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마가복음 7:1-23
찬송가 286장 ‘주 예수님 내 맘에 오사’
정결의식 논쟁(1-5절)
마가복음 6장 전반부에는 예수님께서 고향, 나사렛 사람들로부터 배척당하신 일에 대해서 증거합니다. 오늘 본문에도 예수님께서 사람들로부터 배척당하신 일에 대해서 증거합니다. 특히 예루살렘 산헤드린 공회(오늘날의 국회와 교단 총회를 합친 기관)에서 파견된 사람들과의 전통에 대한 논쟁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1) 바리새인들과 또 서기관 중 몇이 예루살렘에서 와서 예수께 모여들었다가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예수님께 시비 거는 것은 거의 습관에 가깝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들은 ‘예루살렘’에서 왔다고 합니다.
어제 말씀에서 예수님께서는 새벽, 해 뜨기 전에 갈릴리 호수 위를 걸으셔서, 제자들이 힘겹게 노를 젓는 배에 타시고는 게네사렛까지 가셨습니다. 게네사렛은 갈릴리 호수 북서쪽에 위치한 마을입니다. 예루살렘에서 게네사렛까지는 약 150km나 됩니다. 그 거리를 걸어서 가려면, 최소한 4-5일 걸립니다. 바리새인들과 몇몇 서기관들은 그 먼 거리를 걸어서 예수님께로 왔습니다.
이 사람들이 예루살렘에서 왔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이스라엘의 북쪽 갈릴리에서 사역하고 계셨을지라도, 그 소문이 이스라엘 남쪽에 위치한 유대 지방은 물론 수도 예루살렘에까지 퍼졌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대제사장을 비롯한 종교지도자들은 계속 확장되어가는 예수님의 사역을 견제하기 위해서 제동을 걸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예수님의 사역을 막을 수 없음은, 주님이 진리이시고 생명이시기 때문입니다.
(2) 그의 제자 중 몇 사람이 부정한 손 곧 씻지 아니한 손으로 떡 먹는 것을 보았더라
예루살렘에서 파견된 사람들은 예수님의 일행을 면밀하게 관찰한 후에, 시빗거리를 찾았습니다. 예수님의 제자 중 몇몇이 부정한 손, 씻지 않은 손으로 빵을 먹는 것을 보았습니다. ‘부정한(코이노스)’이라는 단어는 ‘구별하지 않다’라는 뜻입니다. ‘거룩’이 ‘구별’이라는 뜻이니까, ‘구별하지 않은’ 것은 곧 ‘부정한’ 것이 되고 말았습니다. 유대인들은 안식일에는 그때만 사용하는 그릇이 있었습니다. 누룩이 없는 음식을 담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렇게 그릇을 구별하여 쓰는 것은 귀한 일입니다. 그러나 누군가가 평상시에 쓰는 그릇을 깨끗하게 씻은 후에 안식일에 쓰는 것을 보고서, 그것이 틀린 것이라고 말한다면, 그 말이 틀린 것이 됩니다.
당시 이스라엘을 비롯한 중동지방에 사는 사람은 식사할 때에 숟가락과 젓가락, 또는 포크와 나이프와 같은 도구를 사용하지 않고, 손으로 먹었습니다. 그래서 식사 전에 손을 씻는 것은 위생 관례였습니다.
그런데 바빌론 포로 이후에 그것이 거룩함에 이르는 정결 의식이 되어, 종교 행위가 되고, 그것이 이어지자 그들의 전통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손을 씻을 때도, ‘고인 물은 부정하므로, 흐르는 물에서만 씻어야 한다’와 같은 규정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제자들은 손을 씻지도 않고 빵을 먹었습니다. 그것에 대해 시비를 거는데, 씻지 않은 손으로 빵을 집어 먹는 것은 ‘비위생적이다’가 아니라, ‘비전통적이다’ 또는 ‘비신앙적이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3절과 4절은, 바리새인들과 유대인들이 장로들의 전통을 지키기 위해서 손을 제대로 씻지 않고서는 음식을 먹지 않았고, 시장에서 돌아오면 몸을 씻지 않고는 음식을 먹지 않았으며, 그 밖에도 지키는 여러 가지 전통이 있는데, 여러 그릇을 씻었다는 내용을 전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3-4절은 ‘괄호’로 묶여 있습니다. 마가복음이 기록된 중요한 이유 중의 하나는 로마 사람들에게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신지, 또 어떤 일을 하셨는지를 알리기 위함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구약의 언어를 알지 못하기 때문에 히브리어나 아람어는 다시 번역하며, 익숙하지 않은 유대의 풍속은 설명합니다. ‘보아너게(3:17)’는 ‘우레의 아들’, ‘달리다굼(5:41)’은 ‘소녀야 일어나라’라고 다시 번역합니다. 또한 ‘무교절의 첫날(14:12)’은 ‘유월절 양을 잡는 날’이라고 설명합니다.
그래서 ‘손을 씻는 전통’을 로마 사람들 또는 이방인들은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3-4절에 따로 설명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2절은 5절로 이어집니다.
(5) 이에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예수께 묻되 어찌하여 당신의 제자들은 장로들의 전통을 준행하지 아니하고 부정한 손으로 떡을 먹나이까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예수님의 제자들이 ‘장로들의 전통’을 지키지 않는다고 비난했습니다. 그것은 제자들에 대한 비난이 아니라, 그들의 스승이신 예수님에 대한 비난이었습니다. 예루살렘에서 온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자타가 공인하는 ‘율법 지킴이들’이었을 것입니다.
본래 ‘손을 씻는 규례’는 제사장들이 제사를 집례할 때에만 적용되었습니다(출 30:18-21). 일상생활에는 그런 규정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장로들의 전통’이라는 명목으로 성경 말씀 외에 수많은 규정과 규칙을 만들고, 그것들을 열심히 지켰으며, 결국엔 그 규정을 어긴 사람들을 판단하고 정죄까지 하게 된 것이었습니다. 처음에 그들은 “우리가 제사장은 아니지만, 제사장처럼 정결하게 하자”라고 순수한 헌신의 발로로 손을 씻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세월이 지나자 그 중심은 사라지고, 전통만 남아서 하나님의 말씀보다 더 우위에서 군림하게 되었던 것이었습니다.
사람의 유전 vs. 하나님의 계명(6-13절)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의 주장에 어이가 없으신 예수님께서는 이사야 29:13의 말씀을 인용하셨습니다.
(6) 이르시되 이사야가 너희 외식하는 자에 대하여 잘 예언하였도다 기록하였으되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외식하는 자’의 문자적인 의미는 ‘가면을 쓴 사람’입니다. 그리고 ‘입술’이 ‘말’과 ‘표면’, ‘형식’이라면, ‘마음’은 ‘삶’과 ‘내면’, ‘본질’입니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을 비롯한 율법주의자들은 말로는 그리고 겉으로는 하나님을 존중하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삶으로는 그리고 중심으로는 하나님과 동떨어져 있었습니다.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경험하게 됩니다. 어떤 사람의 말이 아무리 구구절절 옳아도 그 삶이 바르지 않으면, 그 말은 공기만 진동하는 공허한 울림만 됩니다. 왜냐하면 말의 소리나 겉의 소리보다, 삶의 소리와 중심의 소리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크기 때문입니다.
(7-8)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니 나를 헛되이 경배하는도다 하였느니라 너희가 하나님의 계명은 버리고 사람의 전통을 지키느니라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겉으로는 하나님의 말씀인 계명을 지키는 것처럼 보였을지라도, 실상은 그 계명을 백성들을 통제하는 수단으로 삼았고, 하나님을 높이기보다 자신들을 높였던 것입니다. 특히 8절에 대조되는 두 동사가 있는데, ‘버리다’와 ‘지키다’입니다. 즉 그들은 버리지 말아야 할 것은 버리고, 지키지 말아야 할 것은 지켰습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에서도 버려야 할 것과 지켜야 할 것을 바르게 분별해서 순종하는 것이 신실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지켜야 할 것과 버리는 것에 대해서 다시 반복해서 말씀하셨습니다.
(9) 또 이르시되 너희가 너희 전통을 지키려고 하나님의 계명을 잘 저버리는도다
‘지키다’의 문자적인 뜻은 ‘세우다’입니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세워야 할 ‘하나님의 계명’은 세우지 않고, 대신해서 세우지 말아야 할 ‘장로들의 전통’을 세웠던 것입니다. 또 ‘저버리다’의 문자적인 뜻은 ‘옮기다’ 또는 ‘제거하다’입니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옮기거나 제거하지 말아야 할 ‘하나님의 계명’은 옮기고 제거하면서, 반대로 옮기고 제거해야 할 ‘장로들의 전통’은 옮기지도 않고, 제거하지도 않았던 것입니다. 신앙은 제자리에 두어야 할 것을 두는 것이며, 치워야 하는 것은 치우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하나님의 계명을 어떻게 왜곡했는지를 한 예를 들어서 설명하셨습니다.
(10-13) 모세는 네 부모를 공경하라 하고 또 아버지나 어머니를 모욕하는 자는 죽임을 당하리라 하였거늘 너희는 이르되 사람이 아버지에게나 어머니에게나 말하기를 내가 드려 유익하게 할 것이 고르반 곧 하나님께 드림이 되었다고 하기만 하면 그만이라 하고 자기 아버지나 어머니에게 다시 아무 것도 하여 드리기를 허락하지 아니하여 너희가 전한 전통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폐하며 또 이같은 일을 많이 행하느니라 하시고
‘고르반’은 구약시대에 하나님께 드리는 제물이나 예물을 가리키는 데 사용된 말이었습니다. 그래서 ‘고르반, 하나님께 드리는 제물’이라고 맹세하면, 그 물건은 아무도 손대지 못했습니다. 처음에는 자신이 드리는 예물을 구별하여 하나님께 드리기 위해서 시작되었습니다. 그런데 세월이 지나고 나니까, 부모를 공경하지 하지 않는 수단으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어떤 물건을 분명히 부모에게 드려야 하는데, 그것을 ‘고르반’이라고 말하므로, 부모에게 드리지 않았던 것입니다. 사실은 하나님께도 드리지도 않았습니다. 그래서 겉으로는 마치 계명을 지킨 것으로 보였지만, 실상은 하나님도 속이고, 부모도 속이는 어처구니없는 행위를 자행했던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부모에게 드려야 할 것을 하나님께 드린다고 고르반이라고 말했던 사람이 자신이 잘못했음을 뉘우치고, 그것을 다시 부모에게 드리려고 하면,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이미 고르반이라고 했기 때문에 하나님께 드려야지 부모에게 드릴 수 없다고 했습니다. 그들은 그와 같은 일을 많이 자행했다고 예수님께서는 지적하고 있습니다.
사람의 내면, 죄악의 근원(14-23절)
예수님께서는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과 함께한 장로들의 전통에 대한 논쟁을 일단락하시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14-16) 무리를 다시 불러 이르시되 너희는 다 내 말을 듣고 깨달으라 무엇이든지 밖에서 사람에게로 들어가는 것은 능히 사람을 더럽게 하지 못하되 사람 안에서 나오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니라 하시고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을 비롯한 장로들의 전통 지키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은 음식을 먹기 전에 손을 열심히 씻었습니다. 그것이 신앙 행위가 될 정도로 열심히 씻었습니다. 음식을 먹을 때에 손을 씻는 것은 위생적으로 굉장히 바람직합니다. 하지만 손을 열심히 씻는다고 해서, 그가 정결한 사람인 것은 결코 아닙니다.
우리 성경에는 또렷하게 나타나 있지 않지만, ‘밖에서 사람에게로 들어가는 것’은 단수로 표현되어 있고, ‘사람 안에서 나오는 것’은 복수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예레미야 선지자가 말한,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렘 17:9)”라는 말씀이 저절로 떠오릅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정결하게 해야 할 것은 손이 아니라 마음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의 진의를 알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그 비유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물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이렇게 답변하셨습니다.
(18-19)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도 이렇게 깨달음이 없느냐 무엇이든지 밖에서 들어가는 것이 능히 사람을 더럽게 하지 못함을 알지 못하느냐 이는 마음으로 들어가지 아니하고 배로 들어가 뒤로 나감이라 이러므로 모든 음식물을 깨끗하다 하시니라
음식이 사람을 정결하지 못하게, 즉 부정하게 할 수 없는 것은, 사람이 음식을 먹었을 때 그것이 마음으로 들어가지 않고, 배(위)로 가서 다시 배설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굉장히 중요한 선언입니다. 구약성경에는 정한 음식과 부정한 음식이 나옵니다. 그것에 마침표를 찍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후에, 사도 베드로가 고넬료 집을 방문했을 때, 사도 바울이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했을 때, 음식에 대한 문제에 있어서 자유할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어떤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인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20-23) 또 이르시되 사람에게서 나오는 그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 속에서 곧 사람의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 곧 음란과 도둑질과 살인과 간음과 탐욕과 악독과 속임과 음탕과 질투와 비방과 교만과 우매함이니 이 모든 악한 것이 다 속에서 나와서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
사람의 마음속에서 나오는 악한 생각, 음란에서 우매함까지, 12가지를 말씀하시는데, 정직하게 우리의 속을 들여다보면 우리도 이 조목들에서 자유할 수 없습니다. 우리의 속이 악한 생각들로 가득 차 있고, 그런 것들은 방치하면서 겉사람만 정결하게 하려고 한다면, 점점 더 외식적인 그리스도인이 될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롬 12:2)”고 권면합니다.
우리가 어떻게 우리 속사람을 정결하게 할 수 있겠습니까? 오직 여호와 하나님을 우리의 힘으로 삼고,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의 마음에 두는 것 외에는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정결하기 때문에, 그 말씀을 우리 속에 두면, 그 말씀이 우리를 정결하게 만듭니다. 오늘 하루도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 마음에 두는 한 날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기 도
하나님 아버지!
오늘 말씀을 통해서 우리의 겉사람뿐만 아니라 더욱더 속사람이 정결해야 함을 되새기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날마다 정결한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 마음에 두게 하여 주시옵소서.
하나님 아버지,
우리나라를 비롯한 온 세계가 코로나-19 감염으로 인해서 힘든 상황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긍휼을 구합니다. 정부와 단체, 개인이 감당하고 있는 바이러스 확산방지 노력이 효과가 있게 하시고, 감염자들과 그 가족들, 의료진들을 붙들어 주옵소서. 이 과정을 통해서 인간들이 겸손하게 하시고, 하나님을 더욱 존중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묵상을 돕는 질문
1.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하나님의 계명’이 아니라 ‘장로들의 전통’을 지켰습니다. 당신이 지키고 있는 전통은 무엇입니까?
2. 유대인들은 ‘고르반’이라는 것으로, 부모 공경하는 것을 회피했습니다. 당신의 믿음 생활에는 하나님의 말씀을 왜곡하고 있는 부분은 없습니까? 거기에서 어떻게 돌이키실 수 있겠습니까?
3. 21-23절에는 사람의 마음에서 나오는 악한 생각들이 12가지가 있습니다. 이 중에서 당신에게 가장 많이 걸리는 것들은 무엇입니까? 어떻게 마음을 새롭게 하실 수 있겠습니까?
4. 자기 생각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에 두며, 여호와 하나님을 나의 힘으로 삼기 위하여 무엇을 결단하시겠습니까?
(작성 : 정한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