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누가복음 23:13-25
찬송가 250장 ‘구주의 십자가 보혈로’


부러진 화살 이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실화를 바탕으로 재구성한 영화입니다. 대학 입시시험에 출제된 수학문제 오류를 지적한 뒤 부당하게 해고된 한 교수가 교수지위 확인소송에 패소하고 항소심마저 정당한 사유 없이 기각되자, 담당판사를 찾아가 공정한 재판을 요구하며 석궁으로 위협을 합니다. 사법부는 이 교수의 행위를 법치주의에 대한 도전이자 ‘테러’로 규정하며 피의자를 엄중 처벌하겠다는 입장을 발표합니다. 그러나 피고인은 결정적 증거물인 부러진 화살이 사라진 것을 두고 증거 불충분을 주장하며 변호사와 함께 맞서 싸운다는 스토리입니다. 영화가 너무 피해자의 입장만을 대변하는 것이라는 비판을 많이 받았지만, 그럼에도 우리 사법부에서 얼마나 공정한 재판이 이루어지고 있는지 한 번쯤 생각해보게 되는 영화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가장 공정하고 정의로워야 하는 재판정이 가끔은 판사의 잘못된 판결로 인해 억울한 일들이 있었음을 우리는 역사를 통해 보게 됩니다.

오늘 본문은 역사상 가장 심각하고 잘못된 판결이라고 할 수 있는 예수님에 대한 빌라도의 재판을 다루고 있습니다. 이천년 전의 시대 상황에서 있었던 재판을 오늘날과 같은 사법 체계와 비교하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빌라도는 역사에 남을 만한 잘못된 재판으로 지금까지도 혹독한 비판을 받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빌라도의 모습에서 우리의 모습이 있지는 않은지 돌아보게 되며, 이 모든 과정에서 또한 하나님의 섭리를 발견하게 됩니다. 헤롯에게서 예수님을 돌려받은 빌라도는 원고 측 사람들만 불러 모으고 재판을 시작합니다.


빌라도의 재 심문(13-16)

(13-14) 빌라도가 대제사장들과 관리들과 백성을 불러 모으고 이르되 너희가 이 사람이 백성을 미혹하는 자라 하여 내게 끌고 왔도다 보라 내가 너희 앞에서 심문하였으되 너희가 고발하는 일에 대하여 이 사람에게서 죄를 찾지 못하였고

예수님을 인수한 빌라도는 무죄 판결을 내리려고 했습니다. 유대교 입장에서 예수님의 죄명은 신성모독과 백성을 선동한 것이었지만, 로마 총독의 입장에서는 예수님에게서 죄를 찾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심문한 것 외에도 헤롯의 예를 듭니다.

(15) 헤롯이 또한 그렇게 하여 그를 우리에게 도로 보내었도다 보라 그가 행한 일에는 죽일 일이 없느니라

빌라도는 유대 관습을 잘 아는 헤롯에게로 예수님을 보내서 재판하게 했으나 헤롯 역시 예수님이 유대법에도 저촉되는 죄가 없음으로 판단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빌라도는 예수님에게서 죽일 죄가 없다, 즉 사형에 해당하지 않다는 것을 직접 이야기합니다. 하지만 유대 지도자들과 백성들의 원성을 두려워한 나머지 빌라도는 타협점을 생각해 냅니다.

(16) 그러므로 때려서 놓겠노라

유대 역사가 요세푸스에 의하면 예수님 이후에 자칭 선지자라고 하는 아나니아스라는 사람에게 내려졌던 형벌이 채찍형이었다고 합니다. 그는 예루살렘 성과 성소와 백성을 비난했으며, 그것이 장차 멸망할 것이라고 경고했습니다. 성난 지도자들은 그를 잡아서 로마 총독 알비누스 앞에 데려갔으며, 그는 뼈가 드러날 때까지 채찍으로 맞았는데도 계속해서 예루살렘에 대한 화를 선언했습니다. 알비누스는 그를 미친 사람이라고 여기고 풀어주어서 유대인 지도자들을 화나게 했다고 합니다. 빌라도 역시 이 사례와 비슷하게 예수님을 풀어주되 백성들을 조금이나마 안심시키기 위해 때려서 놓겠다는 말을 합니다.

이어지는 17절은 한글 개역 성경에는 ‘없음’으로 표기되었지만 몇몇 사본에는 “명절을 당하면 반드시 한 사람을 놓아주더라”는 기록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에는 비슷한 내용이 들어가 있습니다. 문맥상 이 내용이 포함되면 좀 더 자연스럽지만, 없어도 해석에 큰 지장은 없습니다. 빌라도는 예수님을 풀어주고자 했지만, 무리가 소리를 지르며 요구합니다.


예수님에 대한 사형 선고(18-25)

(18) 무리가 일제히 소리 질러 이르되 이 사람을 없이하고 바라바를 우리에게 놓아 주소서 하니

바랍바스는 아람어 바르와 압바의 합성어입니다. ‘바르’는 아들이라는 뜻이고, ‘압바’는 아버지입니다. 즉 바라바는 아버지의 아들이라는 뜻입니다. 모든 인류는 누군가의 아들과 딸 곧, 아버지의 자녀입니다. 이런 중의적인 의미가 그 이름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주님은 바라바 대신 십자가에 못 박히셨지만, 모든 인류, 곧 모든 사람을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입니다. 예수님 대신 풀려나게 될 바라바에 대해 설명합니다.

(19) 이 바라바는 성중에서 일어난 민란과 살인으로 말미암아 옥에 갇힌 자러라

바라바는 민란과 살인을 저질러 로마제국에 피해를 입힌 자로 그 형벌이 최고형인 사형에 해당한 사람이었습니다. 마태복음에는 그를 “유명한 죄수”라고 부르며, 마가복음에서는 “민란을 꾸미고 이 민란에 살인하고 포박된 자 중에 한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요한복음에서는 “강도” 또는 “약탈자”라고 부릅니다.

일부 학자들의 견해에 따르면 바라바는 열심당원의 지도자로 국가의 독립을 위해 투쟁하며 로마 군대에 피해를 입혔을 것으로 추정하기도 합니다. 반면 사독 계열의 친 로마 성격을 가진 제사장들이 정치적인 죄수를 풀어달라고 하기에는 무리가 있었을 것으로 보고 그를 일반적인 살인과 약탈을 한 범죄자로 보기도 합니다. 그의 행적을 성경은 자세히 밝히고 있지 않지만, 분노한 무리는 사형에 해당하는 죄인을 죄 없으신 예수님 대신 풀어주라고 강하게 요청하고 있는 것입니다.

(20-21) 빌라도는 예수를 놓고자 하여 다시 그들에게 말하되 그들은 소리 질러 이르되 그를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하는지라

율법을 잘 알고 있었던 대제사장과 서기관들은 신명기 21장 23절 말씀이 예수님께 이루어지기를 원했던 것 같습니다. 예수님을 나무에 달리게 하여 하나님의 저주 받은 자로 낙인찍기 위함입니다. 인간의 분노와 잘못된 욕망이 무죄한 예수님을 죽음으로 몰아가고 있습니다. 아직까지 빌라도는 자신의 소신을 굽히지 않고 자신이 제시한 타협안을 거듭 주장합니다.

(22) 빌라도가 세 번째 말하되 이 사람이 무슨 악한 일을 하였느냐 나는 그에게서 죽일 죄를 찾지 못하였나니 때려서 놓으리라 하니

빌라도가 세 번씩이나 반복해서 말한 내용, 즉 예수님은 죄가 없다는 이 대목은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에 있어서 핵심이 되는 부분입니다. 곧 구약 제사 때 흠 없는 제물을 가지고 제사해야 백성의 죄가 사함을 얻었듯이 죄 없는 그리스도만이 인류의 죄를 대신 속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와 똑같은 희로애락을 느끼신 인간 예수님이시지만, 죄가 없으셨기에 십자가 대속 사건을 완성하실 수 있으셨습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백성들의 끝없는 분노의 요구는 나약한 재판장을 무너뜨립니다.

(23) 그들이 큰 소리로 재촉하여 십자가에 못 박기를 구하니 그들의 소리가 이긴지라

이런 악한 모습을 보였던 무리는 이후 사도행전의 제자들이 전한 부활의 복음 앞에서 스스로 직면하게 됩니다. 사도행전 2장 23절에 “그가 하나님께서 정하신 뜻과 미리 아신 대로 내준 바 되었거늘 너희가 법 없는 자들의 손을 빌려 못 박아 죽였으나” 라고 기록합니다. 그들은 직접적인 가해자였습니다. 그러나 로마서 3장 23절에는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했다고 증언합니다. 유대 지도자들과 빌라도와 함께 백성은 예수님의 죽음에 대해 죄 있는 모든 인류의 축소판입니다. 우리는 그들을 바라보며 우리 자신을 보게 됩니다. 이어서 빌라도가 최종 사형 선고를 내립니다.

(24-25) 이에 빌라도가 그들이 구하는 대로 하기를 언도하고 그들이 요구하는 자 곧 민란과 살인으로 말미암아 옥에 갇힌 자를 놓아 주고 예수는 넘겨 주어 그들의 뜻대로 하게 하니라

요한복음에서는 대제사장과 지도자들이 빌라도를 향해 가이사에게 고소할 것이라고 위협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에 빌라도는 위기감을 느꼈을 것입니다. 요세푸스에 의하면 빌라도가 유대지역에서 두 가지 실수를 저질러서 백성들에게 책잡힌 것이 있다고 기록합니다. 한 번 더 실정하게 되면 그 지역의 백성들이 로마의 가이사에게 탄원을 하게 되고 빌라도는 자리를 잃게 될 위기에 처했다는 것입니다. 빌라도는 이렇게 비겁하게 자신의 이익을 위해 진리를 저버린 사람으로 기억되고 있습니다.

우리 역시 삶 속에서 진리의 편에 서고 있는지, 아니면 세상의 가치관과 자기만족과 이익을 위해서 적당히 타협하는 삶을 살고 있지는 않은지 말씀 앞에서 늘 자신을 돌아보아야겠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진리이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진리입니다. 진리 편에 서지 못하면 어느새 우리는 비 진리에 편승하고 이 세상 가치관에 휩쓸리게 될 것이며, 하나님의 크고 작은 심판과 징계를 경험한 후에 깨닫게 될 것입니다.

결국 예수님이 십자가 사형 선고를 받게 되었지만, 그러나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이루어지고 있음을 우리는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며, 하나님의 오묘하신 계획을 깨닫게 됩니다. 빌라도의 공의롭지 못한 재판으로 주님이 십자가를 지셨지만, 그 십자가는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의 결과물이었습니다. 죄의 삯은 사망이기에 우리는 모두 죽어야 마땅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공의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를 벌하시기를 원치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딜레마를 하나님은 그의 지혜로우신 방법으로 해결하셨습니다.

복음을 나눌 때에 사용하는 한 예화가 있습니다. 18세기 러시아에 가르시아라고 하는 장군이 있었습니다. 추운 겨울 전쟁 중에 부대원들과 가족들이 함께 이동을 하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부관이 찾아와서 장군에게 보고합니다. 누군가 식량을 훔쳐가서 조금씩 사라진다는 것입니다. 장군은 부대원들과 가족들 모두를 소집하여 경고합니다. 누구든지 식량을 훔치다가 적발되면 엄한 채찍 형에 가할 것이라고.

며칠 후 부관이 다시 찾아와서 보고합니다. “장군, 좋은 소식과 나쁜 소식이 있습니다.” 좋은 소식은 식량을 훔친 범인이 잡혔다는 것이고, 나쁜 소식은 그 범인이 장군의 어머니라는 것입니다. 장군은 근심과 고민에 빠졌습니다. 어머니를 풀어주자니 자신이 한 말을 지키지 못해 신의를 잃어버리게 되고, 어머니에게 채찍 형을 가하자니 연약하신 어머니가 채찍을 맞고 돌아가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며칠을 고민하다 드디어 형을 집행하는 날이 되었습니다. 어머니가 채찍 맞는 곳에 붙잡혀 있었습니다. 채찍을 막 내리치려고 하는 순간에 장군이 소리쳤습니다. “형을 중지하라!” 그리고 그 단에 올라가서 이야기합니다. “어머니 대신 나를 쳐라!”

장군은 자신이 한 말대로 실행하여 신의를 지킬 수 있었고, 대신 채찍에 맞음으로 어머니에 대한 사랑을 보여 주었던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도 이와 같을 것입니다. 공의로우신 하나님은 우리 죄에 대한 벌을 내리셔야 합니다. 그러나 사랑의 하나님은 죄인인 우리가 벌을 받기를 원치 않으십니다. 그래서 대신 아들을 보내셔서 우리 대신 십자가에서 죽게 하셨습니다. 주님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구원의 길이 열리고, 우리의 모든 죄가 용서받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에 대해 헤롯에게 책임을 돌릴 수 있습니다. 또한 빌라도에게 책임을 돌릴 수도 있습니다. 유대 군중에게, 대제사장과 관원들에게 책임을 돌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히게 한 장본인은 바로 우리와 나 자신입니다. 우리 모두는 용서받은 죄인입니다. 오늘도 우리 대신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를 묵상하며 감사와 찬양을 올려드려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그 십자가 은혜를 이제는 누군가에게 나누고 증거하는 복음의 일꾼들이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사 53:6)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갈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감당시키셨도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오늘도 주님의 십자가 은혜를 말씀으로 깨닫게 하시니 감사드립니다. 빌라도와 같이 진리의 편에 서지 못하고 자신의 이익을 위해 타협하는 모습이 아닌 거룩한 희생으로 진리를 지켜갈 수 있는 우리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대제사장도, 백성의 무리도, 로마 군인들도, 빌라도도 아닌, 바로 내가, 우리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장본인이라는 것을 늘 기억하게 하시고, 감사의 고백과 찬양을 끝 날까지 올려드릴 수 있는 주님의 제자들이 되게 해 주시옵소서.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의 결과인 십자가를 날마다 묵상하며 우리 마음에 깊이 새기며 또한 그 은혜를 증거하는 삶이 되게 해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묵상을 돕는 질문
1. 백성의 무리는 분노와 욕망에 사로잡혔습니다. 때로 분노와 욕망에 사로잡혀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는 모습을 보일 때는 없었는지 돌아보고 회개의 기도를 드리십시다.
2. 빌라도는 자신의 이익을 위해 진리의 편에 서지 않고 타협과 불의를 선택했습니다. 나의 삶에 진리 편에 서지 못하는 모습이 있지는 않은지 돌아봅시다.
3.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의 결과물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다. 나는 하나님의 공의 앞에 직면한 적이 있으며, 주님의 사랑 앞에 감격하여 감사와 찬양의 삶을 살고 있습니까?
4. 하나님을 나의 힘과 목적으로 삼고 주님의 십자가를 증거하며 살기 위해 오늘 결단해야 할 것은 무엇입니까?


(작성: 최정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