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욥기 32:1-22
찬송가 453장 ‘예수 더 알기 원하네’



엘리후의 등장(1-5절)
오늘 본문에는 ‘엘리후’라는 새로운 인물이 등장합니다. 42장으로 된 욥기를 크게 4부분으로 나누면 이러합니다.
첫 번째, 1-2장인데, 서론과 같습니다. 온전하게 살려고 했던 욥과 그의 가정에 닥친 재난에 대해서 증거합니다.
두 번째, 3-31장인데, 욥과 욥의 세 친구 사이에 있었던 3번에 걸친 긴 대화(변론)에 대해서 증거합니다.
세 번째, 32-37장인데, 욥과 세 친구 사이에 있었던 변론을 듣고 있던 젊은 사람 엘리후의 변론에 대해서 증거합니다.
네 번째, 38-42장으로, 하나님과 욥의 대화로, 인간과 차원이 다르신 하나님에 대해서와 욥의 회복에 대해서 증거합니다.

오늘 본문 32장부터 37장까지 6장은 엘리후의 변론인데, 엘리후의 설교와도 같습니다. 엘리후는 32장부터 37장까지 6장에서 4번에 걸쳐서 말을 합니다. 첫 번째가 32-33장이고, 두 번째가 34장, 세 번째가 35장, 네 번째가 36-37장입니다.
엘리후의 첫 번째 변론(설교)이 32-33장인데, 그 중에서 32장은 엘리후가 어떤 인물인지와, 엘리후가 스스로 나설 수밖에 없었던 이유에 대해서 피력하고 있습니다.

엘리후가 어떤 인물인지를 2절 상반절이 이렇게 증거합니다.
람 종족 부스 사람 바라겔의 아들 엘리후가 화를 내니

성경에서 인물을 설명할 때에 가문부터 말하는 사람은 사람들에게 알려진 집안임을 의미합니다. ‘엘리후’는 그 뜻이 ‘그 분이 나의 하나님’입니다. 그리고 그의 아버지 ‘바라겔’의 뜻은 ‘하나님께서 복을 주셨다’입니다. 또한 엘리후가 ‘람’ 종족이라고 하는데, ‘람’은 유다지파 다윗의 조상 중에 ‘람’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부스’는 아브라함의 동생 나홀의 아들인데, 우스와 형제입니다. ‘우스’는 욥이 우스 땅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엘리후의 조상과 욥의 조상이 형제입니다. 그래서 엘리후의 가문은 신앙적인 전통이 있는 가문이자, 욥과 친족관계인 관계로, 욥이 재난을 당했다는 이야기를 듣고서 찾아온 것으로 보입니다.
자신의 정당함을 주장하는 욥의 말에 엘리바스, 빌닷, 소발 세 사람이 더 이상 설득을 하지 못하자, 엘리후가 나타나 이렇게 말문을 열었습니다. 2-5절이 이렇게 증거합니다.
람 종족 부스 사람 바라겔의 아들 엘리후가 화를 내니 그가 욥에게 화를 냄은 욥이 하나님보다 자기가 의롭다 함이요 또 세 친구에게 화를 냄은 그들이 능히 대답하지 못하면서도 욥을 정죄함이라 엘리후는 그들의 나이가 자기보다 여러 해 위이므로 욥에게 말하기를 참고 있다가 세 사람의 입에 대답이 없음을 보고 화를 내니라

이 네 절에 엘리후가 ‘화를 내었다’는 말이 4번이나 나옵니다.
화가 난 상태에서 말을 하게 되면, 스스로의 감정을 통제하는 것이 어려워서 거친 말과 상대를 공격하는 말 뿐만 아니라 하지 말아야 하는 말을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자신이 화가 난 것보다도 자신이 무분별하게 내 뱉은 말로 인해서 더 큰 낭패를 당하거나 값비싼 대가를 지불해야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화가 났을 때는 언행을 멈추는 것이 지혜입니다.
다윗이 사울왕으로부터 쫓겨 다닐 때에, 마온 지방에 있을 때였습니다. 다윗은 함께 한 600명의 사람들과 더불어서 그 지역에서 목축을 하는 사람들을 보호해 주고, 식량을 받아서 먹곤 했습니다. 양털을 깎는 때(목축하는 사람에게 양털을 깎는 때는, 농사를 짓는 사람의 추수 때와 같습니다.)가 되어서 마온 지역의 유지였던 나발이라는 사람의 집으로 부하 10명을 보내어서, 양 떼를 지켜준 대가로 먹을 것을 요청했습니다. 하지만 나발은 음식은커녕 다윗과 다윗의 부하들을 모욕하는 말하고서 되돌려 보냈습니다. 화가 머리끝까지 난 다윗은 부하 600명 중에 400명을 데리고 가서, 나발을 죽이려고 했습니다. 그 때에 나발의 아내 아비가일이 음식을 급하게 준비해 와서 다윗이 노를 누그러뜨렸습니다. 그 때 만약 다윗 화가 난 감정 그대로 행하여 나발을 죽였다면, 그는 이스라엘의 왕이 되기가 어려웠을 것입니다. 자기 동족에게 칼을 겨누는 사람을 왕으로 세우지 않았을 것입니다.

엘리사 선지가가 벧엘로 올라갈 때에, 아이들이 “대머리야, 대머리야”라며 놀렸습니다. 화가 난 엘리사 선지자가 저주하였더니 수풀에 암콤 2마리가 나와서 아이들 42명을 찢었습니다.

우리도 감정이 격한 상태나, 분노에 휩싸여 있을 때, 중요한 대화나 중요한 결정을 하지 않아야 합니다. 표면적인 분노 상태뿐만 아니라 내적인 분노 상태일 때도 동일합니다. 청년이 이성으로부터 이별통보를 받고서, 감정이 정리되지 않고, 분노의 상태에서 사람을 선택하여 결혼하면 행복하기가 참 어렵습니다.

엘리후의 서론 발언(6-22절)
엘리후의 말은 이렇게 이어집니다. 6-9절이 이렇게 증거합니다.
부스 사람 바라겔의 아들 엘리후가 대답하여 이르되 나는 연소하고 당신들은 연로하므로 뒷전에서 나의 의견을 감히 내놓지 못하였노라 내가 말하기를 나이가 많은 자가 말할 것이요 연륜이 많은 자가 지혜를 가르칠 것이라 하였노라 그러나 사람의 속에는 영이 있고 전능자의 숨결이 사람에게 깨달음을 주시나니 어른이라고 지혜롭거나 노인이라고 정의를 깨닫는 것이 아니니라

엘리후는 욥과 그 친구들이 자신보다는 많이 연장자였기 때문에 어른들을 공경하는 의미로, 선뜻 끼어들지 못하고 계속해서 그들의 대화를 지켜보았습니다. 큰 연령차로 인해서 약간 주눅도 들어있었던 것으로 여겨집니다. 그래서 선뜻 나서서 자신의 의견을 밝히는 것을 망설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엘리후는 욥의 친구 세 사람의 말을 다 듣고, 그들의 말을 논리적으로 분석하고서는, 나이가 많다고 해서 모두가 모든 부분에 지혜로운 것은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오래 살았다고 해서 자동적으로 지혜로워지는 것은 아닌 것은 사실입니다. 만약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자동적으로 지혜로워진다면, 세상의 어리석은 범죄를 다 젊고 어린 사람들이 저질러야 하는데, 나이 든 사람이 저지르는 경우가 훨씬 더 많습니다. 즉 나이가 들어가면서 어리석게 행동하는 사람도 많습니다.
8절에서 엘리후는 ‘전능자의 숨결’이 사람에게 깨달음을 주신다고 합니다. 이 말은 진리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시고, 그 코에 생기를 불어넣어 주셔서 살아있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우리를 지혜롭게 해 주시는 분이 전능하신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잊지 않고, 인정하는 것이 지혜입니다.

계속해서 11-14절이 이렇게 증거합니다.
보라 나는 당신들의 말을 기다렸노라 당신들의 슬기와 당신들의 말에 귀 기울이고 있었노라 내가 자세히 들은즉 당신들 가운데 욥을 꺾어 그의 말에 대답하는 자가 없도다 당신들 말하기를 우리가 진상을 파악했으나 그를 추궁할 자는 하나님이시요 사람이 아니라 하지 말지니라 그가 내게 자기 이론을 제기하지 아니하였으니 나도 당신들의 이론으로 그에게 대답하지 아니하리라

엘리후는 욥의 세 친구들이 하는 말을 오랫동안 들으며, 그들이 욥을 굴복시킬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세 사람 중 그 누구도 욥의 말이 틀렸음을 증명하거나, 욥의 자기 변증에 제대로 답변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엘리후가 세 친구들에게 “당신들은 ‘이제 욥을 바꿀 수 있는 분은 하나님 밖에 없다.’고 생각하지만, 내가 다르게 욥에게 답변해 보겠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엘리후는 자신이 말을 할 수 밖에 없는 이유를 17-22절에서 이렇게 밝힙니다.
나는 내 본분대로 대답하고 나도 내 의견을 보이리라 내 속에는 말이 가득하니 내 영이 나를 압박함이니라 보라 내 배는 봉한 포도주통 같고 터지게 된 새 가죽 부대 같구나 내가 말을 하여야 시원할 것이라 내 입을 열어 대답하리라 나는 결코 사람의 낯을 보지 아니하며 사람에게 영광을 돌리지 아니하리니 이는 아첨할 줄을 알지 못함이라 만일 그리하면 나를 지으신 이가 속히 나를 데려가시리로다

엘리후는 자신이 말을 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자기 속에 할 말이 가득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가죽부대에 담긴 포도주가 시간이 날수록 부풀어 오르는 것처럼, 자기 배라는 포도주 통에 ‘할 말’이라는 포도주가 가득하여, 말을 하지 않으면 금방이라도 터질 것 같다고 합니다. 또한 자신이 말을 하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자신을 데려가실 것 같다고 합니다.

어렸을 때에 제 선친과 동네 어른들이 하시는 이야기를 옆에서 들으면, 대화의 내용이 정확한 정보에 의한 것이 아닐 때도 있고, 또 당신들이 경험한 것이 지극히 일부분임에도 전부인 것처럼 말씀하실 때도 있고, 앞뒤가 맞지 않는 논리를 펴 갈 때도 있었던 것으로 기억이 됩니다. 그 때에 옆에서 오랫동안 듣다가 더 이상 참을 수 없는 지점에 이를 때가 있습니다. 그 때에 개입을 합니다. “아버지, 그 내용은 그것이 바른 것이 아니라, 이러 이러한 내용이 바른 것입니다.”라고 말씀을 드리면, 날아오는 대답이 있었습니다. “시끄럽다. 어른들 얘기하는데.... 나가서 놀아라!”

욥의 친구들은 자신들의 모든 경험과 모든 지식과 모든 하나님에 대한 경험을 동원해서 욥을 바꾸려고 했지만 실패했습니다. 또한 앞으로 계속 살펴보겠지만 엘리후 말에는 굉장히 예리한 시각으로 정확하게 지적하는 부분도 있습니다. 하지만 엘리후의 말도 욥을 변화시키지 못했습니다. 욥과 다른 사람들과의 대화를 사도 바울이 디모데에게 권면한 말로 표현하면 디모데후서 2:23입니다.
어리석고 무식한 변론을 버리라 이에서 다툼이 나는 줄 앎이라

우리도 우리가 경험한 하나님, 우리가 체험한 신앙관으로 다른 사람에게 하나님의 뜻을 전하려 했을 때 잘 되지 않는 것을 봅니다. 우리의 말이 다른 사람을 바꾸거나 변화시키지 못합니다. 그 일은 하나님의 영역입니다. 우리가 말을 한다면 다른 사람을 내 힘으로 바꾸기 위함이 아니라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에 대해서 담담하게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나누는 말이 어떻게 사용되는지는 우리의 영역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역입니다.

현대사회가 복잡다단해짐에 따라 예기치 않는 사건, 사고들이 많이 일어납니다. 그 일이 나에게 또는 다른 사람에 왜 일어났는지는 잘 모릅니다. 시간이 어느 정도 지나고 나서야 정리가 되는 것이 있고 또 어떤 일은 아주 오래 지나고 나서야 정리가 되고 이해가 되기도 합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것은 하나님께서 마음과 정성을 다하여 심어주신 삶의 자리에서 묵묵하게 자기를 부인하는 삶을 사는 것이고, 자기 십자가를 지는 것입니다. 그것도 매일 자기를 부인하고, 매일 자기 십자가를 지는 것입니다. 그런 우리를 통로로 삼아 하나님께서 우리 가정과 내가 속한 일터와 내가 서 있는 자리를 새롭게 바꾸어 가실 것입니다. 오늘도 그 은총 가운데 사시는 한 날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기 도
하나님 아버지!
우리의 신앙생활을 가만히 돌아보면, 엘리후와 같을 때가 참 많습니다. 한동안은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깊이 들어주고, 또 그 사람의 상황을 이해해 주는 듯하다가 어느 순간에 내 생각과 내 경험을 총 동원해서 상대를 바꾸어보려고 하곤 합니다. 상대가 내 생각하는 방향이나 내가 예상한 정도로 바뀌지 않을 때 의아해 하거나 실망하곤 했습니다.

우리의 생각이나 지식, 경험으로 상대를 바꾸려고 하는 어리석음에서 벗어나게 하여 주시옵소서. 우리는 하나님과 다른 사람, 세상일에 대해서 아는 것이라고는 지극히 작음을 고백합니다. 그런 우리의 앎으로 다른 사람을 바꾸려고 하기보다, 하나님께서 마음과 정성을 다하셔 우리를 심어주신 가정과 일터, 삶의 자리에서 자기를 부인하는 일과 자기 십자가를 지는 삶을 살아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 삶을 날마다 살아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 때에 우리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 가정과 우리 일터와 삶의 자리를 바꾸어가는 것을 확인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오늘도 그 은총을 누리는 한 날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묵상을 돕는 질문
1. 오늘 본문의 말씀을 찬찬히 다시 읽고 그 내용을 정리해 보십시오.
2. 엘리후는 욥과 그 친구들의 이야기를 오랫동안 듣다가 어느 순간에 격한 감정으로 분노하였습니다. 당신이 그와 같은 경험을 한 적은 언제였습니까? 당시에는 의로운 분노라고 생각했는데, 후에는 당신의 감정이었던 적은 없었습니까?
3. 당신은 말로서 다른 사람을 변화하게 하신 일이 있습니까? 있다면 그것은 언제였습니까? 당신의 생각대로 되지 않았다면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4. 오늘도 하나님께서 마음과 정성을 다하여 심어주신 삶의 자리에서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는 삶을 통해서 다른 사람들을 어떻게 품기로 결심하시겠습니까?


(작성 : 정한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