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누가복음 21:1-9
찬송가 213장 ‘나의 생명 드리니’

누가복음 20장 말미에 예수님께서 서기관들의 외식과 그들의 심판을 말씀하셨습니다. 이때에 예수님께서는 서기관들의 악행을 언급하셨는데 그들이 과부의 가산을 삼키는 일이었습니다. 남성 중심의 고대 사회에서 과부는 부유하게 살아갈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사회에서 경제 활동으로 부를 획득하기 어려웠기에 대부분 가난하게 살아갔습니다. 서기관들로부터 착취를 당하며 살아갔던 과부들 중 한 사람이 헌금하는 것을 예수님께서 보셨습니다.

두 렙돈 넣은 것을 보시고(1-4절)

1 예수께서 눈을 들어 부자들이 헌금함에 헌금 넣는 것을 보시고 2 또 어떤 가난한 과부가 두 렙돈 넣는 것을 보시고

예수님께서 서기관들을 삼가라고 말씀하실 때 성전에 계셨습니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헌금함에 헌금 넣는 사람들을 보게 되셨습니다. 성전 내에 헌금함은 ‘여인의 뜰’에 있었습니다. ‘여인의 뜰’은 ‘이방인의 뜰’에 비해 성소 앞 제단에 훨씬 가까운 위치에 있었습니다. 당시 헌금함은 총 13개가 있었는데 9개는 성전세와 희생제물을 바치는 헌금함이었고 4개는 성전의 보수와 장식을 위한 헌금함이었습니다. 여기에는 의무적인 헌금을 위한 헌금함이 있었고 자발적인 헌금을 위한 헌금함이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여러 사람의 헌금하는 모습을 보셨습니다. 그들 중에 부자들과 가난한 한 과부가 있었습니다. 당시 헌금하는 사람은 헌금함을 관리하는 제사장에게 헌금의 종류와 헌금액을 알렸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헌금함을 관리하는 제사장과는 달리 신적인 능력으로 사람들의 헌금액을 아셨습니다. 우리 교회는 예배중 헌금통을 돌리지 않고 예배당 입구에 있는 헌금함에 헌금을 넣습니다. 헌금을 넣은 봉투를 헌금함에 넣기에 혹여나 누가 헌금하는 모습을 보더라도 그 금액을 알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주님은 우리가 헌금할 때에 우리가 얼마를 넣는지를 아십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헌금하는 모습을 보실 때에 무슨 말씀을 하시겠습니까? 예수님께서는 부자들과 한 가난한 과부의 헌금하는 것을 보시고 말씀하셨습니다.

3 이르시되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이 가난한 과부가 다른 모든 사람보다 많이 넣었도다 4 저들은 그 풍족한 중에서 헌금을 넣었거니와 이 과부는 그 가난한 중에서 자기가 가지고 있는 생활비 전부를 넣었느니라 하시니라

두 렙돈은 오늘날 우리나라 500원 동전 두 개 정도의 적은 금액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가난한 과부가 다른 모든 사람보다 많이 넣었다고 평가해 주셨습니다. 그 이유는 가난한 중에 자기가 가지고 있는 생활비 전부를 넣었기 때문입니다. 부자들은 풍족한 중의 일부를 넣었습니다. 말 그대로 많은 소유 중의 일부일 뿐입니다. 부자가 그 돈을 헌금으로 넣든 다른 용도로 쓰든, 그에게는 그 돈이 없어도 살아가는데 지장이 없는 아주 작은 일부분일 뿐입니다. 하지만 가난한 과부의 동전 두 개는 헌금으로 드리기에 적은 금액일지라도 그녀에게는 자신의 생활비 전부였기에 그 가치는 다른 모든 사람의 헌금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컸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헌금의 많고 적음을 보시지 않습니다. 헌금하는 사람의 마음을 보십니다. 우리는 생활비 전부를 바쳐야 한다는 부담감을 가질 필요는 없습니다. 혹여나 부담감을 가져 생활비의 전부 또는 많은 부분을 드리더라도 자원하는 마음과 감사하는 마음이 없다면 그 헌금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습니다. 헌금에 있어서 중요한 점은 하나님께 감사하는 마음입니다.

예수님 당시 성전에 바치는 헌금의 최소단위는 두 렙돈이었습니다. 이 법은 성경에 정해진 법이 아닌 당시 전통으로 내려왔을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이러한 법에 대한 옳고 그름을 평가하지 않으시고 과부가 그 법을 지키기 위해 생활비 전부를 드린 마음을 보셨습니다. 여인이 헌금한 돈이 하나님을 위해 제대로 사용되었을 리가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성전을 강도의 소굴로 만들었다고 꾸짖으셨고, 당시 헌금의 많은 부분이 헤롯의 영예를 위해 외형적인 성전 건축에 사용되었습니다. 주님께서는 한 가난한 과부가 드린 헌금의 사용처에 부당함을 언급하지 않으셨습니다. 대신에 그 여인의 마음을 칭찬하셨습니다. 그 여인은 헌금을 정성껏 하나님께 드렸으며, 주님께서는 그 마음을 받으셨습니다. 어떤 헌금이라도 하나님께 정성껏 드리는 마음이 중요합니다.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으로 인해 인터넷 예배를 드리는 동안에 헌금을 어떻게 드려야 하는지에 대한 문의가 많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어떤 식으로 하나님께 헌금을 드리든지 방법이나 액수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마음을 보십니다. 요즘처럼 어려운 시기에 한 가난한 과부처럼 적은 돈이 생활비 전부가 될 정도인 분도 계실 것입니다. 사람이 보기에는 적은 금액일지라도 하나님께서 보실 때는 큰 금액임을 잊지 마십시다.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5-9절)

5 어떤 사람들이 성전을 가리켜 그 아름다운 돌과 헌물로 꾸민 것을 말하매 예수께서 이르시되

성전 건축에 필요한 물건이나 장식물을 헌금으로 구입하기도 했지만 헌물로 충당하기도 했습니다. 성전 관계자들은 대리석과 같은 아름다운 돌과 헌물로 성전을 화려하게 꾸몄습니다. 화려한 성전을 보신 주님께서 그것이 아름답다고 칭찬하셨겠습니까? 당시 46년 동안 짓고 있었던 화려한 성전은 30~40년이 더 지나야 완공되었지만 그러한 성전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성전이 아니었습니다. 정치인이 자신의 정치적 목적을 이루기 위해 종교 지도자들과 결탁하여, 과부의 두 렙돈을 포함한 헌금이 사용되는 것을 하나님께서 좋아하실 리가 없었습니다. 주님께서는 겉이 화려한 성전의 미래를 두고 단호히 말씀하셨습니다.

6 너희 보는 이것들이 날이 이르면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뜨려지리라

이를 듣던 제자들이 깜짝 놀랐습니다. 46년 동안 심혈을 기울여 짓고 있는 성전이 허무하게 무너질 리가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당시 헤롯 가문이 성전을 짓고 있었더라도 성전은 하나님께서 임재하시는 곳으로 믿었기에 성전이 그렇게 무너질 것이라고 도저히 믿기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이런 일이 일어나려 할 때의 징조가 무엇인지 궁금해서 주님께 여쭈었습니다.

7 그들이 물어 이르되 선생님이여 그러면 어느 때에 이런 일이 있겠사오며 이런 일이 일어나려 할 때에 무슨 징조가 있사오리이까

헤롯 대왕이 건축을 시작한 성전은 착공으로부터 80년이 넘도록 지어졌지만 주후 70년에 로마장군 티투스에 의해 주님의 예언대로 완전히 무너졌습니다. 주님께서는 유형적 성전이 몰락할 때보다 더 중요한 때를 말씀해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임재가 없으며 하나님과의 교통이 없는 성전, 강도의 소굴로 된 성전이 사라질 날은 주님이 다시 오실 날임을 알려주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 때에 나타날 징조를 바로 말씀해 주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 답변의 서두가 8,9절입니다.

8 이르시되 미혹을 받지 않도록 주의하라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 이르되 내가 그라 하며 때가 가까이 왔다 하겠으나 그들을 따르지 말라 9 난리와 소요의 소문을 들을 때에 두려워하지 말라 이 일이 먼저 있어야 하되 끝은 곧 되지 아니하리라

성전의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질 때는 주후 70년에 성취되었지만 주님이 말씀하신 중의적(重義的) 그날은 주님의 재림의 날입니다. 2천년의 세월이 흐른 오늘날은 그날이 점점 임박해졌습니다. 우리는 그날을 준비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내일 본문인 종말의 징조를 말씀하시기 전, 그날을 준비하며 살아가야 할 우리에게 우선 주의해야 할 점을 알려주십니다.

첫째는 미혹을 받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거짓 행세하는 자칭 예수가 나올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지금도 자칭 예수가 있고 과거에도 있었습니다. 만약에 주님이 이미 재림하셨다면 죽은 자들의 부활과 심판이 있어야 하는데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기에 자칭 예수라고 하는 사람은 다 거짓입니다. 주님께서는 자칭 예수라 하는 사람이 나오면 주님이 다시 오실 날이 가까이 왔다고 말씀하셨으니 지금 우리는 주님의 날이 가까이 왔음을 인지하고 살아가야 합니다.
둘째는 난리와 소요의 소문을 들을 때에 두려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난리와 소요의 소문은 역사적으로 많았습니다. 요즘은 전 세계의 소문을 인터넷으로 쉽고 빠르게 접합니다. 난리와 소요의 소문을 접할 때마다 주님의 날이 임박했음을 되새겨야 합니다. 코로나바이러스전염병 역시 난리와 소요의 소문 중에 하나입니다. 난리와 소요의 소문이 있어도 끝은 곧 되지 아니한다고 말씀합니다. 그 끝은 아무도 알 수 없습니다. 오늘이 될지, 내일이 될지, 10년 후가 될지 100년 후가 될지 아무도 모릅니다. 중요한 점은 그날이 부지불식간에 온다는 점입니다.

이 점을 인지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먹고 마시고 사고 팔고 농사하고 집을 매매하는 일상의 삶 속에서 이기심의 홀로, 탐욕의 홀로로 살아가는 것은 매우 위태롭습니다. 이러한 삶은 재림의 날을 준비하는 삶일 수 없습니다. 하나님과 더불어, 하나님의 사람들과 더불어,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과 더불어 사는 사람이 그날을 준비하는 사람입니다. 세상은 어지럽습니다. 유형적 교회는 부패했습니다. 헤롯 성전 시대와 다르지 않습니다. 헌금을 유용해서 헌금의 본질을 왜곡하는 시대일지라도 주님께서는 하나님께 감사하는 사람, 주님과 더불어 사는 사람을 외면하지 않으십니다. 오늘 하루 일상의 삶 속에서 하나님을 힘으로 삼고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으며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하나님과 더불어 하나님이 사랑하는 사람과 더불어 살아가며, 세상의 미혹을 받지 말고 난리와 소요의 소문에도 두려워하지 말며 살아가십시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가난한 자의 적은 헌금을 외면하지 않으시고 받아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지금 어려운 시기에 헌금으로 인해 실의에 빠지지 않도록 위로를 베풀어 주시옵소서. 가난해서 하나님만 바라보며 살아갈 수 있다면 그렇게 되기를 바라는 마음을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풍족해서 하나님을 가볍게 생각한다면 그렇게 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을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하나님께 드려진 헌금으로 외형이 화려한 성전과 예배당이 꾸며지기를 원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을 기억하게 하시고, 하나님의 임재가 없고 강도의 소굴로 변질된 유형적 성전과 예배당은 무너져야 함과 그날이 반드시 도래함을 잊지 않게 하시고, 오늘 하루 주님이 다시 오실 날을 준비하며 탐욕의 홀로, 이기심의 홀로가 아닌 주님과 더불어, 주님의 사람들과 더불어, 가족과 이웃과 더불어 살아가게 하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묵상을 위한 질문
1. 헌금함에 넣는 헌금을 보시는 주님께서 내가 드리는 헌금을 보실 때 무슨 말씀을 하시겠습니까?
2. 가난한 과부가 다른 모든 사람보다 헌금을 많이 넣었다고 주님께서 말씀하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3. 주님께서 아름다운 돌과 헌물로 꾸며진 성전을 보신 후 하신 말씀이 무엇입니까? 오늘날 교회에 이런 요소가 있다면 무엇이 있습니까?
4.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지리라’의 중의적(重義的) 의미가 무엇입니까?
5. 하나님을 힘으로 삼는 사람으로서 주님이 다시 오실 날을 준비할 때, 버려야 할 ‘홀로’는 무엇이며 취해야 할 ‘더불어’는 무엇입니까?

(작성: 김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