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갈라디아서 2장11절-21절
찬송가 357장  '주 믿는 사람 일어나'

만일, 직장에서, 일반사원이 많은 직원들 앞에서 회장을 야단치는 일이 있을 수 있을까요?
학교에서, 학생이 선생님에게 잘못하셨으니까 학생들 앞에서 대놓고 사과하시라고 했다면 그것이 가능한 일이겠습니까?
혹 회장님이나 선생님이 업무상, 교육상, 어떤 실수를 했다 할지라도 많은 사람들 앞에서 정면으로 “회장이. 혹은 선생님이 되가지고 이것 밖에 못합니까?”라고 충고를 했다면 그 다음 무슨 일이 생기겠습니까?
그와 똑같은 일이 베드로와 바울 사이에 일어났습니다.
베드로로 말할 것 같으면 예수님의 수제자이며 초대교회 대표적이며 상징적인 인물일 뿐 아니라 나이로 보아도 비교할수 없습니다.
바울은 나이도 젊은데다 지방에서 목회하고 있었던 이제 갓 목회를 시작한 초임목회자라고나 할까요. 
베드로가 얼마나 큰 잘못을 저질렀 길래 젊은 바울이 이렇게 할 수 있었을까요?
옳고 그름을 떠나서 ‘괘씸죄’라는 것이 있는데 다른 업무상의 실수는 용서 받을 수 있어도 조직사회에서 윗사람에게 ‘괘씸죄’에 걸리면 끝입니다. 두고두고 잊지 않고 괴롭힙니다. 못살게해서 스스로 그만두게 합니다.
만일 베드로가 화가 나서 한마디 했다면 바울은 사역에 큰 어려움을 겪었을 수도 있고 또 매장 당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드로는 겸손한 신앙인이요, 참된 하나님의 종이었는지라 이 문제는  베드로가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조용하게 마무리되었습니다.
베드로의 위대함과 바울의 열정이 빛나는 대목입니다.

유대주의 자들이 바울이 목회하고 있는 안디옥을 방문하게 되었습니다. 이유는 이방인들도 복음을 받아들이고 교회에 나오고 있다는 놀라운 소식을 듣고 확인하기 위해서입니다.
이같은 일은 초대교회 유대인들에게는 엄청난 소식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전통적으로 오직 자기들만이 하나님의 유일한 선택된 민족으로 알고 선민의식을 가지고 살았습니다. 유대인외에 다른 이방인들은 하나님께서 지옥의 땔감으로 만들었다고 말할 정도로 이방인들을 무시하는 배타적인 민족이었습니다. 그런데 안디옥 사람들이 복음을 받아들이고 예수님을 구주로 믿는다는 소식은 가히 충격적이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이제 더 이상 유대인의 하나님만이 아니라 이방인의 하나님도 되신다는 청천병력과 같은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베드로는, 소문대로 이방인들이 자기들과 똑같이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고백하고 하나님을 예배하고, 신앙생활 하는 모습을 보면서 과연 하나님께서 이방인의 하나님도 되셨다는 것을 인정하고 이방인들과 더불어 주 안에서 한 형제, 자매로 알고 식사를 같이 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그들의 풍습에 의해서 절대 이방인들과 밥을 같이 먹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베드로는 하나님께서 그 벽을 무너뜨린 것을 확인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이방인들과 식사를 한 것입니다.
문제는 베드로가 밥 먹고 있을 때, 예루살렘 교회로부터 유대인 교인들이 갑자기 찾아 온 것입니다.
이때 베드로가 취해야 할 바른 태도는 그냥 이방인들과 같이 식사를 계속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놀라서 밥 먹다 말고 자리를 떳습니다.
당시 예루살렘 교회는 유대인들이 주류를 이루었고 유대교적인 분위기가 가득 차 있었습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교회의 수장인 베드로가 유대인 전통을 깨고 이방인과 같이 밥 먹었다는 소문이 나게 되면 교회가 발칵 뒤집힐 것이 뻔했기 때문입니다. 이와는 다르게 베드로의 또 다른 입장을 밝히는 신학자의 견해도 있지만 어쨌든, 차라리 베드로는 그들에게 이방인들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하나님의 구원계획이 실현되었음을 설득했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교회 분위기가 복잡해 질 것 같아서 그 자리를 피해 버리게 된 것입니다.
베드로가 자리를 뜨자 바울의 동역자 바나바도 같이 얼른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이와 같은 베드로의 행동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만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하나님께서 계시해 주신 ‘절대 복음’을 정면으로 부인한 꼴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결과적으로, 베드로의 행동은 예수 그리스도도 믿고, 거기다 유대인 전통도 함께 지켜야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다른 복음’을 몸으로 보여 준 사건이 되어버렸기 때문에 이 문제는 기독교의 구원관을 뿌리째 흔든 사건이 되었습니다.
베드로는 ‘오직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복음의 진리를 누구보다도 잘 알면서 그 진리에 따라 행동하지 않고, 오히려 자신의 입장이 난처해질까 봐 순간적으로 위선을 저지른 것입니다.

바울이 위대한 것은 절대적인 우선순위를 진리를 따라 사는 것에 두었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유대교 율법을 어렸을 때부터 배워 왔기 때문에 윗사람을 어떻게 공경해야 하는지 잘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어린 바울이 존경받는 베드로를 야단칠 경우 다른 사람들의 눈에 어떻게 비칠 것을 모를 리가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리를 우선하고 살았기 때문에 그렇게 할 수 있었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을 믿을 때, 사람이 의롭게 될 수 있는데 사람들은 거기에다 다른 것을 첨가합니다.
‘기복신앙’도 첨가하고, 자기주장이나 뜻을 섞은 '도덕윤리'나 ‘인본주의 신앙이나 전통’도 첨가하여, 가장 중요한 ‘절대 복음’을 희석시키는 것입니다.
여기 본문에서 강조하고 있는 ‘다른 복음’은 구원받기위하여 요구되는 믿음에 반한 율법입니다.
사람들은 ‘다른 복음’인 행위나 율법을 통해서 구원을 받을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끈질기게 자신을 율법에 엮어 메어 주 안에서의 ‘자유와 평안’을 상실하면서 살아갑니다.
율법의 행위로 의롭게 될 수 없습니다.
본문 16절에,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요”라고 분명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어떤 교회에서는 믿음으로 구원을 얻었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하고 율법에 맞추어서 살아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애매하게 행위와 율법을 섞어 얽어매어 놓습니다.
그 결과, 신앙생활에서 감사와 감격과 기쁨이 사라지고, 배우면 배울수록, 도무지 하나님의 말씀을 지킬 능력이 없는 자신의 무능 앞에 절망하고, 더욱 더 영적으로 육적으로 황폐하게 만들어가고 있습니다.
구원을 얻기 위하여 율법을 만족시키기위하여 온전히 지킬 수 있는 자가 하나도 없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왜 율법을 주셨습니까?
율법은 마치 거울과 같아서 거울이 없을 때는 자기 얼굴에 무엇이 묻었는지 알지 못하지만 거울로 자신을 들여다 볼 때 비로소 우리 상태가 얼마나 악하고 타락했는지를 아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율법은 지키라고 주신 것이 아니라 율법을 통해 자신의 상태가 얼마나 심각한 것인가를 점검해 보라고 주신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을 이해하기 위해 바울의 다음 말씀을 상기할 필요가 있습니다.
“만일 의롭게 되는 것이 율법으로 말미암으면 그리스도께서 헛되이 죽으셨느니라”(갈2:21)고 했습니다.
만일 율법을 지켜 의롭게 될 수 있다면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실 이유가 없었다는 뜻입니다.
이로 볼 때 율법은 지키라고 주신 것이 아님을 확인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왜 하나님께서 지키지도 못할 율법을 주셔서 우리로 하여금 심히 죄 되게 하시고 그 죄로 인해 죽게 만드셨는가?
그것은 “은혜를 베풀어 영생을 주시기 위함‘입니다.
로마서 5장 20-21절에, “율법이 들어온 것은 범죄를 더하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 이는 죄가 사망 안에서 왕 노릇 한 것 같이 은혜도 또한 의로 말미암아 왕 노릇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생에 이르게 하려 함이라”고 했습니다.
예수께서 부활의 영광이 있기 위하여
십자가 죽음이 먼저 있어야 했습니다.
은혜를 받기 위해서는 먼저 죄 가운데 빠져 있어야 합니다.
같은 논리로 영생을 얻기 위해서는 먼저 죄로 인해 영벌에 처해 있어야 합니다.
율법을 통해 죄가 심히 죄 되게 하고, 그 죄로 인하여 죽게 하신 이유는 심히 크신 하나님의 은혜로, 영생을 주시기 위해 그렇게 하셨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율법을 통하여 죄인들에게 하나님의 용서와 구원의 은혜가 상대적으로 얼마나 값진 것인가를 깨닫게 하십니다. 그 은혜를 깨달은 사람만이 더 이상 율법을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만을 의지하고 경외하면서 살 수가 있습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리실 때 율법이 내게 요구한  요구 사항을 죽음으로써 이행해 주셨습니다.
빚을 다 갚아 주셨습니다.
율법의 노예 상태에서 해방시켜 주셨습니다.
이 사실을 알고, 믿을 때 우리는 이제 자유의 길로 들어서게 됩니다.
이 구속의 역사를 일으켜 주신 주님이 부활했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이 지금 나와 함께 사십니다.
이제 내가 사는 것은 내 안에 사시는 주님께서 내게 때마다 베풀어 주시는 은혜로 삽니다.
이 능력을 의지할 때, 하나님께 감사하고, 사랑하고, 기쁨으로 순종할 수 있는 힘을 베풀어 주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율법에서 해방된 새 생명입니다.
이 사실을 믿는 자,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으로 주 안에서 자유와 평안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기도
하나님아버지 감사합니다.
율법으로서가 아닌 믿음으로 구원받게하시고 복된 주의 자녀로 살아가게 하신 것을 감사합니다.
‘기복신앙’이나, 자기주장이나 뜻을 섞은 “도덕윤리”나 ‘인본주의 신앙이나 전통’이 아닌, 십자가를 통하여 계시된 주님의 말씀을 믿음으로 구원받고, 그 능력으로 살아가는 믿음의 사람, 죄에서 해방된 자유인으로 사는 그리스도인 되게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묵상을 돕는 질문
1. 게바(베드로)가 바울로부터 책망 받은 이유는 무엇인가요?

2. 율법은 무엇을 의미하나요?

3. 율법의 역할은 무엇인가요?

4. 율법과 반대되는 개념은 무엇인가요?

5. 구원은 무엇으로 받게 되나요?

(작성: 김순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