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누가복음 24:13-35
찬송가 453장 ‘예수 더 알기 원하네’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에게 나타나신 그리스도(13-27절)
오늘 본문은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와 함께하시며, 그들에게 들려주신 말씀에 대해서 증거합니다. 오늘의 본문은 마가복음에는 딱 2절, 아주 간략하게 나타나 있지만, 누가는 23절이나 되는 말씀을 통해서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좌절과 절망, 슬픔으로 엠마오를 향해 가던 두 제자에게 나타나셔서 그들에게 다시 믿음과 소망을 부어 주신 사건을 아주 감동적으로 증거하고 있습니다.
(13-14) 그 날에 그들 중 둘이 예루살렘에서 이십오 리 되는 엠마오라 하는 마을로 가면서 이 모든 된 일을 서로 이야기하더라

‘그 날’은 바로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날’입니다. 무덤을 찾았던 여인들이 제자들에게 가서 말하길, “무덤 속에는 예수님의 시신이 없었고, 천사로부터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말을 들었다”라고 했습니다. 그럼에도 제자 중에 두 사람은 실의에 잠겨 엠마오를 향하고 있었습니다. 그곳은 예루살렘에서 25리 정도 떨어진 곳에 있는 마을이라고 증언합니다.
‘25리이면’ 10km입니다. 새번역성경과 공동번역성서에서는 ‘30리’라고 합니다. 그러면 12km입니다. 영어 성경에는 7마일(11.3km)이라고 합니다. 헬라어 성경엔 ‘60 스타디온(Stadion)’이라고 합니다. 1스타디온은 로마 시대에 육상경기할 때의 거리인데, 약 ‘185m’입니다. 이 스타디온에서 경기장을 뜻하는 영어단어 ‘스타디움(stadium)’이 나왔습니다. 그래서 60스타디온은 약 ‘11.1km’입니다.
엠마오가 예루살렘에서 그 정도의 위치에 있었던 마을이지만, 오늘날 어디에 해당하는지 정확하게 고증된 자료는 없습니다.
이 두 제자는 엠마오로 향해 가면서 ‘이 모든 된 일’ 즉, 예루살렘에서 일어난 예수님의 일에 대해서 나누었습니다. 예수님의 고난당하심과 죽음, 그리고 빈 무덤에 관해서 이야기를 나누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반복해서 말씀하신 부활에 관한 것이나 그 부활이 구약성경을 성취한 것이라는 내용은 없었을 것입니다.
14절은 “이 모든 된 일을 서로 이야기하더라”라고 되어있지만, 헬라어 성경에서 강조하는 단어인 ‘그들이’는 번역에서 빠져 있습니다. 즉 두 제자가 10km가 넘는 긴 거리를 함께 가며 서로 예수님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었지만, 정말 중요한 부활에 관한 예수님의 말씀과 그 부활이 구약성경을 성취한 것이라는 것을 ‘그들은’ 빼고 이야기하더라는 것입니다. 즉 그들의 대화는 ‘앙꼬없는 찐빵 같은 이야기’만 계속했다는 것입니다.

그 두 제자가 지난 3일 동안 있었던 일 중에서 중요한 내용은 빼고서, 의미 없는 내용을 이야기하며 걷고 있을 때, 동행하시는 분이 계셨습니다.
(15-16) 그들이 서로 이야기하며 문의할 때에 예수께서 가까이 이르러 그들과 동행하시나 그들의 눈이 가리어져서 그인 줄 알아보지 못하거늘

예수님께서는 그들 곁에서 함께 걸으셨지만, 그들은 전혀 인식하지 못했습니다. ‘문의하다’는 ‘이야기를 주고받다’라는 뜻도 있지만, ‘격렬하게 토론하다’라는 뜻도 있습니다. 두 제자는 음성을 낮추어서, 또 음성을 높여서 예수님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자신들의 이야기에 정신이 팔려서, 그 이야기의 주인공이 곁에 계심에도 인식하지 못했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먼저 입을 여셨습니다.
(17)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길 가면서 서로 주고받고 하는 이야기가 무엇이냐 하시니 두 사람이 슬픈 빛을 띠고 머물러 서더라

예수님께서 그들의 대화의 내용을 몰라서 물으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너희들은 이런 이야기를 나누며 좌절하고 있지 않아도 된다”라고 말씀하시는 것이었습니다. 그럼에도 그들은 ‘슬픈 빛’을 띠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스승을 잃은 슬픔에 짓눌려서 도무지 헤어 나오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무것도 모르는 척 시치미를 떼며, 무슨 일인지를 물었습니다. 그러자 글로바라는 제자는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 소식은 예루살렘에 있는 사람들에게 충격과 놀람을 금치 못하게 하는 사건이었는데, 자기 옆에 있는 사람이 아무것도 모른다는 사실에 놀라며 말했습니다. 자신들이 생각했던 예수님은 아주 능력이 있는 선지자였는데. 그분이 십자가에 죽으신 일과 삼일 만에 여인들이 무덤에 갔다가 예수님의 시신은 보지 못하고 천사들로부터 예수님이 살아났다는 말을 들었다고 전해주었다는 것을 말했습니다. ‘글로바’라는 이름은 여기에만 나오기 때문에 누구인지 정확하게 알지 못합니다. 학자들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실 때, 그 광경을 지켜보았던 사람 중에 ‘작은 야고보와 요세의 어머니 마리아’가 있었는데, 그 사람의 남편, 작은 야고보와 요세의 아버지일 것으로 추정하지만 명확하지 않습니다. 누가복음을 처음 읽는 사람들에게는 낯선 이름이 아니었기 때문에 다른 설명을 하지 않고 이름만 기록했을 것입니다. 이 두 제자는 글로바와 그의 아내인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두 제자의 말은 이렇게 이어집니다.
(22-24) 또한 우리 중에 어떤 여자들이 우리로 놀라게 하였으니 이는 그들이 새벽에 무덤에 갔다가 그의 시체는 보지 못하고 와서 그가 살아나셨다 하는 천사들의 나타남을 보았다 함이라 또 우리와 함께 한 자 중에 두어 사람이 무덤에 가 과연 여자들이 말한 바와 같음을 보았으나 예수는 보지 못하였느니라 하거늘

어제 본문에서 살폈듯이, 안식 후 첫날 새벽에 막달라 마리아와 요안나, 야고보의 모친 마리아를 포함한 여러 여인이 향품을 가지고서 무덤을 찾았다가 두 천사로부터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말을 듣고, 제자들에게 그 소식을 알렸습니다. 그 소식을 듣자마자 베드로는 무덤으로 달려가서 확인해 보았더니 세마포만 보였습니다. 요한복음에 의하면, 요한이 뒤따라 나셨는데 요한이 베드로보다 더 젊었기 때문에 더 빨리 무덤에 도착해서 세마포만 있는 것을 확인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드로와 요한을 위시한 제자들은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못했습니다. 요한복음 20장에 보면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두 번이나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습니다. 그들은 아주 기뻐했습니다. 그렇다면 그들은 그 이후에는 곧바로 부활하신 주님을 위해 자신들의 삶을 헌신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선택한 것은 갈릴리로 돌아가서 생업에 종사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밤새도록 한 마리도 잡지 못했습니다. 제자들은 신앙이 견고해진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본래 하던 일을 잘하는 것도 아닌 굉장히 어정쩡한 상태가 되었습니다.

제자들의 모습이 왜 이렇게 되었는지 그 이유를 생각하게 해 주는 말씀이 21절 상반절입니다.
(21) 우리는 이 사람이 이스라엘을 속량할 자라고 바랐노라

제자들은 예수님을 3년 동안이나 따라다녔음에도, 세상 도시적 가치관을 가지고서 눈에 보이는 하나님의 나라를 꿈꾸고, 예수님께서 세상적인 힘을 가진 구세주가 되실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처럼 자기 생각에 사로잡혀 있는 제자들을 향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25-27) 이르시되 미련하고 선지자들이 말한 모든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이여 그리스도가 이런 고난을 받고 자기의 영광에 들어가야 할 것이 아니냐 하시고 이에 모세와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 바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시니라

예수님께서는 왜 가르쳐준 말씀을 수용하지 않고 자기 생각에 사로잡혀 있느냐며, 하나님의 나라와 메시아에 대해서 오해하고 있는 제자들에게 구약성경을 예로 들어서 설명해 주셨습니다. ‘미련하다’라는 단어는 ‘생각하지 않다’, ‘이해하지 않다’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통해서 이스라엘을 비롯한 온 세상에 복음을 전할 통로로 삼으려고 하시는데, 제자들은 여전히 예수님이 이스라엘을 구원할 분으로만 생각하고 있는 것에 대해서 미련하다고 하는 것입니다.

엠마오에서 식사 중에 나타나신 그리스도(28-35절)
마침내 예수님과 두 제자는 엠마오에 당도했습니다.
(28-29) 그들이 가는 마을에 가까이 가매 예수는 더 가려 하는 것 같이 하시니 그들이 강권하여 이르되 우리와 함께 유하사이다 때가 저물어가고 날이 이미 기울었나이다 하니 이에 그들과 함께 유하러 들어가시니라

예수님께서는 어디론가 더 가려고 하셨습니다. 그때 제자들은 함께 머물기를 간청했습니다. ‘강권하다’는 단어는 ‘힘을 사용해서 상대의 의사를 꺾는 행위’를 말합니다. 좀 풀어서 설명해 드리면 상대방이 내켜 하든지 그렇지 않든지 간에 상대의 팔을 잡고 자기의 집으로 끌고 가는 것입니다.
초면의 사람을-사실은 초면이 아니지만, 제자들의 의식으로는 초면이다- 그토록 강하게 권해서 자기 집으로 데려가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닙니다. 제가 서울역에서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했는데, 그중에 한 명이 예수님을 믿기로 했다고 가정해 보십시다. 그렇다고 그분이 제게 “내가 사는 집이 가까운 데 있는데, 가서 식사하고 가십시오.”라고 권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또 그분이 그렇게 제안했을 때, 제가 “미안합니다. 저는 지금 가야 할 곳이 있습니다”라고 말했음에도 불구하고 거의 반강제적일 정도로 요청해서 “제발 밥만 먹고 가 주십시오.”라고 하지 않을 것입니다. 만약 그분이 정말 그렇게 한다면, 그분이 복음을 들으면서 마음에 뭔가 특별한 일이 있었을 것입니다. 무엇인가가 상대방에게 강하게 끌리는 것이 있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과 함께 집으로 가셔서 식사를 나누었습니다.
(30) 그들과 함께 음식 잡수실 때에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그들에게 주시니

두 제자는 예수님과 음식을 먹을 때까지 계속 마음에 뭔가 솟구치는 것이 있었지만, 그것이 무엇인지는 몰랐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기도하시고 빵을 떼어 주실 때 지난 시간의 일들이 한 줄로 정리가 되었습니다. 그 장면은 바로 며칠 전에,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마지막 만찬을 가질 때 하셨던 것이었습니다.
(31) 그들의 눈이 밝아져 그인 줄 알아 보더니 예수는 그들에게 보이지 아니하시는지라

마침내 두 제자는 빵을 떼어 주시는 분이 바로 예수님인 줄 알았습니다. 그때 먹은 식사는 단순한 빵이 아니었습니다. 그 빵은 그들의 눈을 열어주는 매개체였습니다.

두 제자가 빵을 받을 때 눈이 밝아졌는데, 그 일 이전에 아주 중요한 일이 있었음을 전해줍니다.
(32) 그들이 서로 말하되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 주실 때에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 하고

두 제자는 자신들과 대화를 나누던 분이 부활하신 예수님이심을 알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간청해서 자신들과 함께 밤을 지내기를 원했는지 그 이유가 이것이었습니다. 그들은 주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그들 속에 아주 강한 변화가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모세와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바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해 주셨었습니다. 그 말씀이 그들의 속을 뜨겁게 했던 것이었습니다.

두 제자는 주님을 통해서 그들의 마음이 열리고 깨달음이 오자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인식하게 되었습니다.
(33-35) 곧 그 때로 일어나 예루살렘에 돌아가 보니 열한 제자 및 그들과 함께 한 자들이 모여 있어 말하기를 주께서 과연 살아나시고 시몬에게 보이셨다 하는지라 두 사람도 길에서 된 일과 예수께서 떡을 떼심으로 자기들에게 알려지신 것을 말하더라

두 제자는 지체하지 않고 예루살렘으로 되돌아갔습니다. 그들이 엠마오에 도착한 것은 날이 저물어가는 저녁 무렵이었습니다. 그 후에 예수님과 식사를 나누었습니다. 그렇다면 그들이 예루살렘으로 돌아간 때는 칠흑같이 어두운 깊은 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아침까지 기다릴 수가 없었습니다. 그들 속에 있는 뜨거움을 제자들과 나누고 싶은 열망이 가득했습니다. 그래서 다시 예루살렘으로 향했습니다. 예루살렘은 엠마오에서 11-12km나 떨어져 있었지만,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예루살렘에서 엠마오로 올 때는 한낮이었지만 그들의 삶에는 어두움이 가득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캄캄한 밤입니다. 그러나 그들 속에는 빛이 가득했습니다. 그 모든 것은 주님께서 그들에게 성경을 풀어서 자세히 일러주시고, 주님과 함께 성찬의 교제를 나누고 난 이후에 일어난 일이었습니다.

이 말씀을 준비하는 동안 끊이지 않고 제 속에서 중고등학교 시절에 참 많이 불렀던 찬양, ‘엠마오 마을로 가는 두 제자’가 흘러 나왔습니다. “엠마오 마을로 가는 두 제자, 절망과 공포에 잠겨 있을 때...”로 시작하는 노래입니다.
이 찬양의 2절 가사가 이러합니다. “이 세상 사는 길 엠마오의 길, 끝없는 슬픔이 앞길을 막으나, 주 예수 우리들에게 나타나시사, 새 소망 주심을 믿사옵니다”
그렇습니다. 이 세상 사는 길은 ‘엠마오로 가는 길’과 같습니다. 세상은 우리를 도시적 가치관에 함몰되게 하고, 영원히 우리의 고개를 들지 못하게 하는 곳으로 데리고 가려 합니다. 하지만 그 길에 주님이 함께 계십니다. 그 주님께서 우리에게도 말씀을 통해서 우리에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우리가 우리의 힘이신 주님과 주님의 말씀에 집중하면, 우리는 고개를 들고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을 소망하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 오늘도 그 은총 속에 살아가시는 한 날이 되시길 축복합니다.


기 도
하나님 아버지!
예루살렘에서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 글로바와 또 한 사람은 예루살렘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알고 있었지만, 슬픈 빛을 띨 수밖에 없었습니다. 자신들과 동행했던 부활하신 주님을 보지 못했기 때문이고, 주님께서 말씀하신 것을 기억하지 못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길이 예루살렘에서 엠마오로 가는 것과 다르지 않음을 고백합니다. 우리의 인생길에서 부활하신 주님을 목적 삼지 않는다면 또 주님의 말씀을 기억하지 못한다면, 우리도 슬픈 빛을 띨 수밖에 없음을 고백합니다.
두 제자가 주님과 더불어 식탁의 자리에서 눈이 밝아지게 되었고, 이전에 주님의 말씀을 들을 때 가슴이 뜨거웠음을 기억했으며, 밤길을 마다하지 않고 예루살렘으로 되돌아가 부활하신 주님을 전했습니다.
우리의 삶이 주님과 더불어 먹고 마시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래서 우리의 영안이 지금보다 더 밝아지게 하시고, 주님의 말씀을 기억함으로 도시적 가치관을 이기고,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을 소망하게 하여 주옵소서. 오늘 하루도 엠마오로 가는 우리 인생길에서 주님과 눈을 맞추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묵상을 돕는 질문
1.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는 슬픈 빛을 띠고 있었습니다. 당신의 인생길에서 슬픈 빛을 띠었던 때는 언제였습니까? 그리고 그 이유는 무엇이었습니까?
2. 두 제자는 주님과 함께 가진 식탁에서 주님께서 축사하시고 떼어 주신 그 빵을 받고서 눈이 밝아졌습니다. 당신의 영안은 어떻게 열리게 되었습니까?
3. 두 제자는 주님께서 성경을 풀어주실 때 그 마음속에서 뜨거움이 있었습니다. 당신의 신앙생활에서 주님의 말씀으로 인해서 마음이 뜨거웠던 때는 언제였습니까? 그리고 지금은 주님의 말씀이 당신에게 어떻게 다가옵니까?
4. 당신의 인생길에서 슬픈 빛을 띠지 않고 소망 가운데 살며, 여호와 하나님을 나의 힘으로 삼기 위하여 무엇을 결단하시겠습니까?


(작성 : 정한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