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14장 15-24절
찬송가 310장(아 하나님의 은혜로)

예수님의 가르침은 탁월했습니다. 비유로 가르치실 때는 항상 주변의 사물이나 시대 문화나 풍습에 맞는 소재를 선택하시므로 듣는 사람들이 쉽게 이해하도록 하셨습니다. 누가복음 14장을 보면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한 바리새인 지도자의 집에 초대받아 식사하러 가셨습니다. 이 때에 수종병 든 한 사람을 고치셨습니다. 수종병은 체내에 조직액이나 임파액이 과다 분비되어 몸이 붓는 병입니다. 이 날은 안식일이었는데 그 당시 유대인들에게는 병든 자라도 안식일에는 치료 받을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를 불쌍히 여기시고 고쳐주셨습니다. 이때에 율법사들과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에게 비난성 질문을 던졌습니다. “안식일에 병고쳐 주는 것이 합당하냐” 그러자 예수님의 대답은 사람들의 정곡을 찔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가르칠 때뿐만 아니라 난처한 질문을 받았을 때에도 사물이나 시대 문화나 생활 양식을 적용하셨습니다. ‘안식일에 병고쳐 주는 것이 합당하냐’라는 질문에 ‘예’ 또는 ‘아니오’의 대답을 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단언적이면서 교훈적인 반문을 던지셨습니다. “너희 중에 누가 그 아들이나 소가 우물에 빠졌으면 안식일에라도 곧 끌어내지 않겠느냐” 예수님의 이 질문에 대하여 아무도 ‘아니오’라고 말할 사람은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이러한 반문을 통해서 가르치고자 했던 점은 안식일이더라도 사람의 생명을 구하고 병을 고치는 선한 일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우물, 소 등을 소재로 한 생활양식을 적용한 가르침 이후에 예수님께서는 또 한번의 비유로 하나님 나라와 심판에 대하여 말씀하셨습니다. 이 비유는 교만한 유대인들에 대한 경고와 구원은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임을 보여주는 내용입니다.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비유는 ‘큰 잔치’입니다. 왜 예수님께서 잔치 비유를 하셨겠습니까? 그 이유는 바리새인들의 질문에 ‘안식일에도 선한 일을 할 수 있다’는 교훈을 생활 양식에 적용하신 것처럼
당시 유대인들이 하나님 나라에 합당하지 않다는 것을 잔치 풍습에 적용하고자 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리새인 지도자의 초대로 어느 정도 규모가 있는 만찬에 참여했다고 보아야 합니다. 14장 7절에 ‘청함을 받은 사람들이 높은 자리 택함을 보시고’라고 되어있습니다. 청함을 받은 사람들이 높은 자리를 택할 정도로 초대받은 사람들이 사회적 지위가 있었다고 볼 수 있으며 또한 규모도 어느 정도 되었음을 추측 할 수 있습니다. 유대인들의 이 당시 풍습으로는 만찬의 식탁의 모양은 우리글 ‘디귿’자 형태였는데 가장 높은 사람이 중앙에 앉았으며 가장자리로 갈수록 낮은 서열의 사람이 앉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잔치보다는 규모가 작은 식사자리에서 높은 자리를 다투는 모습을 보시고 그 즉시 비유로 혼인잔치에 청함을 받을 때 미리 상석에 앉지 말 것을 가르쳤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비유를 통하여 항상 자신의 지위에 걸 맞는 대접을 요구하지 말고 겸손하라고 가르치십니다. 그런 후 식사를 하시다가 함께 먹는 사람 중의 한 명으로부터 ‘하나님의 나라’에서 식사하는 자가 복된 자라고 하는 말을 듣습니다. 이 때 예수님께서 또 다른 비유를 말씀하셨는데 그것이 오늘 본문에 나오는 ‘큰 잔치’ 비유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는 잔치에 준하는 식사자리에 큰 잔치 비유를 말씀하시면서 듣는 사람들에게 큰 공감을 갖도록 하셨습니다. 현장에 맞는 비유를 통하여 탁월한 주님의 가르침을 보게 됩니다.

당시 관습으로는 오늘날과 비슷하게도, 잔치를 하게 되면 먼저 초대할 사람을 일차적으로 결정하고 그런 후 사람을 보내어 초청에 응할지 여부를 파악하게 됩니다. 그래야지만 잔치에서 준비할 식사량을 예상하게 됩니다. 오늘날도 큰 행사로 이루어지는 만찬은 초대권이 배부되며 초청에 응한 사람의 수를 파악하는 것이 기본 원칙입니다. 이 당시 유대인의 관습은 일차적으로 초청장 배부와 초청에 응한 사람의 수를 파악을 한 후에 잔치 준비가 완료되면 다시 한번 사람을 보내어 잔치를 알립니다. 일차 초청을 수락한 후 이차 초청에 불응하는 것은 당시 관습으로 상당한 결례에 해당됩니다. 이는 아주 심각한 사태를 초래합니다. 이차 초청 불응은 곧 상대에 대한 선전포고로 간주되기도 합니다. 본문의 비유와 유사한 마태복음 22장에는 나오는 비유를 보면 임금이 초청에 불응한 사람들에게 군대를 보내는 내용이 나옵니다. 이처럼 일차 초청에 응한 사람이 이차 초청에 불응하는 것은 심각한 사태를 초래할 수 있는 큰 결례임을 알 수 있습니다.

본문의 비유에서 초청에 불응한 사람이 3명이 등장합니다. 첫 번째는 밭을 산 사람이고 두 번째는 소 다섯 겨리 즉, 소 열 마리를 산 사람이고 마지막 세 번째는 장가를 간 사람입니다. 문제는 이들이 이차 초청에 불응한 이유가 불가피할 정도의 중요한 이유가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밭을 구입하여 밭에 나가는 것, 소 다섯 겨리를 구입하여 시험하는 것, 장가가서 신혼초인 것이 당시 관습상으로 잔치 초대자가 이해할만한 사유가 되지 않습니다. 이들의 불응으로 주인은 분노했습니다. 그래서 종을 시켜 시내의 거리와 골목, 길과 산울타리 가로 나가서 아무 사람이나 데리고 오라고 했습니다.

이 비유는 하나님의 나라에 선택받은 사람들이 들어오지 못하고 다른 사람들이 들어간다는 내용입니다. 선택받은 사람들이란 선민이라고 생각하는 교만한 유대인들이며 다른 사람들이란 이방인을 뜻합니다. 오늘날로 보면 자신감과 교만에 찬 교인들이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큰 잔치의 주인은 하나님이며 특히 본문에 등장하는 종은 단수로 표현되었는데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킵니다. 초청에 불응한 사람은 하나님의 은혜로운 초대를 거부함으로 비극을 맞이하게 됨을 보여줍니다.
오늘날 시대에 적용해 보면 밭을 산 사람은 땅을 구입한 사람이나 생업을 위한 사업장을 개업한 사람 정도로 볼 수 있으며, 소를 구입한 사람은 생업과 사업에 필요한 차나 기기와 같은 재화를 획득한 사람 정도로 볼 수 있습니다. 이들은 하나님 나라보다는 현재 자신의 재물과 쾌락이 더 우선에 둔 사람들입니다. 오늘날 교인들도 새집, 새차, 부동산 구입 또는 결혼 등과 같은 집안 행사가 교회보다 우선이라면 하나님의 은혜를 거부하는 사람과 무슨 큰 차이가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면서도 계속적인 은혜를 거부한다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큰 결례입니다. 이는 심각한 사태를 초래하는 죄가 됩니다.

우리의 자리가 영원불변 예약되었다고 과연 장담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은혜를 거부하는 자는 하나님을 거역하는 자가 됩니다. 하나님을 거부하는 자가 어찌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하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고 그 은혜에 감사하는 자를 원하십니다. 중요한 점은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받기를 원하십니다. 그 구원의 성취는 하나님의 은혜를 아는 자만이 누릴 수 있습니다. 본문의 비유에도 나오듯이 주인은 모든 사람을 데리고 오라고 했습니다. 21절에 나오는 시내의 거리와 골목은 성안에 있는 사람을 가리키며, 23절에 나오는 길과 산울타리 가는 성 밖에 있는 사람을 가리킵니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성 안과 밖에 있는 모든 사람이 구원의 대상이라는 것이고 하나님의 나라의 잔치에는 이방인을 포함한 만백성이 초청된다는 의미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이 은혜에 응하는 사람만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밭, 소, 결혼과 같은 재산과 쾌락이 하나님 나라의 잔치에 가지 못하게 함과 가난한 자, 몸 불편한 자, 맹인들, 저는 자들이 하나님 나라의 잔치에 들어감을 통해 우리는 가난함과 질병이 부와 쾌락보다 하나님 나라 잔치에 걸림돌이 더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잊지 마시고 날마다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하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고 부응하는 자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 아버지 저희들을 하나님 나라 잔치에 초청해 주심을 감사드립니다. 이차 초청에 불응하는 자가 되지 않게 하옵시고 날마다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하며 깨달으며 감사하는 자가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