없이는 절대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습니다. 연일 계속되는 폭염이 이처럼 쉽게 물러갈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찜통 안에 있는 것처럼 더웠던 날씨가 단 며칠 만에 선선하다 못해 싸늘하게 변한 자연현상 앞에서 인간의 미비함을 다시 한 번 절감하지 않았습니까!

야곱이 자신의 실상의 고백하자 하나님께서는 야곱을 이스라엘로 개명시켜주셨습니다.

“그가 이르되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를 것이 아니요 이스라엘이라 부를 것이니 이는 네가 하나님과 및 사람들과 겨루어 이겼음이니라” (28절)

이스라엘은 28절의 해석에 의해 "하나님과 및 사람들과 겨루어 이긴 자"라고 이해되어 왔지만, 히브리어를 헬라어로 번역한 70인역본은 이 구절을 '네가 하나님을 더불어 능력을 얻었으며, 그리고 네가 사람들 중에서('~와 함께'라는 뜻도 있지만) 강할 것임이니라'고 번역했습니다. 실제로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뜻하는 “엘”과 “능력을 가지다 (또는 싸우다)”을 의미하는 “사라”로 구성된 단어로 그 의미대로 해석하자면, '하나님과 더불어 힘을 얻어 강하게 된 자'를 뜻합니다.

이후 야곱의 태도는 돌변합니다. 내일 자세히 살펴보겠지만, 에서를 만난 야곱은 더 이상 두려움에 떨지 않았습니다. 식솔들을 뒤로 하고 탈구된 허벅지 관절로 절뚝거리며 앞으로 나가서 몸을 굽혀 일곱 번 절하며 에서에게 다가갔고, 헤어질 때만해도 정상적이었던 동생 야곱이 한 쪽 다리를 절뚝거리며 오면서 진심으로 자신에게 절하며 사죄하는 모습을 지켜본 에서는 달려가서 야곱을 맞아서 안고 입을 맞추고 울면서 평생 원수지간이었던 형제가 화해하게 됩니다.

야곱을 이스라엘로 개명해주신 그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해 다음과 같이 선포하셨습니다.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 / 너희가 전에는 백성이 아니더니 이제는 하나님의 백성이요 전에는 긍휼을 얻지 못하였더니 이제는 긍휼을 얻은 자니라” (벧전 2:9-10절)

이 말씀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나를 향하신 이 말씀을 믿는다면 하나님께서 택한 족속, 왕 같은 제사장, 거룩한 나라,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기도
하나님 감사합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 우리의 과거의 실상이 야곱이었음을 잊지 않도록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야곱보다도 더 세상적인 욕망과 탐욕에 젖어 살고 있던 우리에게 먼저 찾아오셔서 구원의 손길을 내밀어 주신 하나님, 감사합니다. 또한 그 구원의 손길 앞에서 우리 스스로가 야곱이었음을 고백하게 해주신 하나님, 감사합니다. 고백과 함께 하나님의 구원의 손길을 꽉 잡을 수 있도록 용기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스라엘로 살았던 야곱같이 우리 역시 하나님께서 택한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이며 거룩한 나라 그리고 하나님에게 속한 백성답게 살아갈 수 있도록 용기와 능력을 더하여 주시옵소서. 또한 언제나 기도를 통해 하나님과 대화하되, 기도하면서 하나님께서 주신 지혜로 계획하는 우리가 될 수 있도록 도와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묵상을 돕는 질문
1. 귀향길에 오른 야곱 앞에 하나님의 사자들이 나타나신 이유는?
2. 바른 기도란 어떤 기도를 의미할까요?
3. 하나님께서 야곱의 허벅지 관절을 치셨다는 의미는?
4. 하나님과의 회복은 언제 이루어 지나요?
5. 이스라엘의 의미와 현재 우리의 본질은 무엇인가요?

(작성: 이창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