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요한일서 2:1-6
찬송가 90장 ‘주 예수 내가 알기 전’
요한 사도는 2장 1절에서 ‘나의 자녀들아’라는 말로 시작합니다.
의로우신 대언자 (1)
(1a) 나의 자녀들아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씀은 너희로 죄를 범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요한은 이 편지를 읽는 사람들을 ‘나의 자녀들아’라고 부릅니다. ‘자녀들아’는 말은 원어로 지소사 형태를 쓰고 있는데, 성경에서 요한만이 사용하는 특유한 표현입니다. ‘지소사’는 ‘애칭으로 짧게 줄여 부르는 말’을 의미하는데, 새끼 짐승을 부를 때 송아지 강아지 망아지와 같이 작음이나 애정의 뜻으로 사용하는 접사입니다. 자녀라는 말이 이미 애정을 표현하는 말이지만, 지소사를 사용해 더 깊은 관심과 사랑을 표현합니다. 게다가 ‘나의 자녀들아’라고 하고 하는 것은, 더욱 개인적인 친밀함의 표현입니다.
요한일서는 주후 80-90년경에 연로한 요한이 기록한 것으로, 다른 사도들이 모두 순교한 이후에 마지막 사도인 요한이 기록하였습니다. 야고보가 44년경(행12:1), 베드로는 64-67년, 사도바울 67년경에 순교하는 등 이제 사도 중 마지막으로 요한만이 남아 교회에 편지를 쓰는 것입니다. 그래서 연로한 요한이 ‘나의 자녀들아’라고 부르는 것은 그의 눈에 성도들은 믿음의 길을 따라오는 자녀들로 보였을 것입니다. 생존의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마지막 사도로서 요한은, 교회가 당면해 있는 위험을 지켜보고 있었고, 믿음의 선배로서 아버지와 같은 마음으로 편지를 썼습니다.
요한은 이 편지를 쓰는 목적 중 하나로, ‘너희로 죄를 범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고 말합니다. 죄는 창조 때부터 지금까지 여전히 실질적인 문제입니다. 그러나 신앙을 갖고 난 후에 죄를 짓는 것은, 다른 양상의 문제를 일으킵니다. 신앙인은 죄가 무엇인지 알고 자신이 죄인임을 인정하며 죄의 심각성도 알지만, 여전히 죄에 노출되어 죄 가운데 있습니다. 많은 경우 그리스도인들 가운데 죄에 대한 패배주의가 자리 잡아 있습니다. 죄를 적극적으로 짓지 않지만, 또한 죄를 짓지 않으려는 적극적인 노력도 하지 않으며 정체돼 있습니다.
문맥적으로, 요한은 이 경우를 두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믿음의 대선배인 요한은 죄에 대해 낙담하고 실패감에 빠질 수 있는 교회에 말하고 있습니다. 1절 후반절입니다.
(1b) 만일 누가 죄를 범하여도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으니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시라
초대교회 내에도 죄의 문제가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거짓말, 분파와 당 지음, 간음, 거짓 가르침, 거짓 선동 등 죄가 여전히 있었습니다. 죄의 문제는 개인의 신앙을 무기력하게 만들 뿐만 아니라, 교회 또한 무기력하게 만듭니다. 이는 그리스도인의 실존적인 문제이고 신앙의 중요한 요소입니다. 로마서는 7장 2절에서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라고 하지만, 여전히 죄는 신앙인과 교회에 있습니다.
사도 요한은 이 문제에 대해서, “누가 죄를 범하여도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으니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시라”고 합니다. 이 말은 죄를 지어도 되는 면제부를 주는 것이 아닌, 죄로 인해 실패감에 있는 사람에게 일어나라고 하는 말입니다.
‘죄를 범하여도’라고 번역된 ‘하마르테’는 부정과거 시상으로, 이미 죄를 짓은 상태에 대해 말하는 것입니다. ‘만일’이라고 하여 가정법을 쓰지만, 과거 시상을 쓰기에 이미 죄를 짓는 상태에 놓여있는 성도들과 교회에 이 말을 하는 것입니다.
또한 ‘대언자’는 ‘돕는자’ ‘중재자’ ‘변호인’등을 의미하는데, 법적인 지원을 제공하는 사람을 말합니다. 이 대언자는 하나님 앞에서 죄인을 위해 변호하시는 예수 그리스도 이십니다. 변호인은 피의자의 범죄 사실이 명확한 경우에, 감형을 받을 수 있도록 돕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감형을 위해서 변론하는 것이 아니라, 무죄를 위해 변론하십니다. 죄인이 무죄 선고를 받도록 변론하는 것은 의롭지 않은 것입니다. 변호사들이 범죄 사실이 명확함에도 법리를 이용해 무죄 선고를 받도록 변론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것은 의롭지 않습니다. 범죄자를 법리를 이용해 무죄 선고를 받도록 하는 것은 사회에서도 없어져야 할 부정부패 중에 하나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범죄자가 무죄선고를 받도록 대언하십니다. 그런 그를 의로우신 대언자라고 합니다. 어떻게 죄를 범한 사람이 무죄를 선고를 받도록 변론하는 것이 의로울 수 입습니까? 2절에서 말씀합니다.
우리 죄를 위한 화목 제물 (2)
(2a) 그는 우리 죄를 위한 화목 제물이니
예수님은 우리 죄인를 위한 화목 제물이다고 합니다. 화목제물은 헬라어 원어로 ‘힐레오스’로 ‘신을 위로하고 진노를 경감시킨다’는 의미입니다. 구약성경은 하나님은 모든 죄에 대해 진노하시며, 율법의 모든 제사는 하나님의 진노를 전제로 합니다. 하나님은 더디게 노하시는 분이시지만, 죄에 대해서는 엄격하게 진노하십니다. 심지어 민수기 14장 18절은 ‘여호와는 죄악과 과실을 사하나 형벌 받을 자는 결단코 사하지 아니하고 아비의 죄악을 자식에게 갚아 삼사대까지 이르게 하리라’고 말씀하시기 까지 합니다.
그런데 이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는, 화목제물을 통해 그 진노가 제거될 수 있다는 의미를 동반합니다. 레위기 17장 11절은 ‘내가 이 피를 너희에게 주어 단에 뿌려 너희의 생명을 위하여 속하게 하였나니’라고 그 죄의 사함에 대해서 분명하게 말씀합니다. 신약에서도 로마서 3:25절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라고 말씀합니다.
화목제물이신 예수님은 범죄한 자들에게 내려지는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을 대신 받아서, 그 진노를 무마시킵니다. 그래서 죄를 범한 자를 무죄하다고 증언하실 수 있습니다. 죄인을 무죄라고 변론하지 않고, 죄를 인정하며 그 죄에 대한 심판을 대신 받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1장 10절에서 “만일 우리가 범죄하지 아니하였다 하면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이로 만드는 것이”되는 것입니다.
(2b) 우리만 위할 뿐 아니요 온 세상의 죄를 위하심이라
요한 사도는 예수께서 이 편지를 받는 사람들만을 위한 화목제물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이 죄 사함이 개인적인 체험과 종교심에 의한 것이 아님을 말하는 것입니다. 신앙은 자신의 죄를 용서받고 용기를 얻는 개인적인 체험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제물 되심은 주관적인 경험과 신념이 아니라, 전우주적으로 이루어진 객관적이고 역사적인 사실입니다. 요한은 그 부분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반복되는 죄의 문제를 보면서 낙담하고 패배의식에 빠지게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럴 때 정말 죄 사함과 죄의 해결이 이루어진 것이 맞는지 확신이 없어지고 침체에 빠지기도 합니다. 요한은 이것이 개인적인 경험이기 전에, 온 세상에 미치는 객관적 사건임을 말합니다.
미국의 청교도 목회자인 조나단 에드워즈는 ‘구속사’라는 설교에서 예수님의 희생제물로서의 역할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는 창세전에 중보자의 일을 맡았고, 인간의 중보자로 오셔서 그 직분을 감당하기로 영원 전에 아버지와 약속하셨습니다... 인간이 타락하자 즉시 그리스도가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중보자 직분을 감당하기 시작했다는 것은 하나님의 자비가 인간을 향해 즉각 주어지기 시작한 것으로 보아도 무방합니다... 여기에 중보자가 없었다면 타락한 인간에 대한 자비도 절대로 없습니다. 그리스도는 자신의 직분을 철저히 감당하는 것으로 타락한 인간을 보살피십니다.”
그러나 이 말씀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사람도 구원을 받는 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요한은 성도들에게 죄사함이 개인적인 경험이기 전에,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온 세상에 행하신 역사적인 사실임을 말합니다. 그렇기에 주관적인 상태와 경험으로 인해 죄에 대한 패배의식에 빠져 있어서는 안 됨을 말씀합니다. 3절에서 4절입니다.
그가 행하시는 대로 행하라 (3-6)
(3-4) 우리가 그의 계명을 지키면 이로써 우리가 그를 아는 줄로 알 것이요 그를 아노라 하고 그의 계명을 지키지 아니하는 자는 거짓말하는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있지 아니하되
신앙을 고백하는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은 포기하지 않아야 합니다. 3절에서 안다는 단어인 ‘기노스코’는 체험적이고 관계적인 앎을 의미하는 동사입니다. 그러나 요한은 하나님을 아는 것은 관계적 체험이며, 동시에 계명을 지키는 실천이다고 말합니다. 둘은 선후 관계에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적인 체험으로부터 자연스럽게 실천이 나온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계명을 지키는 것이, 그 사람의 하나님과의 관계의 표현인 것입니다. 즉 하나님이 느껴지지 않는 주관적인 경험이, 계명을 실천하지 않는 정당한 이유가 되지 않는 다는 것입니다.
죄로 인한 실패감에 젖어 있을 때, 계명을 지키는 실천이 먼저 필요할 때가 있습니다. 행함이 오히려 하나님을 알고 그와 사귐이 있다는 증거와 동기가 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지킬 때, 그것이 하나님께서 자신을 사랑한다는 증거가 되어, 알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이것에 대해서 5-6절에서 계속해서 말씀합니다.
(5-6) 누구든지 그의 말씀을 지키는 자는 하나님의 사랑이 참으로 그 속에서 온전하게 되었나니 이로써 우리가 그의 안에 있는 줄을 아노라 그의 안에 산다고 하는 자는 그가 행하시는 대로 자기도 행할지니라
그리스도인인 우리는 죄에 대해서 넘어지고 또 그로 인해 실패감에 빠질 수도 있지만, 그 가운데서도 말씀을 지킬 수 있는 근거가 있습니다. 우리의 주관적인 상태와 상관없이, 하나님께서 십자가를 통해 행하신 사랑은,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지킬 수 있는 힘의 근원입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자신의 내적인 상태가 하나님의 사랑의 증거가 되지 않고,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지킴으로, 우리가 ‘그의 안에 있음’을 알게 해줍니다.
믿음의 대선배요 마지막 사도인 요한이 자녀 같은 교회에 이 편지를 쓰는 목적 중에 하나는, 죄를 범하지 않게 하려는 것입니다. 교회는 반복되는 죄로 인한 실패감의 문제를 가지고 있습니다. 사도요한은 이런 교회에 포기하지 않아야함에 대해 말하며,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화목제물로서 대신 하나님의 형벌을 받아, 대언자가 되심을 말씀합니다.
그러기에 그리스도인은 자신의 죄 된 상태에 근거하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 제물되심에 근거하여, 그의 말씀과 계명을 지키며 살아가야 합니다. 그럴 때 그 실천은 오히려 죄로 인한 실패감에 빠진 우리에게 더 큰 확신을 주며 우리가 하나님 안에 있음을 알게 만들어 줍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공의와 정의를 행하도록 부르셨습니다. 그리스도인인 우리가 죄에 대한 실패감 가운데서도 예수 그리스도께서 보여주신 믿음, 사랑, 순종, 겸손, 자기희생을 지켜나간다면, 그로인해 ‘우리가 그의 안에’있다는 더 큰 확신을 얻습니다. 오늘도 우리의 상태가 아닌, 말씀을 지킴으로 하나님 안에 있음을 누리는 하루되시길 소망합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죄로 인해 넘어진 저희를 사랑하셔서, 예수 그리스도로 대신 그 죄에 대한 심판을 감당하게 하시고 또한 우리가 범죄 가운데 있어도 하나님 앞에 대언자가 되어 주심을 감사드립니다. 우리가 늘 죄로 인해 실패하더라도, 우리의 상태와 자질과 상관없이 주님의 말씀을 지키며 우리가 주님 안에 있음을 알게 해주심을 감사합니다. 죄에 대한 실패감과 패배주의로 인해 무기력한 신앙 가운데 있는 주님의 사람들을 돌보아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묵상을 돕는 질문
1. 사도요한이 2장 1절에서 ‘나의 자녀들아’라고 부르는 그 맥락에 대해 생각해보고, 그것이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를 묵상해 봅시다.
2. 사도요한이 요한일서를 쓰는 목적 중에 하나가 무엇인지 생각해보고, 왜 그러한 목적을 가지는지 묵상해 봅시다.
3. 예수 그리스도께서 죄를 짓는 사람들의 대언자라는 말의 의미를 생각해보고, 그가 어떻게 의로우신 대언자 인지 묵상해 봅시다.
4. 예수 그리스도께서 ‘화목 제물’이시다는 말의 의미에 대해 생각해봅시다.
5. 죄로 인한 실패감 가운데 다시 우리가 하나님 안에 있다는 것을 확신하게 해주는 것은 무엇인지 생각해보고,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묵상해봅시다.
(작성 : 조광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