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예레미야애가 1장 1-22절,
찬송가 93장 ‘예수는 나의 힘이요’
개관
BC 586년 철옹성 같았던 예루살렘은 바벨론 임금 느부갓네살에 의해 성벽은 무너져 내렸고, 성전은 불에 타서 파괴되었습니다. 예루살렘의 함락으로 하나님의 선민임을 자처했던 이스라엘은 멸망했습니다. ‘예레미야 애가’는 유다 왕국의 멸망을 눈물로 읊은 다섯 개의 시를 모은 ‘슬픈 노래(哀歌)’입니다.
예레미야는 남 유다의 멸망과 예루살렘 성전의 파괴까지 모두 목격하였기에, 당시를 돌아보며 생생한 묘사로 절망적인 애가(哀歌)를 지어 부를 수 있었습니다. 그는 선지자였기에,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던 하나님의 진노를 잘 알았습니다. 하나님이 무능한 신이기 때문에 이스라엘이 멸망한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 스스로 지은 죄가 예루살렘의 멸망을 초래했다고 진단했습니다. 그는 조국의 멸망 앞에서 탄식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포기하고 주저앉지 않았습니다. 그는 대재난 앞에서 주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백성들에게 알리고, 앞으로 이스라엘이 나아갈 방향을 제시했습니다. 즉 예레미야 애가는 깊은 탄식으로 시작했지만,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를 고백하며(3:22-24), 이스라엘 백성이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갈 것을 촉구했습니다(5:21-22).
특징
예레미야 애가는 앞서 말씀드린바와 같이 '애가'라는 시문학적 장르에 다섯 개의 균형잡힌 시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두 가지 특징이 있는데, 첫 번째는 66절로 구성된 3장을 제외한 나머지 장이 모두 22절로 되어있습니다. 두 번째 특징은 5장을 제외한 나머지 장의 22절은 히브리 알파벳 22자의 순서대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3장이 66절로 구성되어 있는데, 이도 세절씩 같은 히브리어 자모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5장의 경우는 알파벳 순서로 배열되어 있지는 않지만 앞의 시들과 균형을 맞추기 위해 22개 절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예레미야 애가가 이같이 균형 잡힌 시의 구조를 띠고 있다는 것은 기억과 암송을 용이하기 위해서 입니다. 이스라엘에는 크게 다섯 개의 축제가 있고, 그 축제일 마다 읽는 책이 있습니다. 유대인의 공식 절기에 읽혀지던 다섯 개의 책을 “두루마리(五軸)”를 의미하는 “메길로트(Megillot)”라고 합니다.
⑴ 유월절 : 아가서 ⑵ 칠칠절 : 룻기 ⑶ 초막절 : 전도서 ⑷ 부림절 : 에스더서 ⑸ 예루살렘 멸망일 : 예레미야 애가
유대교 예배에서는 아브월(7, 8월) 9일에 주전 586년 성전파괴 사건과 주후 70년 로마제국에 제2성전이 파괴된 사건을 기념하면서 예레미야 애가를 읽습니다. 성전 파괴는 이스라엘에게 치욕적인 사건입니다. 그럼에도 이 날을 기념하여 특별히 예레미야 애가를 읽는 이유는 과거에 왜 예루살렘 성전이 처참하게 파괴되었는지를 잊지 않고, 다시 같은 일이 반복되지 않게 하기 위해서 입니다.
내용
1장과 2장은 백성의 불행과 예루살렘의 폐허 위에서 절망을 외치지만, 3장에서 심판자이신 하나님 앞에서 예언자는 슬픔과 희망을 바라보며, 4장에서는 선지자의 예언 그리고 5장에서는 이스라엘 회복을 애원하는 기도로 하나님 앞에서 결단합니다.
본문 분석
(1~9a) 멸망 후의 예루살렘의 모습
1a. 슬프다 이 성이여
‘슬프다’로 해석된 감탄사 ‘에카(ekha)’는 비극적인 상황을 묘사할 때 사용합니다. 이를 원어의 뜻으로 해석하면, 깊이 탄식하며 “아! 어찌할꼬”. 예루살렘이 처한 처절한 상황 앞에서 그는 가슴 속 깊숙이에서 복받쳐 오르는 비탄 속에서 깊이 탄식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1b 전에는 사람들이 많더니 이제는 어찌 그리 적막하게 앉았는고 전에는 열국 중에 크던 자가 이제는 과부 같이 되었고 전에는 열방 중에 공주였던 자가 이제는 강제 노동을 하는 자가 되었도다
예루살렘은 이스라엘의 수도이자, 하나님의 성전이 있는 거룩한 장소로 절기를 지키러 오는 사람들로 항상 붐볐지만, 이제는 아무도 찾지 않아 사막처럼 적막한 성으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세기의 문명을 주도하던 강대국들이 주변에 있었음에도 그들에 비하면 보잘 것 없이 작디 작은 이스라엘은 그들과 어깨를 나란히 했었습니다. 모두가 주님의 은혜 덕분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남편과 자식도 잃고, 법적으로 보호받지 못한 처량한 과부와 같이 되었습니다. 사랑받으며 곱게 자란 일국의 공주와 같이 귀한 신분이었지만, 이제 남의 집에 팔려간 시녀와 같이 비천한 신분으로 전락해버렸습니다.
바벨론은 3차에 걸친 집요한 공격을 하면서 유다 왕과 그 가족은 물론 신하들과 백성들을 죄다 바벨론으로 포로로 끌고 갔습니다. 3차 공격으로 성이 함락되었을 때 시드기야 왕은 야간도주하다가 잡혀 두 눈이 뽑혀 죽는 날까지 옥에 있었습니다. 3절에서 7절은 이러한 상황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영광은 모두 사라졌습니다. 과부 또는 시녀로 전락한 이스라엘은 주변국들의 조소거리가 되었습니다. 더 이상 낮아질래야 낮아질 수 없는 나락에 떨어졌지만, 아무도 이스라엘을 위로하지 않았고, 오히려 비웃고 있습니다. 5절에 의하면 “대적들이 우두머리가 되었고, 원수들이 형통하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악이 형통한 이유가 무엇일까요?
악이 즉 대적들이 흥하게 되었고 이스라엘의 영광이 사라진 이유를 예레미야는 “그의 죄가 많으므로 여호와께서 그를 곤고하게 하셨다“(5b), ”예루살렘이 크게 범죄함으로 조소거리가 되었다“(8a)고 진단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대적들과 원수들이 스스로의 능력으로 우두머리가 되고, 형통하게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범죄한 이스라엘을 벌하시기 위해 그들을 흥하게 하셨다는 의미입니다.
세상은 공평한가요? 불공평한가요?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사회가 과연 공평한가요? 아무도 공평하다고 여기지 않습니다. 가장 문명이 발전된 시대가 되었고, 민주주의가 깊이 뿌리를 내렸다 할지라도 세상은 여전히 불공평합니다. 이 시대 역시 악이 선을 억누르고, 악이 득세하고 있지 않습니까! 권력과 힘을 가진 사람과 집단, 사회와 국가가 자신들의 뜻대로 좌지우지 하고 있습니다. 신앙인으로 하나님을 향해 이 시대의 불공평을 외칠 때도 있지 않습니까!
세상이 불공평한 이유는 인간의 죄 때문입니다. 이 사회는 죄인인 인간들로 구성되어있기 때문에 불공평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이같은 현상을 신앙의 관점으로 바라보면 우리의 죄로 인함입니다. 사회 법과 교계 법을 무시하고 자신과 교회는 치외법권에 있는 것으로 여기는 목사나 교회들이 몰락하기는 커녕 자신들의 세력을 과시하고 있습니다. 사회적으로 이슈를 일으키고 있는 한 대형교회는 얼마 전에 우리나라 정계, 재계, 교계의 유력인사들을 물론 해외의 석학까지도 동원해서 호화로운 헌당식을 했습니다. 기사를 읽으면서 개인적으로 헤롯대왕이 건축한 당대 최고 규모였던 헤롯성전이 오버랩 되었습니다. 엄청난 규모와 호화로움을 자랑한 그 성전을 바라보시며 주님은 비통해하셨습니다. 결국 성전이 완공된지 7년 만에 로마군에 의해 초토화 되어 버렸고, 현재 그 흔적만이 남아 있습니다. 악인의 형통함을 부러워하거나 불평할 이유가 없습니다. 주님을 믿는 우리는 우리 자신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내가 생명나무이신 주님께 제대로 붙어있는지를 돌아보고, 주님께 내 죄와 이 시대의 죄악을 탄식하며 눈물로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2. 이 도성이 여인처럼 밤새도록 서러워 통곡하니, 뺨에 눈물이 마를 날 없고, 예전에 이 여인을 사랑하던 남자 가운데 그를 위로하여 주는 남자가 하나도 없으니, 친구는 모두 그를 배반하여 원수가 되었는가! (표준새번역)
예루살렘에 임할 하나님의 심판을 경고했던 예레미야였지만, 막상 하나님의 심판이 임한 예루살렘과 유다의 처참한 모습에 그는 기가 막혀 밤새도록 통곡했고, 낮에도 눈물이 마를 날이 없다고 합니다. 그는 2:1, 4:1에서 계속 ‘에카’만 외치며 통곡했습니다.
(9b ~11) 하나님을 향한 간구
조국의 멸망을 바라보며 탄식하며 밤낮으로 눈물을 흘리고 있던 예레미야는 그대로 주저앉지 않았습니다. 그는 바벨론이 거룩한 성전을 약탈한 사건을 하나님께 고하면서, 고통 속에 있는 유다를 위해 간구합니다.
9b, 주님, 원수들이 우쭐댑니다. 나의 이 고통을 살펴 주십시오 (표준새번역)
11, 예루살렘 온 백성이 탄식하며, 먹을거리를 찾습니다. 목숨을 이으려고, 패물을 주고서 먹을거리를 바꿉니다. 주님, 이 비천한 신세를 살펴 주십시오 (표준새번역)
바벨론이 3차로 침공해서 예루살렘을 포위해있는 동안 성 안에서는 기근이 극심하여 자녀를 잡아먹을 정도로 비극적인 참상이 벌어졌었습니다(애 2:20, 4:10, 사 9:20, 겔 5:10). 그는 아직도 극심한 식량란을 겪고 있는 백성들을 위해 하나님께 간구했습니다.
우리는 무엇을 위해 기도하고 있습니까? 나를 위해, 내 입을 위해, 내 배를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그러나 나만을 위한 기도, 우리만을 위한 기도에 국한되어 있다면, 우리의 신앙은 성장하지 못합니다. 오히려 시간이 흐를수록 신앙은 이기적으로 변모하게 됩니다. 새벽기도를 시작하면서 내 기도를 먼저 하지 않습니다. 오늘 같은 경우 우선적으로 미국과 중국의 갈등, 홍콩의 민주화 물결 등 세계를 위해 기도하고, 개인적인 기도는 가장 마지막에 했습니다. 그 이유는 우리의 기도가 이타적일 때 우리의 신앙이 이타적이 되기 때문입니다. 기도를 이타적으로 했다면, 이를 행동으로 옮겨야 합니다. 어제 주일은 '사회봉사주일'로 성도님들이 잘 입지 않는 깨끗한 의료나 사용하지 않는 중고물품을 교회로 가져왔습니다. 교회에서 마포구를 넘어선 우리 이웃과 선교지를 섬기기 위해 매분기별로 '사회봉사주일'을 실시하고 있는 이유 역시 기도에 멈춘 신앙인이 아니라, 성도님들 모두가 기도를 행동으로 옮김으로 생명이신 주님의 열매를 맺는 성숙한 신앙인이 되어져 가기 위해서입니다.
(12~19) 세상을 향한 외침
예레미야는 “지나가는 모든 사람들”, 즉 주변 모든 나라들과 백성들을 향해 이스라엘이 이같이 비천하게 전락하게 된 이유에 대해 설명해줍니다.
14. 내 죄악의 멍에를 그의 손으로 묶고 얽어 내 목에 올리사 내 힘을 피곤하게 하셨음이여 내가 감당할 수 없는 자의 손에 주께서 나를 넘기셨도다
이스라엘의 죄악에 대해 하나님께서 진노하셔서 내가 감당할 수 없는 자, 즉 바벨론의 손에 이스라엘을 넘겼고, 그 결과 이스라엘 영토 안에 청년, 처녀들의 씨가 마를 정도로 피폐하게 되었다고 증언합니다. 이스라엘이 멸망했음에도 예레미야는 바벨론은 물론 주변 국가들 앞에서 주눅 들지 않고 당당하게 복음을 선포합니다.
‘이스라엘의 죄악에 하나님이 진노하셔서, 우리를 너희들의 포로가 되게 하셨고, 너희들의 조소거리가 되게 하셨다. 만약 너희도 계속해서 죄를 지으면, 우리와 같이 멸망하게 될 것이니, 하나님의 진로를 받은 우리의 모습을 반면교사 삼아 하나님께로 돌이키라‘고 선포합니다.
예레미야는 죄를 다음과 같이 정의했습니다.
18. 여호와는 의로우시도다 그러나 내가 그의 명령을 거역하였도다
죄는 의로우신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는 것입니다. 무엇 하나 부족한 것이 없는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하와가 저지른 죄가 바로 선악을 알게 하는 과실을 먹지 말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의로우십니다. 다시 말하면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공의(公議)를 믿었습니다. 예레미야가 불의한 세상을 향해 당당할 수 있는 이유는 바로 하나님의 공의를 믿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공의를 믿습니까? 그렇다면 죄에 대해 내 스스로 엄격해야 합니다. 물론 우리는 연약하기 때문에 세상의 유혹 앞에서 넘어질 수 있습니다. 넘어진 것을 숨기지 마십시오. 공의로우신 하나님을 의지하고 다시 일어서십시오. 하나님을 의지하고 일어선 사람만이 불의 앞에서 당당할 수 있습니다.
(20-22) 간구
절망 속에서 예레미야는 세상으로부터 위로 받기를 원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예루살렘을 멸망시키고 멸망을 기뻐하는 주변 국가들 역시 그들의 죄로 말미암아 예루살렘처럼 멸망될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21-22). 대신 예레미야는 눈을 들어 하나님을 바라보았습니다.
20. "주님, 나의 절망을 살펴 주십시오. 애간장이 다 녹습니다. 내가 주님을 얼마나 자주 거역하였던가를 생각하면, 심장이 터질 것 같이 아픕니다. (표준새번역)
무슨 일로 절망하고 계십니까? 예레미야는 애간장이 다 녹을 정도로 절망에 빠져있을 때 하나님을 바라보았고, 하나님께 제일 먼저 자신의 죄를 회개했습니다. 예레미야가 무슨 죄를 저질렀습니까? 제사장의 아들로 태어나 앞날이 보장되어 있던 그는 하나님의 소명에 도망쳤었습니다. 그렇지만 결국 그는 하나님의 소명에 순종했습니다. 하나님의 소명에 순종한 그는 매국노, 거짓 선지자라는 소리를 들어가며 투옥되었습니다. 그가 짊어져야 했던 십자가는 그의 삶을 짓눌렀습니다. 믿음과 현실의 괴리 속에서도 그는 소명의 길을 걸어갔습니다. 그 길이 진리의 길이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배신하고 멸망해버린 조국의 현실 앞에서 예레미야는 “에카” “슬프다”를 외치며,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있습니다. 자신이 하나님을 거역한 죄를 생각하면 심장이 터질 정도로 아프다고 합니다. 대치국면에 있는 여야가 한번이라도 이런 모습을 보였으면 좋겠습니다. 국제 정세와 경제가 여야가 함께 협력해도 모자랄 판에 서로 남 탓만 하면서 대치하고 있는 모습이 한심하기 그지없습니다.
현실을 바라보는 우리의 시선이 현재와 세상에만 집중한다면 불의와 거짓이 득세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들이 부러울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불의와 거짓이 난무했던 예루살렘을 향하신 주님의 진노하심의 결과는 처참했습니다. 우리는 바로 이런 시선을 세상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악과 거짓의 세상을 보면서 우리는 ‘에카“를 외쳐야 합니다. 내 사랑하는 가족과 이웃이 주님의 진노 아래 놓여있습니다. 처참한 상황 속에서 예레미야는 세상을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을 바라보았습니다. 이스라엘의 가장 큰 죄악이 바로 하나님이 아닌 이웃 나라를 의지한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죄를 그리고 이스라엘의 죄를 눈물로 통회했습니다.
오늘 우리의 시선을 들어 주님을 향하고, 주님의 도우심을 간구하며 무릎을 꿇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예레미야와 같이 우리도 생명나무이신 하나님을 버리고 대적하는 세상을 위해 눈물로 기도하게 해주옵소서. 이타적인 기도를 통해 주님의 마음을 더 깊이 깨닫게 되어, 날이 갈수록 우리의 믿음이 성장하게 해주시고, 주님의 때에 아름다운 열매를 맺게 해주시옵소서. 예레미야를 택하셔서 소명을 주신 주님께서 동일하게 우리를 택하시고 우리 삶의 자리에서 소명을 주셨음을 믿습니다. 우리를 불러 세워주신 주님께서 우리의 능력이심을 믿습니다. 믿음과 현실이 괴리가 아무리 크다할지라도 생명나무이신 주님의 능력에 힘입어 맡겨주신 소명을 다 할 수 있게 해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묵상을 돕는 질문
1. 조국은 “에카”를 탄식한 예레미야에게 과거 어떻게 취급했습니까?
2. 그럼에도 예레미야가 “에카”라고 탄식한 이유가 무엇인가요?
3. 하나님 앞에 나가는 사람에게 가장 필요한 요소는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4. 불공평한 현실 앞에서 우리가 하나님을 의지해야 할 근본적인 이유는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5. 생명나무에 합당한 열매를 맺기 위해 어떤 결단을 하셨습니까?
(작성: 이창호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