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에스겔 33:1-33
찬송가 288장 ‘예수로 나의 구주 삼고’



에스겔의 소명(1-9절)
유다를 적대시했던 주변 나라에 대한 심판의 예언은 25장에서 시작하여 32장으로 마침표를 찍고, 33-39장에서는 하나님의 은혜에 의한 유다의 회복에 대해서 증거하고, 40-48장은 마지막 날에 이루어질 일에 대한 환상, 즉 새 성전, 새 예배, 새 땅에 대한 환상에 대해 증거합니다.
1-9절은 에스겔의 소명에 대해서 증거합니다.
유다는 바빌로니아제국의 3차에 걸친 대대적인 공격으로 무너졌습니다. B.C. 605년이 1차 공격을 받았던 때이었는데, 이 때에 다니엘을 비롯한 유다의 젊은이들이 끌려갔습니다. 그리고 B.C. 597년이 2차 공격을 받은 때이었는데, 이 때에 유다왕 여호야긴을 비롯하여 에스겔 선지자와 수많은 사람이 끌려갔습니다. 그리고 B.C. 586년에 예루살렘 성전을 비롯하여 유다가 완전히 무너졌고, 두 눈이 뽑힌 시드기야왕과 함께 많은 사람이 끌려가서 유다에는 유력한 사람들이 없을 지경이 되었습니다.

오늘 본문 21절에 보면 ‘우리가 사로잡힌 지 열두째 해 열째 달 다섯째 날에’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에스겔 선지자와 여호야긴왕은 바빌로니아제국의 2차 공격 때인 B.C. 597년에 끌려왔습니다. 그때로부터 12년 10월 5일이라고 하는 것은 B.C. 585년의 일입니다. 즉 유다가 완전히 무너진 지 1년이 지난 시점입니다.
이 때에 유다 백성들(예루살렘에 있는 사람들이나 바빌론에 있는 사람들 모두)은 깊은 실망감에 빠져있었습니다. 그들은 바빌로니아제국이 아무리 신흥 강대국이어도 전통강대국인 애굽이 자신들을 지켜줄 것이라고 굳게 믿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성전이 파괴되고, 나라가 무너지는 절체절명의 위기에서도 애굽은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하는 종이호랑이와도 같았습니다.

(2-4) 인자야 너는 네 민족에게 말하여 이르라 가령 내가 칼을 한 땅에 임하게 한다 하자 그 땅 백성이 자기들 가운데의 하나를 택하여 파수꾼을 삼은 그 사람이 그 땅에 칼이 임함을 보고 나팔을 불어 백성에게 경고하되 그들이 나팔 소리를 듣고도 정신차리지 아니하므로 그 임하는 칼에 제거함을 당하면 그 피가 자기의 머리로 돌아갈 것이라

‘파수꾼’은 본래 성벽 위에 배치된 군인으로 적군의 침입이나 움직임을 감지하여 알리는 책임을 진 사람입니다. 그들이 자신들의 막중한 임무를 게을리하여 적의 동태를 제대로 알리지 못했을 때는 죽임을 당하기도 했습니다. 6·25전쟁 때, 인천상륙작전을 지휘했던 맥아더 장군은 “전투에서 실패한 지휘관은 용서할 수 있지만, 경계에서 실패하는 지휘관은 용서할 수 없다.”라고 말하여, 경계의 중요성을 강조했습니다. 그래서 파수꾼이 졸거나 잠을 자다가 적군의 동태를 파악하지 못하거나, 파악했더라도 백성들에게 알리지 않으면 그것은 전적으로 파수꾼의 책임이지만, 철저한 경계로 적군의 동태를 충분히 알렸음에도 백성들이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면, 그것은 전적으로 백성들의 책임이었습니다.

(7-9) 인자야 내가 너를 이스라엘 족속의 파수꾼으로 삼음이 이와 같으니라 그런즉 너는 내 입의 말을 듣고 나를 대신하여 그들에게 경고할지어다 가령 내가 악인에게 이르기를 악인아 너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였다 하자 네가 그 악인에게 말로 경고하여 그의 길에서 떠나게 하지 아니하면 그 악인은 자기 죄악으로 말미암아 죽으려니와 내가 그의 피를 네 손에서 찾으리라 그러나 너는 악인에게 경고하여 돌이켜 그의 길에서 떠나라고 하되 그가 돌이켜 그의 길에서 떠나지 아니하면 그는 자기 죄악으로 말미암아 죽으려니와 너는 네 생명을 보전하리라

하나님께서는 에스겔 선지자를 이스라엘 족속의 파수꾼으로 세우셨다고 말씀하십니다. 파수꾼에게 가장 중요한 역할은 경계인데, 그것이 중요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백성의 목숨이 달려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유다, 이스라엘 족속의 파수꾼으로 세움을 받은 에스겔 선지자에게 가장 중요한 역할은 그들에게 ‘경고하는 것’과 ‘그들의 길에서 떠나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경고를 받고 악한 길에서 떠나지 않으면, 그들의 삶의 길은 곧 죽음의 길이 되기 때문이었습니다. 오늘 본문 2-9절까지 여덟 절에서 ‘경고하다’가 8번이나 나옵니다. 그것은 경고를 하는 것과 듣는 것이 몹시도 중요한 것임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파수꾼의 역할과 같이 영적인 파수꾼도 경고를 하지 않아서 백성이 듣지 못하여 죽음의 길을 가게 되면 그것은 영적인 파수꾼의 책임이지만, 경고를 듣고도 그 길을 돌이키지 않으면, 그것은 백성의 책임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의무도 있고,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의무도 있습니다. 우리가 예배의 자리와 성경말씀을 배우는 자리에서는 들을 의무가 있습니다. 또한 가정에서 자녀들에게나,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할 사람들 앞에서는 전할 의무가 있습니다. 이 두 가지를 함께 잘 감당하는 것이 하나님의 자녀다운 자녀이고, 신실한 그리스도인입니다.


개인의 책임(10-20절)
10-20절은 개인의 책임을 강조합니다. 비록 바빌론에 포로가 되어있을지라도, 각자가 회개하면 구원을 받게 될 것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10) 그런즉 인자야 너는 이스라엘 족속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말하여 이르되 우리의 허물과 죄가 이미 우리에게 있어 우리로 그 가운데에서 쇠퇴하게 하니 어찌 능히 살리요 하거니와

바빌론으로 포로가 되어 끌려온 사람들은 짙은 패배의식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그들은 스스로 반문하기를 “우리의 온갖 허물과 죄가 우리를 짓누르고 있어서 죽어가고 있는데 어떻게 살아날 수 있겠습니까?”라며 자책했습니다. 이런 절망적 사고는 하나님에 대한 원망과 직결되어 있습니다.
(17) 그래도 네 민족은 말하기를 주의 길이 바르지 아니하다 하는도다 그러나 실상은 그들의 길이 바르지 아니하니라
(20) 그러나 너희가 이르기를 주의 길이 바르지 아니하다 하는도다 이스라엘 족속아 나는 너희가 각기 행한 대로 심판하리라 하시니라

‘주의 길이 바르지 아니하다’는 ‘하나님은 공평하지 않으시다’의 의미입니다. 하나님이 정말 하나님이시라면 우리에게 이러실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를 당신이 선택하신 백성이라고 해 놓고, 나라를 망하게 하시고, 포로로 끌려와 고통과 고난을 겪게 하시는 것은 있을 수가 없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공평하지 않은 것은 내가 아니라 너희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나에게 어떻게 했는지? 어떤 삶을 살았는지를 정직하게 생각해 보라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하나님께서는 에스겔 선지자를 통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11) 너는 그들에게 말하라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나의 삶을 두고 맹세하노니 나는 악인이 죽는 것을 기뻐하지 아니하고 악인이 그의 길에서 돌이켜 떠나 사는 것을 기뻐하노라 이스라엘 족속아 돌이키고 돌이키라 너희 악한 길에서 떠나라 어찌 죽고자 하느냐 하셨다 하라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삶을 두고 맹세하시기를 죄를 지은 사람들이 죽기를 원하지 않으며, 그들이 지금의 삶에서 돌이켜 떠나기를 요청하십니다. ‘돌이키다’와 ‘떠나다’가 같은 단어입니다. 모두 ‘회개하다’를 의미하는 말입니다. 회개는 눈물을 흘리며 뉘우치는 것을 뜻하는 말이 아닙니다. 심보를 바꾸고, 생각을 바꾸어서 이전의 삶을 청산하고 새로운 삶을 사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을 등진 삶에서 하나님을 향하는 삶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외면했던 삶에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삶으로 바꾸는 것입니다.

(18-19) 만일 의인이 돌이켜 그 공의에서 떠나 죄악을 범하면 그가 그 가운데에서 죽을 것이고 만일 악인이 돌이켜 그 악에서 떠나 정의와 공의대로 행하면 그가 그로 말미암아 살리라

‘돌이켜’가 모두 ‘회개하다’와 같은 단어입니다. 이 말씀에서 중요한 것은 ‘죄를 지었느냐 짓지 않았느냐 보다 어디서 어디로 돌이켰느냐’입니다. 또한 과거보다 현재가 더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은 끊임없이 어디에서 어디로 돌이키는 것의 연속입니다. 그 돌이킴이 의로움에서 불의함으로, 정의로움과 공의로움에서 욕망으로 돌이킴이라면 영벌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고, 반대라면 영생이 기다리고 있을 것입니다. 또한 과거의 죄악된 삶에서 현재의 의로운 삶으로의 돌이킴이라면 생명과 상급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고, 현재의 의로운 삶에서 과거의 죄악된 삶으로 돌이킴이라면 죽음과 심판이 기다리고 있을 것입니다.


예루살렘의 함락과 경고 그리고 교훈(21-33절)
21-33절은 예루살렘의 함락과 유다에 남은 사람들에 대한 경고 그리고 포로민에게 주는 교훈에 대해서 증거하고 있습니다.
에스겔 선지자는 예루살렘이 무너진 지 1년이 훨씬 지나서 그 소식을 듣게 되었습니다. 이 사실은 에스겔 선지자에게는 물론 포로로 잡혀 온 사람들에게 굉장한 충격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들은 비록 자신들은 끌려왔을지라도, 예루살렘은 무너지지 않을 것이라는 기대가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자손들이 출애굽하여 가나안을 정복하고 살게 되었을 때, 난공불락의 지역으로 수백 년 동안 차지하지 못한 곳이 있었습니다. 그곳은 여부스 족속이 살고 있었던 곳, 시온산성이었는데, 그곳을 다윗왕이 전쟁에 승리하여 차지하고서 다윗성이라고 이름을 지었습니다. 그곳이 바로 예루살렘입니다. 그만큼 난공불락의 도시라고 여겨졌고, 게다가 거기에는 성전이 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곳은 함락되지 않게 하실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곳이 함락되었다고 합니다.

이 사건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24-25) 인자야 이 이스라엘의 이 황폐한 땅에 거주하는 자들이 말하여 이르기를 아브라함은 오직 한 사람이라도 이 땅을 기업으로 얻었나니 우리가 많은즉 더욱 이 땅을 우리에게 기업으로 주신 것이 되느니라 하는도다 그러므로 너는 그들에게 이르기를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너희가 고기를 피째 먹으며 너희 우상들에게 눈을 들며 피를 흘리니 그 땅이 너희의 기업이 될까보냐

B.C. 605년과 B.C. 597년의 두 번에 걸친 예루살렘의 함락으로 많은 사람이 바빌론으로 끌려간 후에, 예루살렘에 남은 사람들은 하나님의 심판이 이제는 끝났다고 생각했습니다. 끌려간 사람들이 그렇게 된 것은 자신들의 죄 때문이고, 전체를 대신해서가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남겨진 사람들은 자신들이 의롭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끌려가지 않게 해 주셨다고 주장했습니다.
남아 있던 사람들은 점점 교만해져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이 혼자일 때도 이 땅을 주셨는데(아브라힘이 이삭을 바치려고 했던 모리아산이 바로 성전이 세워진 곳), 자신들은 숫자도 많은데, 자신들이 예루살렘을 차지하지 못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즉 하나님께서 당연하게 주실 것이기 때문에 망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기가 찬 하나님께서는 “너희가 고기를 피째 먹고, 우상숭배에 눈멀었고, 사람들에게 피를 흘리게 하지 않았냐? 그러면서도 그 땅을 차지하려고 하느냐?”라며 반문하셨습니다.

(29) 내가 그들이 행한 모든 가증한 일로 말미암아 그 땅을 황무지와 공포의 대상이 되게 하면 그 때에 내가 여호와인 줄을 그들이 알리라 하라

예루살렘에 남아 있던 사람들이 생각했던, 예루살렘은 영원히 자신들의 것이며, 망하지 않을 것이라는 바르지 못한 생각에, 하나님께서는 정문일침을 가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 사람이 만든 최초의 대중가요가 ‘황성옛터’인데, 폐허가 된 고려 수도를 보고 탄식하는 노래입니다. 2절 앞부분 가사가 이러합니다. ‘성은 허물어져 빈터인데 방초만 푸르러 세상이 허무한 것을 말하여 주노나’ 예루살렘 주민들은 ‘황성옛터’가 아니라 ‘예루살렘 옛터’를 수도 없이 불러야 했을 것입니다.

예루살렘에 남아 있는 사람들이 참으로 악하였다면, 바빌론으로 끌려온 사람들은 달랐는가? ‘아니다’가 하나님의 평가입니다.
(32-33) 그들은 네가 고운 음성으로 사랑의 노래를 하며 음악을 잘하는 자 같이 여겼나니 네 말을 듣고도 행하지 아니하거니와 그 말이 응하리니 응할 때에는 그들이 한 선지자가 자기 가운데에 있었음을 알리라

에스겔 선지자는 피맺힌 심정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지만, 바빌론에 있는 사람들은 에스겔 선지자를 디너쇼에서 노래하는 사람 정도로, 자신들은 거기에 참석해서 밥 먹는 사람들 정도로 여겼습니다. 그 모습은 마치 한국교회의 단면을 보는 것 같습니다. 설교자는 강단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전하는데 집중하지 아니하고 우스갯소리와 성공담을 늘어놓고, 교인들은 그것을 즐기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다 이루신다고 하십니다. 그래서 그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는 사람은 참 복됩니다.

오늘 본문은 영적인 파수꾼으로 부르심을 받은 에스겔 선지자에 대한 말씀으로 시작합니다. 그런데 에스겔 선지자가 부르심을 받은 것은 이미 1-3장에 나왔었습니다. 특히 3장에서 하나님께서는 에스겔을 파수꾼으로 부르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럼에도 다시 부르고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 신앙에 좋은 교훈을 줍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은 반복적이라는 것입니다. 반복적인 부르심과 응답을 통해서 자신을 바르게 세워갈 뿐만 아니라 주신 소명과 사명을 제대로 감당할 수 있게 됩니다.

하나님의 반복적인 부르심에 바르게 응답하는 사람만이 주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갈 수 있으며, 하나님을 경외하며 그의 길을 걸을 수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이 하나님을 경외하며 그의 길을 걷도록 섬길 수 있습니다. 그리고 손이 수고한 대로 먹으므로 복되고 형통한 삶도 살 수 있습니다.
오늘 하루도 우리를 우리의 가정에, 일터에, 삶의 자리에 파수꾼으로 부르신 하나님을 목적 삼고, 하나님의 말씀의 길을 따라서 사는 한 날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기 도
하나님 아버지!
인간의 끊임없는 범죄에도 불구하고 돌이켜 다시 돌아오기를 기다려 주시고, 치유와 회복의 길을 열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예루살렘에 남아 있던 사람들이 자신들은 의롭기 때문에 포로가 되지 않았고, 당연하게 예루살렘을 차지할 자격이 된다고 오해하고 착각했던 것처럼, 우리가 자신을 과대평가하거나 오판하는 오류에 빠지지 않게 하여 주시옵소서.
또한 바빌론에 포로가 되어있던 유다 백성들이 에스겔 선지자의 피맺힌 호소를 예능프로그램처럼 생각했던 비아냥거림과 오만함을 즐겼던 것처럼,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내 귀를 즐겁게 해주는 교양으로 생각하고, 자신을 가수의 디너쇼 참석자로 생각하는 교만함에서 벗어나게 하여 주시옵소서.
무엇보다도, 에스겔 선지자를 영적인 파수꾼으로 반복하여 부르셨다는 것을 잊지 아니하고, 우리도 반복해서 부르심을 받고 있다는 것을 마음에 깊이 새김으로 날마다 하나님을 경외하며, 그의 길을 걷는 복된 인생을 살아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오늘 하루도 그 길 속에 있는 한날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묵상을 돕는 질문
1. 하나님께서는 과거의 삶보다 현재의 삶이 더 중요하며, 그것이 상과 벌의 기준이 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당신의 과거의 신앙생활과 현재의 신앙생활은 어떠합니까? 더 나아지고, 성숙해진 부분은 무엇입니까?
2. 예루살렘에 남아 있는 사람들은 자신들이 의롭다고 오판을 했고, 바빌론에 포로가 된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오락(예능)으로 여겼습니다. 당신의 삶과 신앙에서 돌아서야 할 오판과 말씀에 대한 바르지 못한 태도는 무엇입니까?
3. 에스겔 선지자는 영적인 파수꾼으로 반복해서 받았습니다. 당신이 처음 부르심을 받은 것은 언제이었습니까? 그리고 지금은 어떻게 부르심을 받고 있습니까?
4. 영적인 파수꾼으로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길을 걸으며, 주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기 위하여 무엇을 결단하시겠습니까?


(작성 : 정한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