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누가복음 12:1-12
찬송가 336장 ‘환난과 핍박 중에도’

외식을 주의하라 (1-3절)
누가복음 11장 마지막 부분을 보면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거세게 달려들어 여러 가지 일을 따져 묻고 그 입에서 나오는 말을 책잡고자 하여 노리고 있더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은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몰아붙이듯 따져대는 소리를 들으셨고, 트집을 잡으려고 혈안이 되어 있는 눈빛을 보셨습니다. 그러는 동안에도 수많은 사람이 서로 밟힐 정도로 예수님께 나아옵니다. 혼란스러운 상황이었습니다.

(1) 그 동안에 무리 수만 명이 모여 서로 밟힐 만큼 되었더니 예수께서 먼저 제자들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바리새인들의 누룩 곧 외식을 주의하라

그런데 예수님은 먼저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엄청난 인파가 몰려와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려 했지만, 예수님은 누구보다 제자들을 집중하시고 말씀하십니다. 4절 말씀을 보시면 “내 친구 너희에게”라고도 하십니다. 예수님과 우리가 어느 슈퍼스타와 무리의 관계가 아닌, 선생님과 제자 더 나아가 친구의 관계 맺기를 간절히 사모합니다. 예수님이 시선을 먼저 돌리셔서 말씀하시는 그런 사이가 되기를 소원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바리새인의 누룩을 주의하라고 하십니다. 그 누룩은 바로 외식이었습니다. 그 수많은 무리가 예수님을 만져보기라도 하려고 달려들 때 어찌 보면 제자들의 마음에 외식의 기운이 느껴졌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이 외식이라는 단어는 문자적으로는 아래에서 판단한다는 뜻인데, 마스크를 쓰고 연기한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이 외식을 누룩으로 비유하신 것은, 감탄을 자아냅니다. 우선 누룩은 매우 적은 양으로도 나머지 모든 반죽에 영향을 미칩니다. 또 반죽을 부풀어 오르게 하는 효과가 있습니다.

외식은 아주 사소한 계기에서 시작할지 모릅니다. 어떤 계기가 되었든,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을 의식하지 않는 순간 우리의 시선은 어느새 자신과 주변 사람을 향합니다. 그러면서 자신을 의식하고 남을 의식합니다. 그 누룩은 한 사람 안에서, 그리고 여러 사람 사이에서 빠르게 퍼져 존재와 생각 자체를 바꾸어 버립니다. 삶에서 어떤 면은 외식하고, 또 다른 면은 외식하지 않을 수는 없습니다. 외면과 내면이 확연히 달라지고, 사람에게 칭찬 받으려고 말과 행동이 어긋나기 시작하면 이미 외식이 온몸에 퍼진 것입니다.

그리고 외식에는 부풀어 오르게 하는 효과가 있습니다. 그래서 실상보다 자신을 더 크게 느끼고 의식하게 만듭니다. 하지만 그럴수록 내면은 오히려 한없이 가벼워져 이 사람의 평가나 저 사람의 말 한마디에 완전히 흔들려 버립니다. 외식하는 자는 항상 눈치를 보며 타인과 자신의 상대적인 차이에 집중하기 때문입니다. 이렇듯 우리의 마음과 시선을 절대 가치인 하나님께 두지 않고,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을 의식하지 않으면 자기 사랑에 기인한 외식 현상이 생겨납니다.

누룩을 넣은 빵에도 여러 가지 종류가 있습니다만, 바리새인은 아마도 공갈빵에 해당하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겉은 빵빵하지만 속은 텅텅 비어 한 입 깨물면 다 부서지고 마는 그런 공갈빵 말입니다. 내용은 아무것도 없지만, 거짓으로 그럴듯하게 외형만 유지하는 딱한 모습입니다. 이에 비해 무교병을 생각해 보십시오. 맛있어 보이지도, 맛있지도 않지만 겉과 속이 똑같습니다. 조금도 부풀어 오른 곳이 없습니다. 담백하고 있는 보이는 그대로 자신을 줍니다. 예수님이 바로 이 생명의 무교병이 되셔서 우리에게 먹히기까지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조금도 자신을 부풀리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자신을 비우고 종의 형체를 지니실 정도로 낮아지셨고, 하나님 우편에서 지옥까지 망설임 없이 내려가셨습니다.

우리가 외식하는 근본적인 이유는 십자가에 달리신, 이 무교병 예수님이 계시지 않기 때문입니다. 외식하는 자는 자신이 받아야 마땅하다고 기대하는 수준 이상의 대접을 받지 못할 때 분개합니다. 하지만 진정으로 겸손한 자는 어떤 대접을 받더라도 감사히 여깁니다. 삶의 근거는 내가 아닌 하나님께 있기 때문입니다. 모든 일을 하나님이 허락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처럼 내가 모든 일을 할 수 있다고 담대히 외칩니다.

그런데 오늘날 세상 문화는 외식과 허위의식을 강하게 조장합니다. 티브이에서는 멋지고 아름다운 사람들이 너무나 행복한 듯 웃고 떠들며 맛있는 것을 먹고 좋은 곳을 다니며 화려한 것을 즐깁니다. 페이스북, 인스타그램, 카카오스토리 등등 SNS에는 행복해 보이고, 화려해 보이는 삶의 일부 모습만 담습니다. 이러한 문화에 휩쓸리면 나도 똑같이 멋있고, 똑같이 즐겨야 한다는 강박 관념에 시달리며 예수님을 놓치고 맙니다. 하지만 우리는 압니다. 그러한 외양은 모두 위선 즉 마스크를 쓴 것이며, 외면과 내면이 어긋난 일그러진 모습이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우리 삶에 혹시라도 부풀어 오른 곳이 보인다면 얼른 눈물로 회개하며 그 누룩을 제하여 버립시다. 그 외식이 언제 나를 장악하여 돌이킬 수 없이 부풀어 오르게 만들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2-3) 감추인 것이 드러나지 않을 것이 없고 숨긴 것이 알려지지 않을 것이 없나니 이러므로 너희가 어두운 데서 말한 모든 것이 광명한 데서 들리고 너희가 골방에서 귀에 대고 말한 것이 지붕 위에서 전파되리라

이 두 구절의 말씀이 어떻게 들리십니까? 두려운 말씀으로 들리십니까 아니면 감사한 말씀으로 들리십니까? 부끄러운 이야기이지만 이 설교를 준비하며 깊이 생각해 보기 전까지 이 말씀은 제게 두려운 말씀이기만 했습니다. 1절 말씀과 결합하여 내게 외식하는 요소가 없어야 한다는 무거운 짐만 같았습니다. 하지만 이 말씀을 곰곰이 살펴보니 오히려 정반대의 뜻으로 이해되기 시작했습니다. 물론 일차적으로 아무리 겉이 깨끗해도 속이 탐욕과 악독으로 가득한 모습이 드러나기 마련이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그렇지만 오히려 감추인 것, 숨긴 것, 제자들이 어두운 골방에서 속삭인 것은 아름다운 것일 수도 있다는 깨달음이 왔습니다. 아니, 그래야만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아무도 모르게 감추며 행하고 말한 모든 아름다운 것들이 마침내 드러나게 됩니다. 그리고 그 아름다움은 궁극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모든 위선과 허위의식을 뚫고 나타나는 하나님의 찬란한 빛입니다. 그렇다면 이 말씀은 기쁨이 되지 않을 이유가 전혀 없습니다.

(고전 4:5) 그러므로 때가 이르기 전 곧 주께서 오시기까지 아무 것도 판단하지 말라 그가 어둠에 감추인 것들을 드러내고 마음의 뜻을 나타내시리니 그 때에 각 사람에게 하나님으로부터 칭찬이 있으리라

우리는 칭찬 받을 것입니다! 또 다른 이가 외식하는 모습을 보더라도, 나도 따라야 하지 않는가 하고 두려워하거나 흔들릴 이유가 전혀 없습니다. 그리고 정죄하고 판단할 이유도 없습니다. 어둠에 감추인 것과 마음의 뜻을 나타내실 때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날을 기대하며, 아무것도 부풀리지 말고 예수님처럼 담백하고 겸손하게 살아가기만 하면 그것으로 만족입니다.

예수님은 사람이 아닌 하나님을 의식하며 겸손해야 할 이유를 더욱 심도 있게 밝히십니다. 사람이 외식하는 궁극적인 이유는 무엇입니까? 바로 몸이 한 번 살고 죽는 것으로 끝난다고 생각하면 하나님이 두렵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죽음이 두렵습니다. 이 세상의 삶이 전부라면 외식하지 않을 이유가 전혀 없습니다. 사람에게 잘 보이기 위해 자신을 감추거나, 사람을 압제하기 위해 자신을 부풀려야만 합니다. 내면에 무한한 절대 가치가 없기에 유한한 육체의 소욕을 만족시키기 위해 무엇이든 행합니다. 하나님을 모르는 이들에게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은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에 불과합니다. 따라서 그들은 이 세 요소를 두루두루 충족시키기 위해 어떤 일도 마다하지 않고 맹렬히 살아갑니다. 하지만 문제는 실상이 그렇지 않다는 점입니다. 근래에 유행했던 말 YOLO(You Only Live Once)처럼 한 번만 살 것 같지만, 부활절 설교 말씀처럼 우리는 마땅히 두 번 태어나 두 번 살도록 창조되었기 때문입니다.

어느 편에 설 것인가 (4-12절)

(4-5) 내가 내 친구 너희에게 말하노니 몸을 죽이고 그 후에는 능히 더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라 마땅히 두려워할 자를 내가 너희에게 보이리니 곧 죽인 후에 또한 지옥에 던져 넣는 권세 있는 그를 두려워하라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를 두려워하라

예수님은 제자들을 친구라고 칭하십니다. 제자들은 잘 모르고 있었지만, 그들은 곧 목숨이라도 부지하기 위해 위선을 행해야 할지도 모르는 형편에 처하게 됩니다. 그들에게 두려움이란 실질적인 공포로서, 육체의 고통을 수반하는 죽음 자체였습니다. 선지자를 죽이고 무덤을 만들었던 그들이 가장 먼저 죽일 대상은 예수님이었고, 그다음은 제자들이었습니다. 이 사실을 아시는 예수님은 사랑하는 마음으로 같은 배를 탄 친구라고 부르셨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단호히 말씀하십니다. 저들을 두려워하지 말라! 죽지 않는다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그저 죽인 후에 지옥에도 넣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얼마나 중요한지 세 번이나 하나님을 두려워하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은 지옥을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오늘 우리는 과연 지옥, 그리고 지옥에 보내시는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있습니까? 두려워해야 할 대상을 두려워하면 그 외는 전혀 두렵지 않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두려워함, 즉 하나님 경외는 오히려 하나님 사랑과 신뢰로 진행합니다.

(6-7) 참새 다섯 마리가 두 앗사리온에 팔리는 것이 아니냐 그러나 하나님 앞에는 그 하나도 잊어버리시는 바 되지 아니하는도다 너희에게는 심지어 머리털까지도 다 세신 바 되었나니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는 많은 참새보다 더 귀하니라

예수님은 당시 유대에서 많이 쓰던 논법, 즉 작은 것에서 큰 것을 끌어내는 방식을 사용합니다. 참새 다섯 마리는 두 앗사리온에 가격에 팔립니다. 앗사리온은 하루 일당인 한 데나리온의 16분의 1에 해당하는 적은 금액입니다. 시장에서 팔리는 가장 저렴한 먹거리인 참새 하나도 잊지 않으시는 하나님이 너희를 잊으시겠느냐는 반문입니다. 마치 신생아가 마시는 분유를 꼼꼼히 챙기는 어머니가 그 아이는 얼마나 보살피겠냐는 말입니다. 게다가 우리의 머리털도 다 세신다고 이야기하십니다. 우리가 자신을 아무리 사랑해도 머리숱은커녕 속눈썹도 세지 못합니다. 우리가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는 궁극적인 이유는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이 우리를 잘 아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삶을 얼마나 세밀하게 바라보고 계십니까? 우리의 날수가 이미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죽도록 허락하셨다면 그에 합당한 이유가 있습니다. 또 차라리 세상을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이 훨씬 더 좋은 일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무엇을 두려워하겠습니까?

(8-9) 내가 또한 너희에게 말하노니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인자도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서 그를 시인할 것이요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는 자는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서 부인을 당하리라

하지만 예수님은 제자들이 처한 사정을 모르고 달콤한 말로 꾀시는 것은 아닙니다. 분명히 사람 앞에서 예수님을 시인하는 일은 죽음을 감수하는 어려운 일임을 아셨습니다.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을 아시기에 정확히 판단해주십니다. 사람 앞에서 주님을 안다고 하면 주님이 나를 안다고 하시고, 사람 앞에서 주님을 모른다고 하면 주님이 나를 모른다고 하신다는 말씀입니다. 여기서 죽으면 영원히 살고, 여기서 살면 영원히 죽는다는 뜻입니다.

갑자기 배경이 마지막 심판의 자리까지 이동합니다. 이는 우리가 살아가는 모든 순간은 영원과 심판의 관점에서 조망되어야 한다는 엄숙한 깨달음을 제공합니다. 우리의 말 한마디, 행동거지 하나가 영원에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은 우리를 진지하게 만듭니다. 우리는 비록 이 세상에서 살지만, 동시에 영생의 첫 순간을 살아갑니다. 오늘 하루 사람 앞에서 예수님을 시인하고 그리스도인으로 살기가 너무 벅차고 불가능해 보이는 상황에 닥칠지 모릅니다. 예수님을 인정하고 시인하면 내 목숨줄이 끊길 것 같은 관계가 처할지도 모릅니다. 예수님은 그러한 상황이 없다고 절대 말씀하시지 않습니다. 다만 무엇을 인정하는 일이 더 중요한지 분명히 알려주셨습니다. 우리가 처할 운명을 깊이 생각합시다. 그리고 그 경중을 따져봅시다. 그러면 갈 길은 분명합니다.

(10) 누구든지 말로 인자를 거역하면 사하심을 받으려니와 성령을 모독하는 자는 사하심을 받지 못하리라

이 말씀은 난해구절입니다. 9절에서 예수님을 사람 앞에서 부인하는 자는 예수님이 부인한다고 하시고서는, 말로 인자를 거역하면 사하심을 받는다고 하십니다. 그런데 또 성령을 모독하는 일은 사하심을 받지 못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여러 가지 이야기가 가능하지만, 베드로를 떠올려 보십시오. 그는 저주하며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했습니다. 또 바울은 어떠했습니까? 예수님께 맞서 예수 믿는 자들을 죽이러 다녔습니다. 하지만 이들은 사하심을 받았습니다. 그에 비해 유다는 마음의 가책을 받았지만 돌아서지 않았습니다. 또 유대인들은 항상 성령을 거슬렀습니다. 이것이 바로 끝까지 부르시는 성령을 모독하는 죄입니다. 말로 예수님을 거역하여 말하는 일은 용서함이 있지만,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시며 주님이심을 증거하는 성령님을 끝까지 거부하며 성령을 모독하는 자는 용서함을 받지 못합니다. 그리고 주님은 마지막 위로의 말씀을 주십니다.

(11-12) 사람이 너희를 회당이나 위정자나 권세 있는 자 앞에 끌고 가거든 어떻게 무엇으로 대답하며 무엇으로 말할까 염려하지 말라 마땅히 할 말을 성령이 곧 그 때에 너희에게 가르치시리라 하시니라

성령은 우리를 일깨우시는 영입니다. 그들은 유대인, 권력가, 로마 권력에 끌려가 심문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인정하든지, 부인하든지 선택해야 합니다. 예수님을 증거해야 합니다. 하지만 염려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성령이 가르치시기 때문입니다. 핍박을 당해 어디로 끌려가든 두려워하지 말라는 준엄한 명령입니다. 오늘 어디로 가시든지 해야 할 말을 두려워하지 말고, 끝까지 주님을 고백하십시오. 실패할지라도 알게 하시는 성령으로 다시 일으키시고 붙잡아주시니 절대 포기하지 마십시오.

오늘 말씀을 살펴보면 외식을 주의하라 명하시고 마침내 드러나실 예수님, 그리고 드러내시는 예수님을 바라보라고 명하십니다. 그 후에는 마치 병주고 약주듯, 으름장을 놓았다가 달래시기를 반복하십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라고 명하시고는, 머리털을 헤아리시듯 사랑한다고 말씀하십니다. 나를 부인하면 부인당하고, 성령을 모독하면 사하심을 받지 못한다고 선포하시고는, 염려하지 말고 성령을 의지하라고 하십니다. 주님은 우리의 현실을 모르지 않으십니다. 사람을 두려워하기 쉽고, 예수님의 이름을 부인할 수밖에 없는 것처럼 보이는 현실은 분명히 존재합니다. 오늘 우리 중 대다수가 그런 부담감과 압박감을 느끼며 하루를 시작하고 또 절망스러운 현실에 부딪히게 될지 모릅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결론은 분명합니다. 예수님을 의식하고 예수님께 인정받을 것인가, 사람을 의식하고 사람에게 인정받을 것인가 결정해야 합니다. 자신을 의식하여 외식에 이르지 마시고 하나님을 의식하여 성령님을 인정하는 겸손에 이르십시오. 성령님께서는 우리가 마땅히 해야 할 말과 행동을 분명히 가르치시고 인도해 주십니다.


기 도
하나님 아버지.
우리 안에 외식하는 면이 없게 하여 주시옵소서. 항상 깨어 이 누룩을 주의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우리의 머리털까지 다 헤아리시는 주님을 의지하며, 주신 약속을 신뢰하며 살아가겠습니다. 개인의 종말과 역사의 종말을 항상 의식하며 말씀을 푯대 삼겠습니다. 오늘 우리가 주님을 인정해야 하는 자리에서 담대하게 주님을 인정할 수 있도록, 담대함과 믿음을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묵상을 돕는 질문
1. 내 안에 부풀어 오른 곳은 없습니까?
2. 2절과 3절 말씀이 두려운 말씀으로 들리십니까? 아니면 감사한 말씀으로 들리십니까?
3. 사람 앞에서 예수님을 시인하지 못하신 경험이 있으십니까? 왜 그렇게 행동하셨습니까?
4. 사람 앞에서 예수님을 시인할 때 성령님이 어떻게 도우셨습니까? 성령님이 오늘도 내주하시며 도우심을 신뢰하십시오.

(작성: 이대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