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누가복음 18장 1-14절
찬송가 488장 ‘이 몸의 소망 무언가’

질문을 던지는 자들이 원하는 것은 ‘명쾌한 답’입니다. 애매모호하고 두리뭉실한 답은 혼란을 가져오게 됩니다. 17장에 바리새인들이 하나님의 나라가 언제 임하냐고 물어보았을 때 예수님의 답은 제자들이 듣기에도 명쾌하게 느껴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다’ 아직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개념이 잡혀있지 않았던 그 시대의 사람들에게 이만큼 어려운 답은 없었을 것입니다. 무엇보다 이스라엘 민족의 독립과 회복으로 이루어질 하나님의 나라를 꿈꾸던 그들에게 시간과 장소와 방법도 본인들이 이해하기 힘든 방식으로 임하는 하나님의 나라를 듣고서는 맥이 탁 풀려 버렸을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오늘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과부와 재판장의 비유를 통해 격려하십니다.

과부와 재판장의 비유(1-8절)
(1) 예수께서 그들에게 항상 기도하고 낙심하지 말아야 할 것을 비유로 말씀하여

오늘 본문 1절에 ‘기도’와 ‘낙심’이라는 단어가 나오기에 오늘 본문을 기도에만 국한시켜 생각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8절 말씀을 보시면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하시니라’라는 말씀으로 본문을 확장시켜 생각해보면 단순히 기도할 때 낙심하지 말고 기도하라는 메시지만이 아니라 예수님의 초림과 재림 사이를 살아가며 재림을 기다리는 우리 모든 성도들에게 주신 격려의 말씀임을 알 수 있습니다.
먼저 이 비유에는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을 무시하는 한 재판장이 나옵니다. 그리고 그와 정 반대의 입장에 서 있는 그 당시 사회적 약자를 대표하는 한 과부가 나옵니다. 이 과부는 원수에게 억울한 일을 당하고 원한을 풀어달라고 재판장을 자주 찾아갑니다. 얼마나 자주 찾아가서 간청했던지 재판장은 질려버렸습니다. 4절에서 5절입니다.
(4-5) 그가 얼마 동안 듣지 아니하다가 후에 속으로 생각하되 내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을 무시하나 이 과부가 나를 번거롭게 하니 내가 그 원한을 풀어 주리라 그렇지 않으면 늘 와서 나를 괴롭게 하리라 하였느니라

과부는 재판장을 압박할 수 있는 아무런 힘이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주 찾아가 간청하는 과부의 모습은 마치 재판장에게 한 여름 밤 찾아온 모기와도 같았을 것입니다. 우리는 모기가 방에 들어왔을 경우 그 모기가 나를 크게 다치게 하거나 그 무는 행위 자체로는 나를 죽이지 못함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반드시 모기를 잡고 잠을 잡니다. 왜냐하면 그 모기는 밤새도록 나를 물고 가족을 물고 심지어 물린 그 자리는 나를 간지럽게 하여 삶의 질을 떨어뜨릴 것이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재판장은 그래서 그녀의 원한을 풀어주어야 하겠다고 결심하게 됩니다. 그리고 7절과 8절에 이 비유에 이은 예수님의 가르침이 이어집니다.
(7-8) 하물며 하나님께서 그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 주지 아니하시겠느냐 그들에게 오래 참으시겠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속히 그 원한을 풀어 주시리라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하시니라

하나님과 오만한 재판장을 비교하고 과부와 우리들을 비교하며 하물며 하나님께서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 주지 않으시겠냐는 말씀을 주십니다. 하나님이 재판장보다 더 사랑과 긍휼이 많으시다면 또한 과부가 재판장에게 가진 의미보다 우리가 하나님께 더 큰 의미를 가진 존재라면 우리의 원한을 하나님께 고했을 때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에 응답하지 않으시겠냐는 뜻입니다. 이 말씀은 말세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큰 위로가 됩니다.

예수님이 그러 하셨듯이 교회가 예수님이 가신 십자가의 길을 바로 가고 있다면 교회와 성도 개인은 세상에서 갑의 위치가 아니라 을의 위치에 서게 됩니다. 윽박지르고 힘으로 누르는 위치가 아니라 그럴 수 있음에도 복음을 위해 영혼을 위해 자신의 권리를 버릴 수 있는 ‘스스로 선택한 사회적 을’이 됩니다. 그러다보니 우리는 그 당시 사회적 지위나 권력을 행할 수 없었던 약자의 대표 ‘과부’와도 같은 위치에 노출될 때가 많습니다. 그리스도인이기에 교회이기에 말할 수 없고 침묵해야 했고 싸울 수 없었던 억울한 상황을 맞닥뜨리게 됩니다. 그때 우리의 눈에선 눈물이 흐르고 가슴에선 분노가 치밀어 오르며 억울하게 맞고 들어온 아이처럼 하나님 품에 안겨서 엉엉 우는 것 외에 할 수 있는 것이란 없습니다. 그렇게 우리가 세상에서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가려다 고난을 당하여 하나님 앞에 울며 기도할 때 마귀는 우리의 마음에 속삭입니다. ‘하나님은 너의 기도에 관심이 없어, 니가 맞을 때 하나님은 무얼하고 계셨니? 왜 전능하신 그분이 너의 고통을 막지 않으셨을까? 그건 널 사랑하지 않을 뿐 아니라 관심조차 없기 때문이야’ 이렇게 우리의 마음을 낙심케 만들고 결국 기도의 자리까지 떠나고 신앙의 자리도 떠나게 만드는 것이 마귀의 계략입니다.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하시니라’는 말씀을 보면 말세에 많은 사람들이 믿음을 잃고 더 이상 예수님이 심판의 주로, 구원의 주로, 재림의 주로 오실 것을 기대하지 않고 오히려 세상 사람들보다 더한 사람이 되어 그들의 방식대로 힘과 권력을 얻기 위해 속이고 싸우고 빼앗으며 세상의 갑이 되는 것이 하나님께 복 받은 신앙인의 표지라 여길 시대가 올 것임을 예수님은 알고 계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반드시 기억해야 합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속히 그 원한을 풀어 주시리라’ 하나님은 우리가 처한 고통과 억울함을 알고 계실뿐 아니라 그 부르짖는 자의 원한을 풀어주시고 또한 재림의 때에 공의의 주님께서 모든 어그러지고 굽어진 것들을 곧게 하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참고 기다려야 합니다. 프로리그 축구경기를 보면 선수들 간에 신경전이 상당합니다. 때로는 어이없는 반칙을 당하기도 하고 또 반칙이 아닌데 심판이 카드를 주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럴 때 어떤 축구선수들은 충동적으로 폭력을 행사하거나 더 큰 반칙으로 갚아주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면 더 큰 문제가 생깁니다. 그러나 지혜로운 선수는 억울하지만 참고 또 참습니다. 그러면 심판이 못 봤더라도 요즘은 비디오 판독을 통해 다시 살펴본다던지 그 경기에서 판정이 뒤집혀지지 않아도 그 경기 영상이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공개되면서 비열한 행위를 한 선수는 영원히 수치스러운 선수로 기억되게 됩니다. 우리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는 우리에게 을의 자리에서 억울한 순간이 찾아오고 힘으로 갚아주고 싶고 복수하고 싶은 순간들이 찾아올 때 이 땅에 재림의 주로 오실 예수님께 심판을 맡기며 주어진 인생의 경기를 최선을 다해 달려가십시다. 그러면 이 경기가 끝나는 날 심판의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각 각 뿌린 것을 거두게 하실 것입니다.

바리새인과 세리의 비유(9-14절)
아마도 과부와 재판장의 비유를 통해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의 나라가 완성될 그 날을 고대하며 ‘나는 인자가 오는 그 날에도 믿음을 지키고 있을 거야’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릅니다. 오늘 이 말씀을 대면하는 우리도 속으로 ‘내가 말세에 믿음을 지키는 그 사람일거야’라는 생각을 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보시기에는 자신의 믿음에 대하여 큰 착각에 빠진 자들이 그 자리에 있었습니다. 마치 시험범위를 잘못 알고 공부한지도 모른 채 시험에 만점 받을 것이라 기고만장하여 앉아있는 학생처럼 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그런 자들에게 너희가 알고 있는 시험범위가 틀린 것임을 알려주시는 본문이 오늘 두 번째 비유인 ‘바리새인과 세리’의 비유입니다. 바리새인과 세리는 동일하게 성전에 와서 기도를 하기 시작합니다. 먼저 바리새인이 드리는 기도의 내용을 살펴보겠습니다.
(11-12)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이르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하고

이 바리새인의 기도의 형태를 보면 ‘감사기도’를 드리고 있습니다. 얼마나 경건합니까? 간구의 기도만 주구장창 드리는 사람과 비교해보면 하나님께 감사하는 그의 신앙의 수준은 대단해 보입니다. 게다가 그가 말하는 거룩한 삶을 보면 더 대단한 신앙의 수준에 도달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토색’ 곧 속여 빼앗는 일도 없고 불의한 일도 하지 않고 음란한 일도 행하지 않는 구별된 사람입니다. 게다가 일주일에 두 번 금식을 하고 소득의 십일조도 드립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완벽한 신앙인의 모습 아닙니까?

그런데 저쪽 멀찌감치 서서 눈도 못 들고 기도하는 세리가 있습니다. 13절입니다.
(13)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이르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

세리는 차마 소리 내서 자신의 죄를 입술로 고백하지도 못합니다. 로마의 앞잡이 역할을 하며 사람들의 돈을 어떻게든 빼앗아 자신의 탐욕을 채우려했던 그는 성전에 들어온 것이 발각되면 사람들에게 쫓겨날까 두려워 멀리 서서 가슴만 치며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라는 고백밖에 할 수 없었습니다. 이 이야기를 듣던 사람들은 긴장감이 고조됩니다. 그 무리 속에 있던 바리새인들과 신앙에 열심이 있던 사람들은 아마도 같은 바리새인의 입장에서 이야기의 결말을 기다렸을 것이고 또 당시의 여러 신앙적 기준들을 만족시키지 못하고 스스로 죄책감에 시달리고 있던 사람들은 세리처럼 예수님의 눈빛을 피해 어디로 도망갈지 고민하고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전혀 뜻밖의 말씀이 예수님으로부터 선포됩니다. 14절입니다.
(14)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에 저 바리새인이 아니고 이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고 그의 집으로 내려갔느니라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하시니라

이 이야기를 들은 사람들은 마치 요즘 나오는 반전영화나 드라마를 보는 것처럼 탄성을 질렀을지 모릅니다. 왜냐하면 우리에게는 익숙한 이 이야기가 당시에는 그렇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 당시 신앙인들이 우러러 보던 계층중 하나가 바로 ‘바리새파’였습니다. 율법을 연구하고 갖가지 계명을 만들어 교육하고 지키며 스스로 불경건한 자들과 분리되어 살아가려고 했던 그들의 열심은 실로 보는 이들의 존경을 불러왔습니다. 반대로 세리는 본인의 고백처럼 죄인의 대표이자 사람들의 손가락질을 받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세리가 바리새인보다 하나님 앞에 의롭다 하심을 받았다니 당연히 충격이 아니었겠습니까? 그렇다면 세리가 바리새인보다 더 의롭다 여기심을 받은 이유는 무엇입니까?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고 그 이유를 밝혀 주십니다. 바리새인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높였고 세리는 자신을 낮추었습니다. 오늘 바리새인은 하나님 앞에 자신의 의로 가득 채워진 그릇을 가지고 나아갔고 세리는 빈 그릇을 가지고 나아왔습니다. 하나님께서 바리새인에게 무엇인가 줄 것이 있는지 한 참 그 마음의 그릇을 바라보셨지만 하나님 앞에서 감사를 빙자한 자기 자랑과 자기 찬송과 비교우위를 통한 자만을 드러내는 그의 마음속에 은혜를 베푸실 어떤 빈자리도 찾으실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어서 기도하는 세리의 심령은 가난하였습니다.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빈 그릇입니다’ 하나님은 그를 불쌍히 여기시고 그의 텅 빈 그릇을 씻으시고 예수 그리스도의 의로 채워 주셨습니다.

이제 우리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져봅니다. ‘내 그릇은 어떤 그릇인가?’ ‘하나님, 제가 그래도 직분도 맡았고 봉사도 열심히 참여하고 십일조와 헌금도 잘 드립니다. 이만하면 괜찮은 하나님 자녀 아닙니까?’ 혹시 우리가 자기 의와 열심에 가득차서 하나님께서 부어주실 은혜를 받을만한 빈 공간이 하나도 없는 꽉 찬 그릇은 아닌지요. 하나님은 우리가 빈 그릇으로 나아오길 원하십니다. ‘하나님, 우리는 아버지 없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죄인이요, 행하는 모든 일과 생각이 나의 유익과 만족을 위한 허탄한 것일 뿐임을 고백합니다. 아버지, 나를 불쌍히 여겨 주옵소서’ 하나님을 처음 만난 순간만이 아니라 봉사와 사역의 정점에 서 있는 그 순간에도 교회에서 없어서는 안 될 핵심멤버라고 사람들이 박수쳐줄 때에도 스스로 생각해도 신앙적인 열정이 충만해 보일지라도 실은 우리의 의로움은 하나님의 영광 앞에 겨우 누더기 같을 뿐임을 기억하고 오로지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의지하는 마음 그것이 빈 그릇입니다.

자수성가하여 큰 기업의 사장이 된 한 남자가 있었습니다. 하루는 그 남자가 아내의 생일에 편지를 썼습니다. ‘난 바람도 안 피고 집에도 일찍 들어오고 생활비도 꼬박꼬박 줄뿐만이 아니라 당신 친구네 남편같이 가난하지도 않아서 일주일에 두 번씩 소고기를 먹여줄 뿐만이 아니라 생일날 당신을 위해 명품선물까지 준비했소, 나 이정도면 만점짜리 남편 아니요? 당신 나 같은 남자랑 결혼안게 복 인줄 아시오’

같은 날 생일을 맞이한 아내의 친구는 남편으로부터 이런 편지를 받았습니다. ‘여보, 난 당신을 위해 해준 게 아무것도 없소, 남들처럼 비싼 선물 하나 사주지 못하고 생활비도 넉넉히 주지 못할 뿐 아니라 생일날 맛있는 고급 음식도 하나 사주지 못하고 기껏 통닭 한 마리에 작은 장미꽃 하나밖에 선물로 주지 못했지만 이런 나를 사랑해주고 함께 해주어 감사하오, 이런 못난 남편이지만 당신만 평생 함께 해주면 난 더 이상 바랄 것이 없소’ 이 두 남편 중에 어떤 사람이 아내의 사랑을 받았겠습니까?

오늘 우리의 삶과 신앙이 내가 보기에도 터무니없이 부족해 보일지라도 하나님 앞에 예배를 드리는 나의 모습이 초라하게만 느껴질 지라도 오늘 세리처럼 이 한 마디 고백을 드려보지 않으시겠습니까?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이 고백이 실은 우리가 드릴 수 있는 가장 진실된 고백입니다. 그리고 이 고백 가운데 살면서 때론 하나님의 자녀로 겪는 어려움에도 낙심하지 않고 다시 오실 예수님을 바라보며 소망가운데 나아갈 때에 나타나 도우시는 하나님으로 인해 우리는 큰 기쁨의 날을 맞이하게 될 것입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가는 것이 때로는 무거운 짐 같이 부담이 되어 피하고 싶을 때가 있음을 고백합니다. 또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가며 스스로 선택한 을의 자리에서 마음상해 울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마귀는 우리에게 하나님의 일하심과 나타나 도우심을 기대하지 말라고 하지만 사람들은 우리에게 예수님이 언제 다시 오겠냐며 같이 먹고 마시며 그들과 같은 삶의 가치를 가지고 살아가라 하지만 오늘도 믿음으로 방주를 지은 노아처럼 묵묵히 주어진 분량의 삶을 살아내며 말씀으로 우리를 세워나가길 소망합니다. 또한 그런 삶을 살아가는 길에서도 스스로 의로운 자로 여기지 않게 하시고 날마다 빈 그릇을 아버지 앞에 내놓으며 예수 그리스도의 의만이 유일한 우리의 소망임을 고백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묵상을 돕는 질문
1. 과부와 재판장의 비유를 단순히 ‘떼쓰고 기도하면 하나님이 들어 주신다’라고 생각해서는 안 되는 이유를 생각해보며 다시 한 번 천천히 말씀을 묵상해 봅시다.
2. 과부의 태도를 살펴보며 우리에게 부족한 마음과 자세가 무엇인지 묵상해 봅시다.
3. 서서 따로 기도한 바리새인의 모습을 보며 내 안에 다른 사람들과 비교우위를 통한 교만함이 싹트고 있지는 않았는지 묵상해 봅시다.
4. 하나님 앞에서의 의로움이 무엇인지 묵상해 봅시다.

(작성: 강요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