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요한복음 10:1-21
찬송가 569장 ‘선한 목자 되신 우리 주’

예수님께서 공생애 많은 표적을 행하셨지만 요한복음에는 일곱 개 표적만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표적을 읽고 듣는 자들에게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과 구원자이심’을 믿도록 하였습니다. 물론 표적만을 보고 믿으라는 취지로 요한복음이 기록된 것은 아닙니다.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이 복되도다’고 하신 주님의 말씀을 기록함으로 표적 자체가 목적이 되거나 표적만을 바라는 신앙이 바람직하지 않음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사도 요한은 요한복음에 ‘예수님의 7대 표적’을 기록함으로 ‘예수님이 전능하신 하나님이심’을 알리고 있다면 ‘예수님의 7대 선언’을 기록함으로 ‘예수님이 누구신가’를 알려주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의 7대 선언’ 중 셋째와 넷째가 있습니다. ‘예수님의 7대 선언’의 특징은 ‘나는 무엇이다’는 형식의 선언문입니다.
요한복음 9장 전반부에는 예수님의 7대 표적 중 여섯째, ‘날 때부터 맹인 된 사람을 치유하신 표적을 기록하고 있는데 이 표적으로 인해 사람들 사이에 분쟁이 발생하였습니다. 바리새인들을 포함한 어떤 사람들은 ‘예수는 하나님께로부터 온 자가 아니다’라는 입장이었고 어떤 사람들은 ‘죄인으로서 어떻게 이렇게 표적을 행하겠느냐’고 말하며 예수님을 지지하는 입장이었습니다. 특히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이 ‘날 때부터 맹인 된 사람’을 안식일에 치유한 일로 인해 화가 치민 상태였으며 그 맹인과 그 사람의 부모를 소환해서 심문을 하였습니다. 이 과정을 아신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의 완악함을 보시며 그들을 ‘영적 맹인’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본문은 맹인 치유 사건 이후에 예수님께서 자신이 누구신가를 ‘나는 무엇이다’의 형식으로 밝히고 있습니다. 동시에 영적 맹인인 바리새인들을 포함한 종교지도자들에 대해 예수님의 비유를 통해 ‘그들이 누구인가’를 알려주고 있습니다.

그의 음성을 아는 고로(1-6절)

1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문을 통하여 양의 우리에 들어가지 아니하고 다른 데로 넘어가는 자는 절도며 강도요 문으로 들어가는 이는 양의 목자라

‘내가 진실로 진실로 이르노니’에 해당하는 헬라어 성경 원문는 ‘아멘 아멘 레고’입니다. ‘아멘’은 ‘의지하다’ ‘믿다’의 뜻을 가진 히브리어 ‘아만’에서 파생된 단어로서 ‘진실로’, ‘참으로’, ‘온전하게’라는 뜻입니다. 기독교에서 이러한 전통을 이어받아 기도나 찬송시 ‘믿습니다’, ‘그렇게 되기를 원합니다’라는 뜻으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아멘’을 두 번씩이나 말씀하시면서 강조하신 것은 양과 도둑의 차이입니다. 양우리(sheepfold) 안으로 들어갈 때 문을 통해 들어가지 않고 다른 곳으로 넘어가는 자는 도둑이며 강도이고 문을 통해 들어가는 자는 ‘양의 목자’입니다. 여기서 도둑과 강도는 바리새인들을 포함한 종교지도자들을 가리킵니다.

3 문지기는 그를 위하여 문을 열고 양은 그의 음성을 듣나니 그가 자기 양의 이름을 각각 불러 인도하여 내느니라 4 자기 양을 다 내놓은 후에 앞서 가면 양들이 그의 음성을 아는 고로 따라오되 5 타인의 음성은 알지 못하는 고로 타인을 따르지 아니하고 도리어 도망하느니라 6 예수께서 이 비유로 그들에게 말씀하셨으나 그들은 그가 하신 말씀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니라

문지기가 우리(fold)의 문을 열 때는 양들이 주로 먹이활동을 할 때입니다. 밤 동안 우리(fold) 안에서 잠을 잤던 양들이 목자의 음성을 듣고 우리(fold) 밖으로 나갑니다. 목자들은 양의 이름을 불러 밖으로 이끕니다. 요즘 목축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가축에 꼬리표를 붙이지만, 고대사회에서 목자는 양과 함께 수십년 내지 평생을 지내면서 모든 양들의 이름을 각각 붙여주고 모든 양들을 구별해 냅니다. 마치 부모가 자식을 키우듯이 큰 애정을 가지고 있는 것이 바로 목자입니다. 목자만 그렇지 않습니다. 양도 자신을 기르는 목자의 음성을 압니다. 목장에 가서 소나 양 근처에 접근하려고 하면 가축들은 낯선 사람을 피하며 경계합니다. 가축들도 주인과 낯선 사람을 구별합니다. 오늘날과 달리 예수님 당시 목자들은 양과 오랜 시간을 함께 생활하였기에 양이 목자를 모를 리가 없었습니다. 양은 목자의 음성만 들어도 자신을 부르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양우리’의 비유를 듣던 사람들이 이를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영적 맹인이었던 사람들의 영적 무지함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답답한 심정으로 그들에게 ‘나는 양의 문이라’고 선언하시며 말씀을 이어가셨습니다.

나는 양의 문이라(7-10절)

7 그러므로 예수께서 다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나는 양의 문이라

예수님께서 한번더 ‘아멘 아멘 레고’라고 하시며 7대 선언 중 셋째, ‘나는 양의 문이라’고 선언하셨습니다. 이는 ‘양우리’는 ‘하나님의 집’이며, 하나님의 집으로 들어가는 유일한 문은 자신임을 알려주신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집으로 들어가는 유일한 구원자는 자신이라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이 천국의 문이심을 선언하셨습니다.

8 나보다 먼저 온 자는 다 절도요 강도니 양들이 듣지 아니하였느니라 9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받고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 10 도둑이 오는 것은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나보다 먼저 온 자’는 유대 종교지도자들을 가리킵니다. 이들은 도둑이며 강도이므로 양들이 그들의 목소리에 반응하지 않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리고 그들이 양들에게 온 목적은 양들을 아끼고 사랑하는 마음이 아니며 도둑질하고 죽이려는 것뿐입니다. 당시 바리새인들을 포함한 종교지도자들이 율법의 정신을 배제한 형식적인 율법으로 사람들을 가르쳤기에 그들을 보호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죽이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구원의 문으로 오셨습니다. 양 도둑과 반대로 죽이는 것이 아니라 살리러 오셨습니다. 양이 양우리로 들어가면 안전합니다. 또한 목자를 따라 ‘우리(fold)’ 밖으로 나가 꼴을 먹을 때 풍족함을 누립니다. 우리 역시 천국의 문이신 예수님을 따라 가면 풍족한 삶을 살아가며 구원을 받습니다. 다음은 7대 선언 중 넷째입니다.

나는 선한 목자라(11-18절)

11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

선한 목자는 양의 문과 다른 표현이지만 의미는 다르지 않습니다. 천국 문이신 예수님, 유일한 중보자이시고 구원자이신 예수님은 죄인들의 죄를 사해주시며 죄인들을 구원하시러 이 땅에 오셨습니다. 어떻게 구원하셨습니까? 자신의 목숨을 버리심으로 구원하셨습니다. 선한 목자는 단순히 착하고 성품이 좋은 목자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목자입니다. 아무리 양을 잘 기르는 목자라고 할지라도 양들을 위하여 자신의 목숨을 버리는 목자가 어디 있겠습니까? 그런데 오직 예수님께서 양이신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습니다. ‘버리거니와’의 원문은 능동형으로 되어 있습니다. 선한 목자이신 예수님께서는 자발적으로 우리의 죄를 대속하시기 위해 목숨을 버리셨습니다. 그렇다면 선한 목자가 아닌 사람은 어떻습니까?

12 삯꾼은 목자가 아니요 양도 제 양이 아니라 이리가 오는 것을 보면 양을 버리고 달아나나니 이리가 양을 물어 가고 또 헤치느니라 13 달아나는 것은 그가 삯꾼인 까닭에 양을 돌보지 아니함이나

삯꾼은 돈을 받고 일하는 고용인을 뜻합니다. 삯꾼이 양을 제대로 돌보지 않는 이유는 목자의 마음을 품지 않고 돈을 벌기 위한 수단으로 일하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리가 양을 잡아 먹으러 오면 쫓아내지 않고 도망갑니다. 흥미로운 점은 삯꾼은 이리가 오는 것을 보면 양을 버리고 달아난다고 합니다. 이리가 양에게 접근하기도 전에 멀리서 오는 것을 보고 자신의 신변만 생각하고 양을 버리고 도망갑니다. 삯꾼이 도망가는 이유는 양을 돌볼 마음이 원래부터 없었기 때문입니다. 돈을 위해 일하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삯꾼은 바리새인을 포함한 유대 종교지도자들을 가리킵니다. 오늘날 교회를 위하여 헌신한다고 하지만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일한다면 삯꾼입니다. 자기희생 없이 오직 일반 봉급자들처럼 일한다면 삯꾼입니다.

14 나는 선한 목자라 나는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15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

선한 목자이신 예수님께서는 재차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린다고 말씀하십니다. 선한 목자의 특징은 양을 안다는 것인데 여기서 주목할만한 점은 양도 선한 목자를 안다는 점입니다. 우리가 양인지 염소인지 또는 이리인지 아닌지를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을 선한 목자로 아는 사람은 양입니다. 예수님을 모르면 양이 아닌 염소나 늑대입니다. 예수님을 지식으로 알 수 없습니다. 율법에 조예가 있는 바리새인들은 선한 목자이신 예수님을 알지 못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나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신 선한 목자임을 알고 믿는 사람이 양입니다. 양은 목자의 음성을 압니다. 선한 목자이신 예수님께서 나의 이름을 부르실 때 그 부르시는 곳으로 가는 사람이 양입니다. 선한 목자의 음성이 머리에 기억된 사람이 양입니다. 성경 말씀으로 말씀하시는 주님의 말씀이 들릴 때 그 말씀대로 살아가는 사람이 선한 목자의 음성을 듣고 움직이는 양입니다. 성부 하나님과 성자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서로 앎으로 일체를 이루고 있듯이 선한 목자이신 예수님과 양인 성도가 서로 안다는 것은 연합을 이루고 있다는 뜻입니다. 서로 한 몸을 이루고 있는데 어찌 서로를 모를 수 있겠습니까?

16 또 이 우리에 들지 아니한 다른 양들이 내게 있어 내가 인도하여야 할 터이니 그들도 내 음성을 듣고 한 무리가 되어 한 목자에게 있으리라

선한 목자이신 예수님의 음성을 알아듣는 양들 중에 우리(fold)에 있지 않는 다른 양들도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다른 양들이란 이방인들 중 구원받을 자들을 가리켜 하신 말씀입니다. 다른 양들은 기존 우리(fold)에 있던 양들과 한 무리가 될 것임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선한 목자이신 예수님 안에서는 지역과 인종과 시대와 상관없이 한 공동체가 됩니다.

17 내가 내 목숨을 버리는 것은 그것을 내가 다시 얻기 위함이니 이로 말미암아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시느니라 18 이를 내게서 빼앗는 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버리노라 나는 버릴 권세도 있고 다시 얻을 권세도 있으니 이 계명은 내 아버지에게서 받았노라 하시니라

선한 목자이신 예수님께서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시는데 그 이유가 다시 얻기 위함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또한 이 일을 성부 하나님께서 사랑하신다고 하십니다. 다시 얻는 것은 목숨을 다시 얻는 것이며 예수님의 죽음 이후 부활을 뜻합니다. 선한 목자이신 예수님께서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시지만 다시 살아나심으로 죄의 권세와 죽음을 이기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자발적으로 목숨을 버릴 권세도, 그리고 그 목숨을 다시 얻을 권세도 있으십니다. 그러므로 죽은 양을 다시 살리실 수 있으십니다. 이 땅에 양으로서 죽은 모든 그리스도인은 주님께서 때가 되면 다시 살려주십니다.

분쟁이 일어나니(19-21절)

19 이 말씀으로 말미암아 유대인 중에 다시 분쟁이 일어나니 20 그 중에 많은 사람이 말하되 그가 귀신 들려 미쳤거늘 어찌하여 그 말을 듣느냐 하며 21 어떤 사람은 말하되 이 말은 귀신 들린 자의 말이 아니라 귀신이 맹인의 눈을 뜨게 할 수 있느냐 하더라

예수님께서 말씀을 마치시자 듣던 사람들 사이에 다시 분쟁이 일어났습니다. 이전에 있었던 분쟁처럼 예수님의 가르침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사람들과 그것을 받아들이는 사람들 사이에 분쟁이 일어났습니다. 자신이 이해하지 못하고 믿지 못하니 예수님을 미쳤다고 합니다. 이 시대에도 지식과 경험이 풍부해도 예수님의 가르침을 정신 나간 소리라고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대로 살아가는 사람들을 향하여 미쳤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그들이 양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양은 선한 목자의 음성을 듣습니다. 그러므로 양은 선한 목자의 음성을 듣고 양의 문으로 들어가 하나님의 집에 거합니다. 양은 선한 목자의 음성을 듣고 때를 따라 꼴을 먹으며 풍족한 삶을 누립니다. 물질적 풍족함이 아니더라도 주님 안에서 누리는 평안의 풍족함을 누립니다. 오늘 하루 ‘양의 문’이시고 ‘선한 목자’이신 주님의 말씀을 기억함으로 주님께서 주시는 말씀의 꼴을 먹으며 평안의 풍족함을 누리며 고난 중에 위로를 얻으며 살아가십시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양을 도둑질하고 죽이려는 이리가 있는 시대, 이리로부터 공격을 받을 때 양을 버리고 도망가는 삯꾼이 있는 시대에 예수님께서 ‘양의 문’과 ‘선한 목자’가 되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어떤 고난 속에서도 예수님께서 ‘양의 문’과 ‘선한 목자’라는 말씀을 기억함으로 위로를 받게 하시옵소서. 선한 목자의 음성을 듣고 인도함을 받아 꼴을 먹으며 보호와 풍족함을 누리는 양처럼 저희 역시 주님의 말씀을 듣고 인도함을 받아 말씀의 꼴을 먹으며 주님의 보호와 풍족함을 누리는 오늘 하루가 되게 하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묵상을 위한 질문
1. 목자와 달리 도둑과 강도의 특징은 무엇입니까? 이들은 누구를 가리킵니까?
2. 양의 문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3. 선한 목자의 특징은 무엇입니까?
4. 양의 특징은 무엇입니까? 목자의 음성을 어떻게 하면 잊지 않을 수 있습니까?
5. 예수님의 가르침을 듣고 유대인 중에 분쟁이 일어났는데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작성: 김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