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이사야 41장 1-29절
찬송가 70장 ‘피난처 있으니’

이스라엘 백성들의 큰 죄악에 대하여 심판의 말씀을 전하게 하셨던 하나님께서 40장에 이스라엘 백성을 위로하라는 말씀을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백성을 징계하실때는 반드시 소망이 있는 징계를 내리십니다. 여기서 소망이란 징계를 받고 회개한 이후 회복의 기회를 주신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하나님께서 준비하신 그 회복의 때를 언급하고 있습니다.

고레스를 세우실 하나님(1-7)
먼저 하나님께서는 열방과 민족들을 향하여 재판의 자리로 나아오라고 말씀하십니다.
(1) 섬들아 내 앞에 잠잠하라 민족들아 힘을 새롭게 하라 가까이 나아오라 그리고 말하라 우리가 서로 재판 자리에 가까이 나아가자

열방의 심판자 되신 하나님께서 열방과 민족을 재판의 자리로 초대하신다는 것은 실제로 재판을 받으시겠다는 의미가 아니라 그만큼 어리석은 열방들의 죄악과 무지를 꾸짖고 그들이 섬기고 있는 우상의 헛됨을 드러내시겠다는 강조의 내용입니다. 이 부분은 마치 엘리야가 갈멜산에서 바알과 아세라의 제사장들을 향해 누가 참 하나님인지 겨루어보자고 했던 장면을 떠올리게 만듭니다.

그때에 엘리야가 하늘에서 내린 불을 살아계신 여호와 하나님의 증거로 내세웠다면 이번에 하나님께서는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 어떤 증거를 열방과 민족에게 내세우셨는지 살펴보겠습니다.
(2-4) 누가 동방에서 사람을 일깨워서 공의로 그를 불러 자기 발 앞에 이르게 하였느냐 열국을 그의 앞에 넘겨 주며 그가 왕들을 다스리게 하되 그들이 그의 칼에 티끌 같게, 그의 활에 불리는 초개 같게 하매 그가 그들을 쫓아가서 그의 발로 가 보지 못한 길을 안전히 지났나니 이 일을 누가 행하였느냐 누가 이루었느냐 누가 처음부터 만대를 불러내었느냐 나 여호와라 처음에도 나요 나중 있을 자에게도 내가 곧 그니라

2절에 하나님께서 동방에서 일깨우신 사람은 바로 바벨론을 무찌른 메대-바사왕국의 왕인 ‘고레스’를 의미합니다. 바로 이 고레스가 하나님의 증거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공의의 심판을 이루시고 바벨론에 심판을 행하시기 위해 고레스를 세우시고 열국을 그에게 넘겨주시며 왕들을 다스리고 그의 칼 앞에 모든 적들이 티끌과 겨같이 흩으시고 그들의 정복길을 안전하게 붙들어 주실 것을 말씀하십니다. 이렇게 지구상 위대한 제국들을 세우시도 하시고 없애기도 하시는 분이 누구십니까? 4절에 ‘나 여호와라 처음에도 나요 나중 있을 자에게도 내가 곧 그니라’고 확언하여 주셨습니다. 이는 역사의 주관자가 바로 자신이심을 증거 하시는 것입니다. 세계정세는 하루가 다르게 바뀌어 가며 우리는 신문과 뉴스를 보고 하루는 평안을 꿈꾸다가 하루는 두려움과 실망에 한숨짓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탄 자동차의 기사분이 하나님이심을 믿는 다면 때로는 비포장도로를 다닐지라도 안심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타고 있는 역사의 핸들은 하나님의 손에 붙들려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고레스왕의 공격에 열방과 민족은 두려움에 빠져 헛된 우상을 의지합니다.
(5-7) 섬들이 보고 두려워하며 땅 끝이 무서워 떨며 함께 모여 와서 각기 이웃을 도우며 그 형제에게 이르기를 너는 힘을 내라 하고 목공은 금장색을 격려하며 망치로 고르게 하는 자는 메질꾼을 격려하며 이르되 땜질이 잘 된다 하니 그가 못을 단단히 박아 우상을 흔들리지 아니하게 하는도다

열방과 민족들이 고레스왕과 그 힘을 보고 두려움에 빠졌습니다. 그리고 함께 모여 힘을 모아 한 일이 바로 화려하고 든든한 우상을 만드는 일이었습니다. 5절에서 7절은 바로 그들이 힘을 모아 우상을 만드는 장면을 묘사한 내용입니다. 이는 마치 큰 쓰나미가 다가오는 상황에서 집 앞에 모래성을 쌓는 사람과도 같습니다. ‘이 모래성이 우리를 구원해 줄거야’라며 믿는 사람이 차라리 더 구원받을 가능성이 있어 보입니다. 바벨론을 포함하여 우상을 숭배하던 민족들은 하나님이 세우신 고레스라는 심판의 도구 앞에 속수무책이 됩니다. 한 때 주위 민족들을 향해 큰 소리쳤던 나라들도 하나님의 심판 앞에서는 기껏 우상밖에 붙들게 없습니다. 세상 마지막 때에도 이러할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6장 15-16절을 보시면 하나님의 심판앞에 “땅의 임금들과 왕족들과 장군들과 부자들과 강한 자들과 모든 종과 자유인이 굴과 산들의 바위 틈에 숨어 산들과 바위에게 말하되 우리 위에 떨어져 보좌에 앉으신 이의 얼굴에서와 그 어린양의 진노에서 우리를 가리라”는 세상 사람들의 반응이 나옵니다. 하나님이 아닌 세상의 힘을 붙든 자들은 기껏 바위에게 자신을 가려 달라고 애원하는 때가 올 것입니다.

그 백성을 버리지 않으시는 하나님(8-16)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징계하셨던 이스라엘 가운데 계속해서 함께하실 것임을 약속하십니다.
(8-10) 그러나 나의 종 너 이스라엘아 내가 택한 야곱아 나의 벗 아브라함의 자손아 내가 땅 끝에서부터 너를 붙들며 땅 모퉁이에서부터 너를 부르고 네게 이르기를 너는 나의 종이라 내가 너를 택하고 싫어하여 버리지 아니하였다 하였노라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

하나님께 징계를 받아 바벨론에 끌려가 포로의 시기를 겪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장 큰 두려움과 고민은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버리셨는가?’라는 질문이었을 것입니다. 오늘 9절 하반절에 이미 그 답을 미리 주고 계십니다. ‘내가 너를 택하고 싫어하여 버리지 아니하였다’라는 답입니다. 두 번째 고민은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는가?’라는 질문이었을 것이고 하나님께서는 10절에 이미 답을 주셨습니다.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 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라고 말입니다.
하나님께 징계를 받을 때는 마치 하나님께서 나를 버리신 것 같고 함께 하시지 않는 것 같을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택한 백성을 싫어하여 버리지 않으시고 함께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혼은 낼지언정 완전히 버리지 않으시며 고통가운데 있게 할지라도 그 고통의 자리에 함께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바벨론에서도 그 백성과 함께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인생에 찾아오는 고통 그 자체가 하나님의 버림 혹은 부재가 아님을 기억해야 합니다.

11절에서 16절까지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괴롭히던 민족을 하나님께서 심판하여 주실 것임을 알려주시는 장면입니다. 특히 남유다를 멸망시키며 치욕을 주었던 바벨론은 고레스를 통해 치욕을 당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열방을 향한 심판의 도구였던 고레스는 실은 이스라엘에게는 귀향을 허락하는 회복의 도구였습니다.
(14) 버러지 같은 너 야곱아, 너희 이스라엘 사람들아 두려워하지 말라 나 여호와가 말하노니 내가 너를 도울 것이라 네 구속자는 이스라엘의 거룩한 이이니라

‘버러지’라는 단어는 ‘톨라’라는 히브리어로 구더기나 벌레를 의미하며 야곱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의미합니다. 이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포로기 시대에 겪을 상황을 그려줍니다. 사람취급을 받지 못하고 벌레같이 하찮게 여겨질 것을 의미합니다. 실제로 시편 137편에 바벨론의 포로기에 쓰여진 내용을 보면 바벨론 사람들이 자신들의 흥을 돋구기 위해 찬송을 불러보라고 시키는 내용이 나옵니다. 이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당한 고통의 극히 일부분일 것입니다. 시편 기자는 그런 바벨론의 악날함에 치를 떨며 우리에게 행한 대로 바벨론에 갚는 자가 복이 있을 것이라고 고백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벌레취급을 받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께서 도와주실 것이며 구원하실 것이라고 희망의 메시지를 전하고 계십니다. 이 말씀은 부모님과 다투고 가출한 한 소년이 골목어귀에서 불량배들에게 끌려가 돈도 빼앗기고 코피가 터지게 맞고 바닥에 깔려서 신음하고 있을 때 멀리서 들려오는 아버지의 목소리와도 같은 메시지입니다. 자신이 부모 밑에 거하기 싫어서 가출은 했지만 나가보니 고생이었고 그런 자신을 잊지 않고 찾고 어려움에서 건질 분은 실은 부모님 밖에 없던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네 구속자는 이스라엘의 거룩한 이이니라”라고 하시며 오직 포로기 동안 하나님만 바라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포로귀환과 회복의 때(17-20)
17절에서 20절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원수의 압제에서 벗어나 포로귀환을 하는 모습을 상상할 수 있도록 기록되었습니다.
(17-19) 가련하고 가난한 자가 물을 구하되 물이 없어서 갈증으로 그들의 혀가 마를 때에 나 여호와가 그들에게 응답하겠고 나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그들을 버리지 아니할 것이라 내가 헐벗은 산에 강을 내며 골짜기 가운데에 샘이 나게 하며 광야가 못이 되게 하며 마른 땅이 샘 근원이 되게 할 것이며 내가 광야에는 백향목과 싯딤 나무와 화석류와 들감람나무를 심고 사막에는 잣나무와 소나무와 황양목을 함께 두리니

화초를 심겨진 화분에서 뽑아 다른 화분으로 옮기는 것은 쉽지 않은 일입니다. 작은 식물하나도 그러하건데 한 민족이 뽑혀 포로로 끌려갔다가 다시 회복되어지는 것은 쉽지 않은 일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에스라 1장에 고레스왕이 포로귀환을 명할 때의 기록을 보면 왕의 명령을 따라 사면에 많은 사람들이 포로 귀환자들에게 금과 은과 물품과 짐승을 주었고 고레스왕은 창고지기 미드르닷에게 명령하여 느부갓네살왕이 빼앗아왔던 여호와의 성전 그릇들까지 돌려주게 하였습니다. 한 나라의 정복자가 포로백성을 돌려보내는 것도 역사상 흔치않은 일일진대 이렇게 선대하는 것은 더 흔치 않은 일임에도 이스라엘 백성들의 회복을 이루시려는 하나님의 열심은 고레스를 감동시켜 그 일을 이루게 하셨습니다. 그때에 백성들이 깨닫게 될 것입니다. 20절입니다.
(20) 무리가 보고 여호와의 손이 지으신 바요 이스라엘의 거룩한 이가 이것을 창조하신 바인 줄 알며 함께 헤아리며 깨달으리라

이 말도 안 되는 회복의 길을 만드신 이, 헐벗은 산에 길을 내신 이, 골짜기 가운데 샘을 내신 이, 광야가 못이 되게 하신 이, 마른 땅이 샘 근원이 되게 하신 이, 광야에 온갖 나무가 가득하게 하신 이, 이 모든 회복의 구원을 이루신 이가 바로 여호와이심을 말씀이 성취되는 그 때에야 비로소 깨닫게 될 것임을 말씀하십니다. 실제로 이스라엘은 포로생활을 다하고 고생 끝에 회복을 경험하며 온 몸으로 여호와 하나님이 우리의 유일한 구주이심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한 가지 아쉬움은 진작 깨달았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생각입니다. ‘꽃이 지고 나서야 봄인 줄 알았습니다.’라는 말처럼 우리 인생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울타리 쳐 주실 때, 회개의 기회를 주실 때, 은혜 베푸시고 사랑으로 돌봐 주실 때 하나님만이 우리의 주인이심을 고백하지 못하고 꼭 인생의 고난과 고통을 맛보고서야 울며불며 주님께 돌아오는 어리석은 존재입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백성을 끝끝내 그 품안에서 지켜내고야 마시는 하나님의 신실하신 은혜는 우리에게 넉넉한 위로가 됩니다. 어리석은 탕자가 아버지의 품을 떠날 때 그가 모든 재산을 탕진하고 돌아올 것을 알고 기다리고 있던 아버지의 마음, 그것이 바로 그 백성을 향한 아버지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우상의 헛됨을 증거(21-29)
21절부터 29절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섬기던 우상들의 헛됨을 증거 하시는 내용이 나옵니다.
(21-24) 나 여호와가 말하노니 너희 우상들은 소송하라 야곱의 왕이 말하노니 너희는 확실한 증거를 보이라 장차 당할 일을 우리에게 진술하라 또 이전 일이 어떠한 것도 알게 하라 우리가 마음에 두고 그 결말을 알아보리라 혹 앞으로 올 일을 듣게 하며 뒤에 올 일을 알게 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신들인 줄 우리가 알리라 또 복을 내리든지 재난을 내리든지 하라 우리가 함께 보고 놀라리라 보라 너희는 아무것도 아니며 너희 일은 허망하며 너희를 택한 자는 가증하니라

하나님께서는 우상들을 도발하십니다. 그 내용은 요약하자면 첫째로 앞으로 일어날 일을 진술해 보라는 것이고 둘째는 복을 내리거나 재난을 내려 보라는 것입니다. 참 하나님이라면 할 수 있는 마땅한 일임에도 인간들이 손을 모아 만든 우상들은 대답도 할 수 없었습니다. 실은 이 도발은 존재하지도 않는 우상들을 향해 하신 것이 아니라 그 헛된 우상을 자신의 신으로 섬겼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 주시는 메시지였습니다. ‘봐라, 너희들이 섬기는 우상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능력한 존재들이다’라는 것입니다. 한 아내가 길을 지나가다가 멋지고 잘생긴 마네킹을 보며 사랑에 빠져서 당신이 내 남편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매일 찾아가 쓰다듬고 어루만지고 그곳에 머물 때 그것을 본 남편의 마음이 어떻겠습니까? ‘여보, 그 마네킹이 당신을 사랑하겠소? 당신을 위해 꽃 한 송이라도 줄 수 있겠소? 당신을 위해 밥 한 끼라도 사줄 수 있겠소?’라고 외치지 않겠습니까? 극단적인 예화 같지만 인간의 손으로 만든 우상을 섬기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보시는 하나님의 마음은 이보다 더하셨을 것입니다.

(25-29) 내가 한 사람을 일으켜 북방에서 오게 하며 내 이름을 부르는 자를 해 돋는 곳에서 오게 하였나니 그가 이르러 고관들을 석회 같이, 토기장이가 진흙을 밟음 같이 하리니 누가 처음부터 이 일을 알게 하여 우리가 알았느냐 누가 이전부터 알게 하여 우리가 옳다고 말하게 하였느냐 알게 하는 자도 없고 들려주는 자도 없고 너희 말을 듣는 자도 없도다 내가 비로소 시온에게 너희는 이제 그들을 보라 하였노라 내가 기쁜 소식을 전할 자를 예루살렘에 주리라 내가 본즉 한 사람도 없으며 내가 물어도 그들 가운데에 한 말도 대답할 조언자가 없도다 보라 그들은 다 헛되며 그들의 행사는 허무하며 그들이 부어 만든 우상들은 바람이요 공허한 것뿐이니라

하나님은 앞에서 언급한 우상과는 다른 분이십니다. 포로로 끌려가 고통당하는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시기 위해 고레스를 세우시는 분이시고, 그를 통해 바벨론을 멸하신 분이십니다. 그리고 그 일을 이루시기 전에 선지자들을 통해 이미 선포하신 분이십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기억하며 이 세상 그 어떤 것도 하나님을 대신 할 수 있는 것이 없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내 삶의 목적이 되시고 오늘도 나와 함께 하시고 내 삶에 필요한 것들을 공급하시는 분이심을 믿는다면 우리는 하나님 외에 다른 우상을 만들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내 삶의 주인이 아니라 내가 내 삶의 주인이 될 때 우리는 하나님을 목적이 아닌 수단으로 삼고 때론 자신의 탐욕을 이루기 위해 하나님보다 더 필요해 보이는 그것을 우리의 우상으로 삼습니다. 그러나 그 끝은 심판이요 공허함만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우리 인생에서 역사하시는 참 하나님이심을 기억해야 합니다.

오늘 우리는 이사야서 41장을 통해 몇 가지 말씀을 함께 나누었습니다.
첫째, 하나님께서는 역사의 주관자가 되십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내 삶과 세상의 소식들에 크게 일희일비하지 않고 하나님의 일하심을 때론 길게 보며 기다려야 합니다.
둘째, 고통 그 자체가 하나님의 버림이나 부재가 아님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 아버지 되신 하나님은 결코 우리를 버리지 않으시고 고통가운데 함께 거하시는 분이십니다.
셋째, 하나님은 우리를 회복시키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이스라엘을 바벨론 땅에서 고레스의 호의가운데 불러 회복시키신 하나님께서는 고통의 파도가운데 빠져가는 우리의 인생을 회복시키시는 전능하신 아버지 되십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고통의 한 가운데서도 결코 소망을 잃지 말아야 합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오늘도 주님과 교제할 수 있는 은혜 주심에 감사를 드립니다. 때론 하나님보다 다른 무엇인가를 더 의지하고 하나님이 아닌 다른 것을 내 중심에 놓고 살아가는 우리를 근실히 징계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기억합니다. 때론 징계를 당할 때에 그 고통이 나를 버린 것이 아님을 기억하게 하시고 그 고통가운데 함께 하시며 놀라운 회복의 은혜를 준비하고 계시는 하나님을 바라보게 하옵소서. 또한 내 삶과 세상가운데 벌어지는 크고 작은 일들 속에서 두려워하거나 낙심하지 아니하고 선한 일을 계획하시고 이루시고 준비하시는 하나님을 기억하며 소망가운데 주의 말씀을 듣고 지켜 행하는 하루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묵상을 돕는 질문
1. 오늘 본문에서 나온 하나님과 우상의 차이점은 무엇이 있는지 살펴봅시다.
2. 하나님께서는 왜 미래에 일어날 일들을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 미리 말씀하셨는지 그 이유를 살펴봅시다.
3. 내 삶에 하나님보다 더 의지하거나 중심에 두는 우상은 없는지 살펴보며 그것을 바라보시는 하나님의 마음이 어떠하셨을지 묵상하여 봅시다.
4. 과거 내 삶과 세상 속에 벌어지는 일들 혹은 고통으로 낙심했었는데 지나보니 하나님께서 전화위복의 은혜를 주신 것이 있다면 기억하며 회복의 하나님을 묵상해 봅시다.
(작성: 강요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