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요엘 2:1-17
찬송가 525장 ‘돌아와 돌아와’



메뚜기 떼의 침입(1-11절)
이스라엘 자손들이 출애굽할 때에 애굽에 10가지 재앙이 있었습니다. 그 중에서 8번째가 ‘메뚜기 재앙’이었습니다. 요엘 선지자는 여러 종류의 메뚜기 떼가 엄청나게 몰려오는 자연재해를 통해서, 그렇게 이방인의 군대가 몰려올 것을 말하며, 그 날이 여호와의 날임을 강조합니다. 특히 본문 1-11절이 메뚜기 떼의 침입에 대해서 증거합니다. 오늘 본문은 이렇게 시작됩니다.
시온에서 나팔을 불며

이스라엘을 비롯한 고대 중동에서는 중대한 일을 앞두고서 나팔을 불어서 경각심을 일깨웠습니다.
이스라엘 종교력으로 7월 10일은 ‘대속죄일’이었습니다. 그런 종교적인 집회로 모일 때와 성전과 관련하여 중대한 행사를 할 때 나팔을 불었습니다. 또 새로운 왕이 등극할 때에 백성들에게 알리는 축하의 나팔을 불었습니다. 그리고 이방 군대가 쳐들어올 때와 같이 위급한 일이 일어날 때 성내에 사는 사람들에게 경고하여 준비할 수 있도록 나팔을 길게 불었습니다.

(1) 시온에서 나팔을 불며 나의 거룩한 산에서 경고의 소리를 질러 이 땅 주민들로 다 떨게 할지니 이는 여호와의 날이 이르게 됨이니라 이제 임박하였으니

나팔을 분 이유는 ‘여호와의 날’이 임했음을 알리는 경고였습니다. 그런데 그 나팔을 ‘예루살렘에서 나팔을 불며’라고 말씀하지 아니하시고, ‘시온에서 나팔을 불며’라고 말씀하시는 것은 거기에 성전이 있음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성전이 있는 곳에 사는 예루살렘 사람들이 하나님을 섬기는 삶과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살지 않기 때문에, ‘여호와의 날’이 있음을 각성시켜 주는 것입니다. ‘여호와의 날’이 하나님을 섬기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사람들에게는 상급의 날, 구원의 날이지만, ‘여호와의 날’이 우상을 섬기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심판의 날, 절망의 날이 되기 때문입니다.

여호와의 날이 어떻게 임할지에 대해서 이렇게 증거합니다.
(2-3) 곧 어둡고 캄캄한 날이요 짙은 구름이 덮인 날이라 새벽빛이 산꼭대기에 덮인 것과 같으니 이는 많고 강한 백성이 이르렀음이라 이와 같은 것이 옛날에도 없었고 이후에도 대대에 없으리로다 불이 그들의 앞을 사르며 불꽃이 그들의 뒤를 태우니 그들의 예전의 땅은 에덴동산 같았으나 그들의 나중의 땅은 황폐한 들 같으니 그것을 피한 자가 없도다

훤한 대낮임에도 불구하고, 짙은 먹구름이 몰려와 태양을 가리면 갑자기 날씨가 어두워질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본문은 먹구름이 몰려와서 캄캄해진 것이 아니라 메뚜기 떼가 몰려와 태양을 가려서 그렇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늘이 어두워질 정도로 많은 메뚜기 떼가 몰려왔다가 지나가고 나면, 몰려오기 전에는 ‘에덴동산’ 같았던 땅이 몰려가고 나면 ‘황폐한 들’과 같이 된다고 말씀하십니다. ‘에덴동산’이 ‘없는 것이 없는 곳’이라고 한다면, ‘황폐한 들’은 ‘있어야 할 것이 없는 곳’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인생에도 이와 같은 일을 겪을 때가 있습니다. 메뚜기 떼가 몰려오는 날이 ‘어둡고 캄캄한 날’이 되는 것처럼, 우리의 인생에도 메뚜기 떼가 몰려오고 나면, ‘하늘이 캄캄해질 때’가 있습니다. 무엇을 해야 하는지도 알 수 없고, 할 수 있는 것도 아무것도 없는 것 같이 여겨지며, 인생이 완전히 초토화된 것 같이 여겨지곤 합니다.

계속해서 메뚜기 떼의 모습을 이렇게 묘사합니다.
(4-5) 그의 모양은 말 같고 그 달리는 것은 기병 같으며 그들이 산꼭대기에서 뛰는 소리는 병거 소리와도 같고 불꽃이 검불을 사르는 소리와도 같으며 강한 군사가 줄을 벌이고 싸우는 것 같으니

몰려오는 메뚜기 떼가 얼마나 공포스러운지, 마치 그 모습이 말과 기병, 병거와 같다고 증언합니다. 이것은 역으로 나중에 유다를 침략해 올 바빌로니아제국의 군대의 모습이 메뚜기 떼의 모습과 흡사할 것임에 대해서 예언하는 것입니다.
특히 당시에 병거(탱크)를 갖추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유다는 거의 병거를 보유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니 바빌로니아제국의 병거가 몰려올 때의 공포심을 주체하기가 어려웠을 것입니다. 그것은 마치 우리 군은 소총이 전부인데, 적군의 전차(탱크)가 끝도 없이 들어오는 것과 같습니다. 그 때는 얼굴이 하얗게 질릴 것입니다.

(7-9) 그들이 용사 같이 달리며 무사 같이 성을 기어오르며 각기 자기의 길로 나아가되 그 줄을 이탈하지 아니하며 피차에 부딪치지 아니하고 각기 자기의 길로 나아가며 무기를 돌파하고 나아가나 상하지 아니하며 성중에 뛰어 들어가며 성 위에 달리며 집에 기어 오르며 도둑 같이 창으로 들어가니

바닷속의 정어리나 청어, 고등어, 멸치 등은 군영(群泳, schooling), 무리를 지어 다닙니다. 그 수효가 수만 마리에서 수십만 마리나 됩니다. 그런데 신기한 것은 그렇게 무리를 지어 다녀도 서로 부딪히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또 공중에서 떼를 지어 날아다니는 박쥐 떼도 그러합니다. 심지어 어둠이 가득하여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동굴 속에서도 수천 마리의 박쥐들은 서로 부딪히지 않고 날아다닙니다. 곤충들도 그러하다고 합니다.
메뚜기와 같이 작은 곤충이 한 도시에 몰려오면 들어가지 못할 곳이 없습니다. 성벽이 아무리 높아도 날아서 넘어갈 수 있습니다. 또 많은 무기가 있어도 소용이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작은 틈만 있으면 집 안으로 들어가는 것도 문제 없습니다.
유다 백성들이 돌이키지 않으면, 장차 가공할만한 위력을 가진 바빌로니아제국의 군대가 유다를 쳐들어올 때에 성벽도 단숨에 점령하고, 무기고도 단숨에 무력화시키고, 집집마다 들어가서 살육을 자행하게 될 것이라고 경고하는 것입니다.

(10-11) 그 앞에서 땅이 진동하며 하늘이 떨며 해와 달이 캄캄하며 별들이 빛을 거두도다 여호와께서 그의 군대 앞에서 소리를 지르시고 그의 진영은 심히 크고 그의 명령을 행하는 자는 강하니 여호와의 날이 크고 심히 두렵도다 당할 자가 누구이랴

지축이 흔들리고, 하늘이 떨고, 해와 달이 캄캄해지고, 별들이 빛을 잃는다는 것은 모두 천재지변을 뜻하는 말입니다. 이것은 메뚜기 떼 재앙으로 표현되는 바빌로니아제국의 군대가 몰려오는 것이 마치 천재지변이 일어나는 것처럼 여겨지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또한 고대 세계에서 해와 달과 별들은 모두 숭배의 대상이었습니다. 유다 백성들은 하나님을 섬기는 백성인데, 그들도 해와 달과 별들을 우상숭배했습니다. 그것이 얼마나 허망한 것인지를 보여주는 것이기도 합니다.
이 말씀에서 천지가 진동하는 것보다 더 두렵고 충격적인 것은 유다를 침략해 오는 이방 군대의 지휘관이 여호와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애굽이나 바빌로니아제국을 치시는 것이 아니라, 자기 백성을 치기 위하여 앞장서서 지휘하신다고 하십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을 섬기는 백성으로 살지 않기 때문에 징계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날이 ‘여호와의 날’입니다.


회개의 촉구(12-17절)
세 장으로 구성된 요엘을 두 부분으로 나누면, 후반부는 2:18-3:21인데, 여호와의 날에 있을 구원과 복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그리고 전반부인 1:1-2:17은 여호와의 날에 있을 심판과 징계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그래서 본문 12-17절은 전반부의 결론인데, 진정으로 회개하고, 금식 성회를 열어서 하나님께 긍휼을 호소하라고 말씀합니다.
(12) 여호와의 말씀에 너희는 이제라도 금식하고 울며 애통하고 마음을 다하여 내게로 돌아오라 하셨나니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들에게 하나님께로 돌아오라고 말씀하십니다. 어떤 자세로 돌아가야 하는지를 4가지로 말씀합니다.
첫째는 ‘마음을 다하여’입니다. 우리말 성경에는 마음을 다하여가 뒤에 있지만, 히브리어성경은 가장 먼저 나옵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마음은 ‘전 인격’을 뜻하는 말입니다.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것의 출발점은 마음입니다. 마음이 먼저 가지 않은 행동은 외식이 되기 쉽고, 이내 돌아가지 않은 상태로 되돌아가기도 쉽습니다.
둘째는 ‘금식하고’입니다. 금식은 자신의 힘과 능력, 자기만의 방법으로 살려고 했던 것에 대한 참회입니다. 더 이상 자신이나 눈에 보이는 세속적 가치관을 따르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의뢰하겠다는 결단의 삶을 사는 것이 금식입니다.
셋째는 ‘울며’입니다. 이 단어는 ‘큰소리를 내며, 눈물을 펑펑 쏟아내는 행위’를 뜻합니다. 요셉이 22년 만에 형들을 다시 만났을 때, 자신의 감정을 억누르고 억누르다,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터트린 방성대곡과 같은 단어입니다. 그래서 ‘울며’는 자기 자신에 대한 절망입니다. 물론 하나님에 대해서는 소망입니다.
넷째는 ‘애통하고’입니다. 이것은 극한의 슬픔으로 인해 머리카락을 쥐어뜯거나 가슴을 치는 행위를 뜻하는 말입니다. 이것인 지난날의 잘못된 삶에 대한 참회와도 같습니다.

요엘 선지자는 자신의 말로 다시 한번 더 회개를 촉구합니다 .
(13) 너희는 옷을 찢지 말고 마음을 찢고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올지어다 그는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애가 크시사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나니

두 가지 중요한 사실에 대해서 말씀합니다. 첫째, 회개는 마음을 찢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옷을 수백 번, 수천 번을 찢어도 마음을 찢지 않으면 아무런 소용이 없고, 무효입니다. 둘째, 회개는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세속적 가치관이나 자기 욕망에게로 돌아가면, 수백 번, 수천 번을 돌아가도, 돌아가지 않은 것과 같습니다. 아니 돌아가지 않음만 못합니다.
‘그는 은혜로우시며’ 앞에 ‘이유’를 뜻하는 접속사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돌아가야 하는 이유는 하나님은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 하시며 인애가 크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누가복음 15장에 나오는 둘째 아들이 허랑방탕하게 살다가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간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아버지는 그런 아들을 받아주시는 분이시라는 것입니다. 아버지가 그런 분이 아니시라면, 돌아가는 것과 돌아가지 않는 것이 다를 바가 하나도 없습니다.

하나님께 돌아가는 것이 소수의 사람들 만이 아니라 전국민적으로 이루어져야 함을 강조하며,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15-17) 너희는 시온에서 나팔을 불어 거룩한 금식일을 정하고 성회를 소집하라 백성을 모아 그 모임을 거룩하게 하고 장로들을 모으며 어린이와 젖 먹는 자를 모으며 신랑을 그 방에서 나오게 하며 신부도 그 신방에서 나오게 하고 여호와를 섬기는 제사장들은 낭실과 제단 사이에서 울며 이르기를 여호와여 주의 백성을 불쌍히 여기소서 주의 기업을 욕되게 하여 나라들로 그들을 관할하지 못하게 하옵소서 어찌하여 이방인으로 그들의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 말하게 하겠나이까 할지어다

1절에서는 나팔을 부는 것이 경고와 대비를 위한 것이었는데, 이곳에는 거룩한 집회를 소집하기 위한 것입니다. 금식을 촉구하는데, ‘거룩한 금식일을 정하라’는 말의 정확한 의미는 ‘정한 금식일은 거룩하게 지키라’입니다. 즉 금식일 자체가 거룩한 것이 아니라, 정한 금식일은 거룩하게 지켜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백성들의 모임을 거룩하게 하라’는 것을 신약적으로 표현으로 하면 ‘교회’입니다. 그러니까 유다 백성들은 우리에게 적용하면, 국가라기보다 교회가 더 적절합니다.
이 성회에는 장로(늙은 사람들)부터 어린이와 젖먹이까지 모두 동참하라고 합니다. 즉 100살부터 1살까지입니다. 그리고 신랑과 신부도 예외가 없다고 합니다. 당시 결혼을 하면 1년 동안은 군대에 소집되는 것도 면제가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신방에서 나오라고 하는 것은, 메뚜기 떼의 재앙으로 황폐해진 국가를 회복시키는 것은 전쟁보다도 더 중요한 일이었다는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제사장들은 주의 백성들을 위해서 기도를 해야 하는데 그 장소가 ‘낭실(성전 동쪽 현관)’과 ‘제단(번제단)’ 사이입니다. 제사장이 백성들을 위해 제사를 드릴 때 늘 기도드리던 곳입니다. 거기서 울며 백성들이 이방인들에게 유린당하지 않도록 기도라는 것은 이 모든 상황에서 건져 주실 분은 하나님 밖에 없음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어제 살핀 것처럼, 요엘의 주제어가 ‘여호와의 날’입니다. 그 날이 없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우리 개개인 뿐만 아니라, 가정, 일터, 교회, 국가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날이 불현듯 찾아오기도 합니다. 천재지변이나 전쟁, 예기치 않는 사고 등과 같은 일로 인해서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찾아오는 크고 작은 여호와의 날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은 그 날이 서서히 다가옵니다. 오늘 본문 뿐만 아니라 1장에서 보았던 것처럼, 하나님께서 다양한 종류의 메뚜기를 통해서 반복해서 말씀해 주십니다. 건강을 통해서 찾아오는 여호와의 날은 그 동안 자신의 건강에 대해서 과신해서 무시를 하거나, 스스로 자기 몸을 학대하거나, 여러 경고등을 외면했기 때문입니다. 경제문제를 통해서 오는 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사용하지 말아야 할 곳에 과도하게 낭비했거나 더 많은 것을 움켜쥐겠다고 과도하게 투자(투기)하거나, 자신의 능력을 과신하고 실직, 부도 등의 날을 대비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사람과의 관계도 동일합니다. 어느 날 갑자기 단절되는 것이 아니라 그동안 금이 가는 상황들을 외면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삶에서 돌이키는 길은 이제라도 하나님께로 돌아가 자신의 겟세마네에서 얼굴을 땅에 대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에게는 심판과 징계가 이루어질 여호와의 날이 상급을 받게 되는 여호와의 날로 바뀌게 됩니다. 그런 사람이 주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는 사람임에도 두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오늘 하루 우리 삶의 자리에서 겟세마네를 찾아 그 얼굴을 땅에 댐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총과 역사의 통로로 사시는 한 날이 되기를 축복합니다.


기 도
하나님 아버지!
메뚜기 떼가 몰려오면, 그것들은 성벽도 쉽게 넘고, 무기고에도 쉽게 들어가고, 집안으로 드나드는 것도 자유롭게 할 수 있어서 재앙이 될 수 밖에 없듯이, 장차 이방인의 군대가 그렇게 할 것이라고 요엘 선지자는 경고했습니다. 그리고 그날이 바로 여호와 하나님께서 정하신 날이 된다고 외쳤습니다. 그래서 요엘 선지자는 이제라도 늦지 않았으니, 하나님께 돌아오기를 목이 터져라고 호소했지만, 하나님의 백성들은 귓등으로도 듣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우리도 요엘 선지자의 외침에 자유롭지가 못합니다. 우리도 매 주일마다, 매일마다, 매 순간마다 하나님께 돌아오라는 말씀을 듣지만, 돌아가려고 하지 않습니다.
바라옵나니 집을 나간 둘째 아들이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간 것처럼 우리도 하나님 아버지께로 돌아가게 하시고, 우리의 겟세마네에서 엎드려 기도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런 과정을 통해서 우리가 매일 주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오늘 하루도 하나님께로 돌아가, 하나님 앞에서 얼굴을 땅에 대는 한 날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묵상을 돕는 질문
1. 하나님께서는 메뚜기 떼가 침입하는 때를 통해서 ‘여호와의 날’에 대해서 말씀하셨습니다. 당신은 삶 가운데 자연현상이나 일상적인 일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깨달았던 적은 없습니까? 그 때에 어떤 교훈을 얻었습니까?
2. 하나님께서는 ‘너희는 이제라도 금식하고, 울며, 애통하고,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께로 돌아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당신의 삶의 영역에서 하나님께로 온전히 돌아가야 할 부분은 무엇입니까?
3. 우리가 이제라도 하나님께 돌아갈 수 있는 이유는 그는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애를 돌이키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당신이 최근에 경험한 하나님은 어떤 분이셨습니까?
4. 자신의 겟세마네에서 얼굴을 땅에 엎드려 기도하는 삶을 살며, 주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기 위하여 무엇을 결단하시겠습니까?


(작성 : 정한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