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이사야 40:1-31
찬송가 383장 ‘눈을 들어 산을 보니’



소망의 말씀(1-11절)
총 66장으로 구성된 이사야는 크게 3부분으로 나뉘는데, 1-35장과 36-39장, 40-66장입니다. 첫 부분(1-35장)은 웃시아-히스기야왕 시대에 살았던 하나님의 백성에 대한 심판의 경고와 회복의 약속 그리고 열방에 대한 심판과 구원에 대해서 증거합니다. 둘째 부분(36-39장)은 아시리아 왕 산헤립의 침략을 받았을 때의 히스기야왕의 믿음과 죽을 병의 발병, 그리고 신앙의 타락에 대해서 증거합니다. 마지막 셋째 부분(40-66장)은 이사야 선지자 시대로부터 약 100-160년 후에 일어날, 유다 백성들의 바빌론 포로와 귀환에 관한 것과 종말론적 구원에 대해서 증거합니다.
오늘 본문 1-11절은 하나님의 백성에 대한 징계가 종료되었음과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대해서 증거합니다.

(1) 너희의 하나님이 이르시되 너희는 위로하라 내 백성을 위로하라

히브리어성경 순서대로 번역하면, ‘위로하라, 위로하라, 내 백성을, 하나님이 말씀하셨다’입니다.
‘위로하라’는 말이 2번 반복됩니다. 꼭, 반드시 위로하라는 의미입니다. ‘위로하다(나함)’는 단어는 ‘숨을 크게 쉬는 모습’에서 유래하였다고 합니다. 우리가 굉장히 큰 위험을 넘기게 되었을 때, “휴, 다행이다”라고 말하며, 가슴을 쓸어내리는 것처럼, 그런 마음으로 위로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위로를 해 주어야 하는 대상이 ‘내 백성’입니다. 유다 자손들은 하나님을 섬기는 흉내만 내고 중심으로 섬기지 않았습니다. 그러고도 괜찮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또한 하나님을 신뢰하기보다 주변의 강대국들을 더 의지하는 것이 국가적으로 이익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무엇보다도 그들은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섬기지 않고, 우상을 만들어서 그것을 하나님이라고, 그것이 자신들을 지켜줄 것이라고 하는 어처구니없는 우상숭배를 했습니다. 그래서 수십 년 동안 바빌론에서 노예로, 서글픈 삶을 살았습니다. 그럼에도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내 백성’이라고 부르시는 것을 주저하지 않으셨고, 약속대로 고국으로 돌아오는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을 위로해야 하는 이유를 이렇게 밝히셨습니다.
(2) 너희는 예루살렘의 마음에 닿도록 말하며 그것에게 외치라 그 노역의 때가 끝났고 그 죄악이 사함을 받았느니라 그의 모든 죄로 말미암아 여호와의 손에서 벌을 배나 받았느니라 할지니라 하시니라

바빌론으로 포로로 끌려갔던 사람들 가운데,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사람은 그렇게 많지 않았습니다. 외국에서 수십 년을 살다보면, 거기가 고향처럼 여겨집니다. 그럼에도 돌아온 사람들은 무너진 성전을 다시 세우고 싶은 마음이 있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즉 하나님을 향한 소망을 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 사람들에게 위로의 메시지를 마음에 닿게 말하고(개역한글성경에는 ‘정다이’로 번역됨), 잘 들리도록 외치라(있는 힘을 다해 말하라)고 명령하고 있습니다. 예루살렘으로 돌아가기 원했던 사람들이 정말 듣기 원했던 소식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 이유를 세 가지로 말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노역의 때가 끝났기 때문’이었습니다. 죄를 지으면, 그 무게만큼 ‘금고(禁錮)_강제노동을 하지 않음’나 ‘징역(懲役)_강제노동을 함’을 받습니다. 유다 백성들이 약 50년 동안 바빌론 강가에서 울며 노동한 것으로 벌이 끝났다는 것입니다. 둘째는 ‘죄악이 사함을 받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이것은 유다가 패망한 것이 군사력이나, 경제력이 약해서가 아니라 하나님께 죄를 지었기 때문에, 즉 영적인 문제였다는 것입니다. 셋째는 ‘하나님의 손에서 벌을 배나 받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율법에 도둑질하면 2배로 갚아야 하는 규정(출 22:9)이 있었는데,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께 돌려야 할 영광을 도둑질함으로 그들은 거기에 상응하는 징계를 받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을 징계하실지라도, 고난의 자리에 방치하거나 외면하지 않으시고 건져 올려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골짜기’는 고난과 슬픔 등으로 삶이 짓눌리고 낙담한 사람들을 의미하는데 그들은 높여 주시고, ‘산과 언덕’은 하나님 앞에 교만한 사람들을 뜻하는데, 그들은 낮추셔서 함께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될 것이라고 하십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유다 백성의 포로생활에 마침표를 찍어주셨던 것처럼, 우리의 삶에는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기간’이 있습니다. 부모의 기간, 자녀의 기간, 내가 지금 앉아 있는 자리에도 기간이 있고, 무엇보다도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생명의 기간이 있습니다. 그 기간을 하나님을 목적 삼고 신실하게 사는 것이 삶의 지혜입니다.

(6-8) 말하는 자의 소리여 이르되 외치라 대답하되 내가 무엇이라 외치리이까 하니 이르되 모든 육체는 풀이요 그의 모든 아름다움은 들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이 시듦은 여호와의 기운이 그 위에 붊이라 이 백성은 실로 풀이로다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히 서리라 하라

육체(인생)가 풀이고, 인생의 아름다움이 들의 꽃과 같아서 풀은 마를 수밖에 없고, 꽃도 시들 수밖에 없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히 선다고 하면, 인생무상을 노래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은 열흘 붉은 꽃이 없다(화무십일홍, 花無十日紅)는 말처럼, 인생이 짧음을 노래하기 위해서 기록하지 않고, 바빌론에서 조국으로 돌아가는 하나님의 백성을 위로하기 위해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바빌론 제국의 권세가 아무리 크게 보일지라도, 또 그 권세가 끝이 없을 것 같아도, 그 권세가 유한하기 때문에 풀이 마르듯이, 또 꽃이 시들듯이 끝이 날 것이라는 것입니다. 유다 백성들이 예루살렘으로 돌아올 수 있었던 것은 그렇게 크고 강하게 보였던 바빌론 제국이 페르시아 제국에 의해서 멸망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처럼 세상의 제국은 아무리 크게 보이고, 아무리 강하게 보여도 마르고 시들어 땅에 떨어질 때가 있지만, 오직 하나님의 말씀은, 그 말씀이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기에 마르는 일도 없고, 지는 일도 없이 영원토록 지속된다고 합니다.

(9-11) 아름다운 소식을 시온에 전하는 자여 너는 높은 산에 오르라 아름다운 소식을 예루살렘에 전하는 자여 너는 힘써 소리를 높이라 두려워하지 말고 소리를 높여 유다의 성읍들에게 이르기를 너희의 하나님을 보라 하라 보라 주 여호와께서 장차 강한 자로 임하실 것이요 친히 그의 팔로 다스리실 것이라 보라 상급이 그에게 있고 보응이 그의 앞에 있으며 그는 목자 같이 양 떼를 먹이시며 어린양을 그 팔로 모아 품에 안으시며 젖먹이는 암컷들을 온순히 인도하시리로다

‘아름다운 소식’은 두말할 필요도 없이 바빌론에서 시온(예루살렘)으로 돌아가게 된 사실을 뜻하고, ‘높은 산에 오른다’는 것은 적의 침입이나 전쟁터에 나갔던 아군이 돌아오는 것을 알리기 위해 설치했던 진지로 올라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이것은 일차적으로는 포로에서 돌아가는 것을 알리는 것이고, 궁극적으로는 성육신하여 이 땅에 오실 성자, 예수 그리스도를 선포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유다 백성이 바빌론에서 돌아오는 모습이 마치 뛰어난 장군이 포로로 잡힌 자기 병사를 데려오듯이, 영원한 장군이신 만군의 여호와 하나님께서 되찾아 오시는 모습으로, 또 목자가 양을 데려오듯이 이끌어 오신다고 말씀하십니다.
바빌론 포로에서 예루살렘으로 돌아가는 ‘아름다운 소식’은 그들이 누릴 수 있는 최고의 소식이었습니다. 오늘이 1919년에 있었던 3.1운동 100주년이 되는 날입니다. 그 때에 전국 팔도 방방곡곡에서 하나님께서 최고의 아름다운 소식, 독립을 하나님께서 허락해 주시기를 소망하며 태극기를 흔들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26년이 더 지난 후에 ‘아름다운 소식’인 해방을, 독립을 선물로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날’을 잊지 아니하시고, 반드시 이루시는 분이십니다.


비교 불가의 하나님(12-26절)
12-26절은 유다 백성들을 예루살렘으로 돌아가도록 약속하신 하나님은 창조주로서 절대적인 권능을 가지셨음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특히 12-14절에서 ‘누가 ....을 했느냐?’고 반문하고 있습니다.
12절에, “누가 바닷물을 헤아렸으며, 하늘을 뼘으로 재었으며, 티끌을 되로 되어보았으며, 산과 언덕을 저울로 달아보았느냐?”라고 묻습니다.
13절에, “누가 주의 영을 헤아릴 수 있겠으며, 주의 조언자가 되겠느냐?”라고 반문 합니다.
14절에, “하나님께서 누구와 의논하시겠는가?”, “누가 하나님께 지식을 가르쳐 드린다는 말입니까?”라고 합니다.
이 모든 질문에 답은 동일합니다. ‘없다’입니다. 하나님을 스스로 영원히 충분하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또 하나님 앞에 세계 모든 나라는 두레박에서 떨어지는 물 한 방울과 같고, 저울 위에 있는 티끌과 같다고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모든 나라는 있어도 없는 것과 같다고 합니다. 유다 백성들은 바빌론 제국을 홍수처럼, 태풍이 휘몰아칠 때에 몰려오는 거친 파도처럼 여겼을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보시기에는 그저 통에서 떨어지는 물방울과 같다고 말씀하시고, 또 산사태가 일어나서 몰려오는 흙더미처럼 보였을지도 하나님께는 그저 저울에 붙은 먼지와 같다고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 자신이 어떤 분이신지를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25-26) 거룩하신 이가 이르시되 그런즉 너희가 나를 누구에게 비교하여 나를 그와 동등하게 하겠느냐 하시니라 너희는 눈을 높이 들어 누가 이 모든 것을 창조하였나 보라 주께서는 수효대로 만상을 이끌어 내시고 그들의 모든 이름을 부르시나니 그의 권세가 크고 그의 능력이 강하므로 하나도 빠짐이 없느니라

하나님께 비견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서 별은 누가 창조했는지 반문하시며, 그 많은 별들을 하나도 빠지지 않고 부르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는 무한한 질적 차이가 있다고 합니다. 무한과 유한, 영원과 순간은 비교할 수도, 비교될 수도 없습니다.


하나님을 앙망하는 사람은(27-31절)
27-31절은 비록 바빌론에서 포로생활을 하고 있을지라도, 창조주 하나님을 신뢰할 것을 권면합니다.

(27) 야곱아 어찌하여 네가 말하며 이스라엘아 네가 이르기를 내 길은 여호와께 숨겨졌으며 내 송사는 내 하나님에게서 벗어난다 하느냐

‘야곱’과 ‘이스라엘’은 ‘유다 백성’들을 뜻합니다. 유다 백성들이 한이 맺힌 기도를 드릴 때에, 하나님께서 듣지 않으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듣지 않으시려고 하신 적이 없으시다고 말씀하시고, 유다 백성들은 듣지 않으셨다고 합니다.

(28) 너는 알지 못하였느냐 듣지 못하였느냐 영원하신 하나님 여호와, 땅 끝까지 창조하신 이는 피곤하지 않으시며 곤비하지 않으시며 명철이 한이 없으시며

하나님께서는 스스로를 이런 분이시라고 증거하지만 이것을 반대로 생각하면, 유다 백성들이 생각하는 하나님에 대한 개념입니다. 즉 “하나님은 영원하지도 않고, 하나님은 천지만물을 창조하시지도 않고, 인간처럼 자주 포기하시는 분이시고, 우리를 인도할만한 지혜도 없는 분이시다.”라고 생각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어떻게 포로로 보내실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29-31) 피곤한 자에게는 능력을 주시며 무능한 자에게는 힘을 더하시나니 소년이라도 피곤하며 곤비하며 장정이라도 넘어지며 쓰러지되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가 날개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하여도 곤비하지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하지 아니하리로다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하실 능력이 없는 것이 아니라 하지 않으셨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피곤한 자에게는 능력을 주실 수도 있고, 무능한 자에게는 힘도 주실 수가 있으셨지마는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을 앙망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하나님을 앙망한다는 것은 하나님을 바라보고, 하나님을 기다리고, 하나님께 소망을 두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자녀를 버리지 않으십니다. 결코 버리지 않으십니다. 그 예가 이스라엘이고, 우리 자신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바라보고, 하나님을 기다리고, 하나님께 소망을 두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고, 행함으로 함께 지어져 가면, “내 백성을 위로하라, 위로하라”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될 것입니다. 오늘 하루도 하나님을 목적삼고, 하나님을 앙망하는 한 날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기 도
하나님 아버지!
유다 백성들에게 바빌론 제국은 참 커 보였습니다. 그리고 그 제국은 결코 무너지지 않을 것 같아 보였습니다. 하지만 바빌론 제국도 마르고 시드는 풀과 꽃과 같았습니다. 또한 바빌론 제국은 거대한 물줄기로 내려오는 강물처럼 보이고, 거대한 산처럼 보였을지라도, 하나님 보시기에는 두레박에서 떨어지는 한 방울의 물과 저울에 붙은 티끌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때에 하나님의 백성을 시온으로 돌아오게 하셨습니다.
오늘 3.1독립운동 100주년을 맞았습니다. 당시에는 일본제국주의가 무너지지 않을 것 같았고, 강력한 힘을 가진 존재로 보여지만,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때에 해방을 주셨습니다.
세상에 있는 것이 아무리 크고, 아무리 강하게 보일지도 하나님보다 결코 크거나 강할 수 없음을 잊지 않게 하여 주시옵소서. 우리 모두가 어떤 상황에서 오직 하나님을 앙망함으로 함께 지어져 가게 하시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고, 행함으로 진리 안에서 자유를 누리게 하시고, 하나님을 향해서는 언제나 종으로, 세상과 죄를 향하여서는 언제나 자유인으로 살아가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묵상을 돕는 질문
1. 하나님께서는 “내 백성을 위로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위로가 가장 강하게 그리고 가장 깊게 다가왔던 때는 언제이었습니까?
2.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인생의 아름다움은 꽃과 같다고 말씀하십니다. 오래 갈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어느 순간에 사라지는 것을 경험하신 적이 있습니까? 그 일을 통해서 어떤 교훈을 얻으셨습니까?
3. 하나님은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분이시며, 피조물인 우리와는 비교 자체가 불가능하신 분이십니다. 신앙생활 가운데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인정하게 된 일은 어떤 것이 있었습니까?
4. 오직 하나님만을 앙망함으로 함께 지어져 가고, 곤비하지 않으시는 하나님과 동행하기 위해서 무엇을 결단하시겠습니까?


(작성 : 정한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