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누가복음 13:1-9
찬송가 276장 ‘아버지여 이 죄인을’



빌라도의 갈릴리 사람들 살해 사건(1-3절)
오늘 본문은 두 사건과 한 비유에 대해서 증거합니다. 1-3절은 빌라도 총독이 갈릴리 사람들을 죽인 일에 대해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교훈하시는 내용입니다.
오늘 본문은 “그 때 마침”이라는 말로 시작됩니다. 이것의 문자적인 뜻은 “바로 같은 그 시간에”입니다. 즉 오늘 본문은 12:54-59과 관련된다는 의미입니다. 12장에서 예수님께서는 시대를 바르게 분별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먹구름이 잔뜩 끼게 되면, 비가 쏟아질 것이 금방 예상이 됩니다. 또 여름에 아침 해가 뜨기 전임에도 날씨가 후덥지근하면, 그날은 몹시 무더울 것으로 생각하게 됩니다. 또 나에게 돈을 빌려준 사람이 기세등등한 자세로 나를 데리고 재판장에게 끌고 간다면 그 후에는 무슨 일이 생길지 자명해집니다. 이처럼 지금 나타나는 현상으로도 그 뒤에 무슨 일이 벌어질지가 예상이 된다면, 이 시대의 흐름을 보고서, 영원한 재판장이신 하나님 앞에 서게 될 것을 잊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즉 최후 심판이나 자신의 종말이 오기 전에 분별력 있게 회개하고 주님을 받아들여 구원받은 백성이 되라는 말씀입니다.

(1) 그 때 마침 두어 사람이 와서/ 빌라도가 어떤 갈릴리 사람들의 피를/ 그들의 제물에 섞은 일로 예수께 아뢰니

몇몇 사람들이 예수님께 나아와서 믿기 어려운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 제사를 드릴 때, 제물로 드리는 짐승은 제사를 드리는 사람들이 직접 잡았습니다. 유월절이나 초막절과 같은 때에 수만 마리의 짐승을 잡아야 하는데, 제사장들이 그것을 감당하는 것은 불가능했습니다. 그래서 제사장들은 제물로 드린 짐승의 피를 제단에 뿌리고, 각 뜬 제물을 불로 태우는 일만 했습니다.
그렇게 사람들이 제물로 드릴 짐승을 잡고 있는데, 빌라도 총독이 갈릴리 사람들을 죽이고, 그 피를 제물로 드릴 짐승의 피와 섞었다는 것이었습니다. 이 사건이 어떤 사건인지는 성경에 나타나 있지 않기 때문에 알 수 없지만, 누가복음 23:12에 보면 헤롯과 빌라도가 이전에는 원수였지만 당일-예수님을 죽이는 날-에는 친구가 되었다는 내용이 나옵니다. 어떤 학자들은 빌라도의 이 사건 때문에 헤롯과 빌라도가 원수가 되었다고 보기도 합니다. 빌라도 총독은 이스라엘의 남쪽인 유대 지방을 다스리고 있었고, 헤롯(헤롯 안티파스)은 이스라엘의 북쪽인 갈릴리 지방을 다스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남쪽 통치자가 북쪽 사람을 죽여 그 피를 제물로 드리는 짐승의 피와 섞어버린 것입니다.

당시에 유대인들은 로마 제국으로부터 독립하기 위해서 끊임없이 게릴라전을 펼쳤고, 로마 정부는 그런 일에 대해서 무자비한 탄압정책을 펼쳤기 때문에, 로마의 총독이 사형선고를 내리는 것이 새삼스러운 일은 아니었습니다. 사람들이 그중에 당시 발생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한 사건을 예수님께 일러준 것이었습니다.
사람들이 왜 이 사건을 예수님께 고했는지 그 이유가 나타나 있지는 않지만, 일차적으로는 가해자인 빌라도 총독을 비난하기 위해서라고 생각하기 쉽니다. 예수님께서 빌라도 총독을 정죄하고, 그에게 분노를 쏟아 내는 것을 듣고 자신들도 예수님과 함께 빌라도 총독을 욕하고 싶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사람들이 빌라도 총독의 일을 예수님께 고한 것은 빌라도 총독보다는 갈릴리 사람들에 초점을 두고 말한 것으로 보입니다.

(2)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는 이 갈릴리 사람들이 이같이 해 받으므로/ 다른 모든 갈릴리 사람보다/ 죄가 더 있는 줄 아느냐

사람들은 빌라도 총독에 의해서 죽임을 당한 사람들이 그렇게 된 것은 그들이 지은 죄가 많아서 그렇다고 생각했습니다. 당시 갈릴리는 아주 척박한 땅이었습니다. 가난한 사람들, 실패한 사람들, 소외된 사람들이 많이 모여서 살던 지역이었습니다. 갈릴리 사람들 중에는 빨리 성공해서 예루살렘과 같은 도시로 가서 살아야겠다고 생각하던 사람들도 있었지만, 적지 않은 사람들이 체념하고 살거나 세상에 대해서 한과 분노를 갖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그 갈릴리 사람들이 드리는 제사를 받지 않으시고 진노하셨기 때문에, 그들이 벌을 받아서 죽은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전혀 그렇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천재지변이나 인재지변이 일어나서 사람들이 죽거나 다칠 때, 사람들이 잘못 살았기 때문에, 또 지은 죄가 있기 때문에 그런 일을 겪게 되었다고 생각하지 않아야 합니다. 또한 자신이 어떤 일을 겪을 때도 동일해야 합니다. 갑작스럽게 찾아온 질병이나 사고로 인해서 가족이 세상을 떠나거나 심각한 상태에 있게 될 때에, “왜 이런 일이 나에게, 또 내 가족에게 일어났을까? 내가 삶을 잘못 살았기 때문일까?”와 같이 생각하지 않아야 합니다. 우리에게 일어나는 크고 작은 일은 믿음 안에서 해석하고, 합리적으로 생각하는 것이 바른 신앙의 태도입니다.


실로암 망대가 무너진 사건(4-5절)
4-5절은 실로암 망대가 무너진 사건에 대해서 증거합니다.
(4) 또 실로암에서 망대가 무너져/ 치어 죽은 열여덟 사람이/ 예루살렘에 거한 다른 모든 사람보다/ 죄가 더 있는 줄 아느냐

이 사고도 어떤 일인지는 알 수 없지만, 당시에 있었던 천재지변이나 의도하지 않았던 인재지변과 같은 재난으로 여겨집니다. 이 사고가 일어났을 때도 사람들은 그들이 죄가 많아서 죽임을 당했다고 생각했습니다. 1994년에 있었던 성수대교 붕괴나 1995년에 있었던 삼풍백화점 붕괴와 같은 사고가 2000년 전에 예루살렘에 있는 실로암에서도 있었던 것입니다.

천재지변이든, 인재지변이든지 간에 그런 일이 일어날 때 우리가 생각해야 하는 것은 동일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답변이 동일하셨기 때문입니다.
인재지변이라고 할 수 있는 사건, 빌라도 총독이 제물의 피에 갈릴리 사람들을 죽여 그 피를 섞은 일에 대해서 들으시고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3)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너희도 만일 회개하지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

또 천재지변, 예기치 않은 사고라고 할 수 있는 실로암 망대가 무너진 일에 대해서 말씀하시고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5)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너희도 만일 회개하지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

3절의 말씀과 똑같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두 사건에 대해서 말씀하시고는 동일하게 “회개하라”라고 하셨습니다. ‘회개하다’의 구약적인 의미는 ‘가던 길을 바꾸고 돌아서다’입니다. 동쪽으로 가다가 그 길이 바른길이 아님을 깨닫고, 돌아서서 서쪽으로 가는 것입니다. 또 ‘회개하다’의 신약적인 의미는 ‘마음을 바꾸다’입니다. 동쪽으로 가던 길을 서쪽으로 바꿀 수 있는 것은 그 마음(정신)을 바꿀 때 가능하고, 그 마음(정신)이 바뀌어야 근본적으로 바뀌어 다시는 동쪽으로 가지 않을 수 있습니다.
3절과 5절은 예수님께서 어떤 형태의 일들을 보든지 간에 각자의 삶에 바르게 적용해야 한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여러 사건, 사고, 현상을 바라보며 자신의 삶을 새롭게 하는 것은 신앙의 지혜입니다. 또한 우리 사회가 사람에 의하여서 일어나는 재난인 인재(人災)를 최소화하는 것은, 바른 제도를 만들고, 사회의 구성원 모두가 그 제도를 제대로 지키며 사는 것입니다.


열매 맺지 못하는 무화과나무(6-9절)
6-9절은 열매 맺지 못하는 무화과나무에 관한 비유입니다.
(6) 이에 비유로 말씀하시되/ 한 사람이 포도원에 무화과나무를 심은 것이 있더니/ 와서 그 열매를 구하였으나/ 얻지 못한지라

포도원의 주인이 포도원에다 포도가 아니라 무화과나무를 심었습니다.
우리말 ‘무화과’의 문자적인 의미는 ‘꽃이 없는 과일’입니다. 그러나 세상에 꽃이 없이 바로 과일이 열리는 나무는 없습니다. 무화과는 열매 안에 꽃이 있어 보이지가 않습니다. 그래서 ‘무화과_꽃이 없는 과일’이라기 보다, ‘은화과(隱花果, syconium)_꽃이 감추어진 과일’이 더 정확한 표현입니다.
중동에서는 무화과를 1년에 2번 수확합니다. 3월경부터 열리기 시작하는 첫 열매를 ‘파게(Phage)’라고 불렀는데, 이것은 지난해의 가지에 열리는 것으로 과즙이 부족하고, 당도가 덜했습니다. 하지만 당시에 양식이 부족한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귀한 먹거리였습니다. 마치 ‘춘궁기(春窮期)’에 먹는 ‘구황식물(救荒植物)’과도 같았습니다. 첫 무화과 파게는 6월경이면 모두 떨어졌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 무화과는 8-9월에 수확했는데, ‘테에나(Thaena)’라고 불렀습니다. 이것은 첫 열매보다 수분도 풍부하고 당도도 높았습니다. 이것을 과일이나 음식의 일부로 먹었음은 물론 말려서 소화제나 치료제로 쓰기도 했습니다.

이처럼 고대에 무화과나무는 효용 가치가 높은 나무였습니다. 포도원의 주인이 포도원에 무화과를 심은 것은 틀림없이 열매를 더 많이 수확하기 위함이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문에 나오는 무화과나무는 아무런 열매를 맺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 때에 포도원의 주인이 포도원지기에 이렇게 말했습니다.

(7) 포도원지기에게 이르되/ 내가 삼 년을 와서/ 이 무화과나무에서 열매를 구하되/ 얻지 못하니 찍어버리라/ 어찌 땅만 버리게 하겠느냐

주인은 무화과 열매를 거두기 위하여 3년 동안 기다렸습니다. 그러나 매해 헛수고였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이 나무를 심은 지 3년이 지났다는 의미는 결코 아니었습니다. 일반적으로 무화과나무는 묘목을 심고 3-4년 정도 지나면 열매를 맺는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유실수를 심게 될 때 열매를 맺기 시작해서 첫 3년 동안은 부정하기 때문에 먹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네 번째 해에 수확한 것은 모두 하나님께 드리게 했습니다. 이유는 짐승의 첫 새끼를 구별하여 하나님의 것이라고 말씀하셨던 것처럼, 자신이 수고해서 농사를 지었지만, 그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부터 왔음을 잊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 후 다섯 번째 해에 수확한 과일부터 농사를 지은 사람이 갖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그때로부터 1400년이 지난 당시에도 랍비들은 동일하게 적용해서 가르쳤습니다. 즉 유실수를 심어서 첫 3년 동안 결실한 열매는 부정하다고 가르쳤고, 네 번째 해에 결실한 것은 구별하여 하나님께 드림으로 모든 것의 주인이 하나님이심을 인식하게 했습니다. 그리고 다섯 번째 해에 결실한 것은 농부의 소유가 되었습니다.
결국 포도원에 심어진 무화과나무는 처음 심어서 3-4년을 기다렸고, 부정하다고 여겨진 3년도 지나고 난 후에 또 3년 동안 열매를 맺지 못한 것으로 여겨집니다. 결국 이 나무는 심은 지 9-10년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그 주인에게는 아무런 열매를 주지 못하는 그런 나무였던 것입니다.
주인의 입장에서는 이 나무에게 특별한 기대를 하고 포도밭에 심었었습니다. 그럼에도 결실해야 할 때가 수년이 지났음에도 아무런 열매를 맺지 못하는 있으나마나한 나무였습니다. 그저 땅만 덩그렇게 차지하고 있을 뿐이었습니다. 시실 그것뿐만이 아닙니다. 이 나무는 땅속에 있는 자양분과 수분을 흡수함으로 다른 나무들이 더 건강하고, 더 좋은 결실을 내는 것을 방해하는 존재였습니다. 더 나아가 포도원지기의 노동력도 헛수고로 만들었습니다. 포도원지기가 다른 나무와 마찬가지로 이 나무에게도 거름을 주고, 가지치기도 해 주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열매가 없는 나무였습니다. 그래서 주인이 내린 결론은 나무를 없애는 것이었습니다. 여기까지만 보면, “우리도 이 무화과나무처럼 열매를 맺지 못하면 결국 처벌을 받거나 죽임을 당하는구나”라고 생각됩니다. 그런데 포도원지기가 주인에게 이렇게 호소했습니다.
(8-9) 대답하여 이르되/ 주인이여/ 금년에도 그대로 두소서/ 내가 두루 파고 거름을 주리니/ 이 후에 만일 열매가 열면 좋거니와/ 그렇지 않으면 찍어버리소서 하였다 하시니라

포도원지기는 “주인님, 베어버리는 것은 쉬운 일이니까 그것은 나중에 해도 늦지 않습니다. 제가 둘레도 파주고 비료도 주겠습니다. 한 해만 더 기다려주십시오. 만약 그때도 열매가 열리지 않으면 그때 베면 좋겠습니다.”라고 간청했습니다. 예수님의 이 비유의 초점은 죽음이나 파멸이 아니라 생명과 결실입니다. 그래서 이 비유는 ‘다시 얻은 기회의 비유’, ‘연장받은 생명의 비유’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말씀에서 포도원지기가 열매를 맺지 못하는 무화과나무를 위해서 주인에게 간청하는 것도 참 감동적이지만, 더 감동되는 것은 주인이 그 간청을 들어주고, 또 기다려 줄 만큼 인격적인 분이라는 것입니다. 이 ‘열매 맺지 못하는 무화과나무’는 두말할 필요도 없이 우리 모두의 자화상입니다. 우리의 현재의 모습은 전부 하나님께서 3년, 또 1년, 그리고 또 1년을 기다려주셨기 때문입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우리를 기다려주시지 않으셨다면 우리는 오늘 이 자리에 있지 못했을 것입니다.

우리 모두에게는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생명의 길이가 있습니다. 그 길이가 얼만큼인지는 모릅니다. 하지만 어느 순간에 우리는 이 땅에서 마지막 숨을 내어 쉬게 될 것입니다.
마지막 숨을 내어 쉬는 순간을 오늘 본문의 갈릴리 사람이나 실로암 망대가 무너질 때처럼 전혀 예상하지도 못했고, 있으면 안 될 것 같은 일로 인해서 맞이할 수도 있고, 포도원에 심긴 열매 맺지 못하는 나무처럼 그 생명을 계속 연장을 받다가 평균나이 이상을 살고서 맞이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 순간이 언제이든, 우리가 늘 진리의 스폿(spot)이 되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서 살게 되면 이 땅에서도 하나님의 나라를 누릴 뿐만 아니라 마지막 숨을 내어 쉰 후에는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를 살게 될 것입니다. 오늘 하루도 하나님을 자신의 힘으로 여기며, 진리의 스폿인 하나님의 말씀을 목적 삼고 살아가는 한날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기 도
하나님 아버지!
우리 모두에게는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이 땅에서 마지막 숨을 내어 쉴 때가 있습니다. 그 순간이 언제인지, 어떤 상황인지, 어떤 방법일지 우리는 알지 못합니다. 바라옵나니 우리가 언제, 어디에서, 어떤 방법으로 마지막 숨을 내어 쉬든지 간에, 그때까지 영원한 진리의 스폿이 되는 하나님의 말씀에 매 순간 순종하며 살아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오늘 하루도 하나님을 힘으로 삼고 살아감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살아가는 복된 한날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묵상을 돕는 질문
1. 천재지변(天災地變)이나 인재지변(人災地變)과 같은 큰 사건이 일어나면 어떤 생각을 하곤 하십니까? 그 재난을 당한 사람이 나와 관련이 있을 때 나와 관련이 없을 때, 다르게 생각되지 않습니까?
2. 포도원에 심긴 무화과나무는 결실해야 할 때가 삼 년이나 지났음에도 열매를 맺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주인은 기다려주었습니다. 주님께서 당신을 오랫동안 기다려주신 일은 무엇입니까?
3. 포도원에 심긴 무화과나무가 결실하지 못했을 때, 포도원지기는 금년에도 그대로 두기를 간청했습니다. 당신을 위해서 그렇게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해 준 사람은 누구입니까? 그렇다면 당신은 누구를 위해서 그런 마음으로 기도하고 있습니까?
4. 이 땅에서 사는 동안 하나님의 말씀을 진리의 스폿으로 삼고 살아가며, 여호와 하나님을 나의 힘으로 삼기 위하여 무엇을 결단하시겠습니까?


(작성 : 정한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