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욥기 7:1-21
찬송가 391장 ‘오 놀라운 구세주’


오늘 본문인 7장은 4-5장에 있었던 엘리바스가 욥에게 퍼부은 정죄에 대한 욥의 반론과 하소연의 뒷부분입니다.

단 하루 만에 모든 재산과 자녀를 잃고, 온 몸에 악성종양이 뒤덮여 있는 욥에게, 엘리바스가 욥에게 했던 말의 근거는 자업자득과 인과응보였습니다. “나는 잘 모르지만 네가 하나님께 죄를 지었기 때문에 그 고난을 당하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엘리바스는 하나님을 ‘권선징악(勸善懲惡)’의 하나님으로만 생각했습니다. 물론 하나님은 죄를 용납하지 않으시고, 삶을 따라서 상을 주시는 분이 틀림없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하나님의 전부는 결코 아닙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권선징악만의 하나님이셨다면, 우리는 모두 이 자리에 있지 못할 것입니다. 이미 저주를 받고 형벌을 받았을 것입니다.

욥의 말은 이렇게 이어집니다. 1-6절이 이렇게 증거합니다.
이 땅에 사는 인생에게 힘든 노동이 있지 아니하겠느냐 그의 날이 품꾼의 날과 같지 아니하겠느냐 종은 저녁 그늘을 몹시 바라고 품꾼은 그의 삯을 기다리나니 이와 같이 내가 여러 달째 고통을 받으니 고달픈 밤이 내게 작정되었구나 내가 누울 때면 말하기를 언제나 일어날까, 언제나 밤이 갈까 하며 새벽까지 이리 뒤척, 저리 뒤척 하는구나 내 살에는 구더기와 흙덩이가 의복처럼 입혀졌고 내 피부는 굳어졌다가 터지는구나 나의 날은 베틀의 북보다 빠르니 희망 없이 보내는구나

‘이 땅에 사는 인생에게 힘든 노동이 있다’는 것을 예전에 사용했던 개역한글성경에서는 ‘세상에 있는 인생에게 전쟁이 있다’고 표현했습니다. ‘힘든 노동’이라 표현한 이 단어는 하나님을 표현하는 말 중에 하나인, ‘만군의 여호와’라고 할 때에 ‘만군(萬軍)’에 쓰는 단어입니다. 그래서 ‘힘든 노동’보다 ‘전쟁’이 더 적절하고도 훨씬 더 실감나는 번역입니다. 노동에 뛰어든 사람은 힘들거나 적성에 맞지 않으면, 퇴직하거나 이직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전쟁에 나간 병사가 힘들거나 적성에 맞지 않다고 해서 부대를 나가게 되면, 탈영이 되고, 아군의 총에 맞아 죽게 될 것입니다. 그만큼 전쟁은 강제적입니다. 또한 노동은 나의 시간을 팔고서 그 대가로 돈을 받아서 생계를 유지합니다. 하지만 전쟁터로 나간다는 것은 내 생명을 파는 것입니다. 그래서 노동 현장보다 전쟁터가 훨씬 더 절박합니다.
그만큼 욥은 자신의 상황이 힘들고 절박하다는 것입니다. 무슨 일이든 짧게 끝나는 것이면 힘들어도 버텨볼만 합니다. 하지만 장기적으로 계속될 때에는 쉽지가 않습니다. 지금은 건설노동자들의 작업시간이 오전8시부터 오후5시까지로 정해져 있지만, 이렇게 시행된 것이 그렇게 오래된 일이 아닙니다. 오랫동안 그들의 노동시간은 해 뜰 때부터 해질 때까지였습니다. 고대에는 더욱 그러하였습니다. 그래서 종이나 품꾼은 매일매일 해가 지는 시간을 기다렸습니다. 해가 져야 종은 일을 그치고 비로소 쉴 수가 있고, 품꾼은 임금을 받아서 먹거리를 살 수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종과 품꾼이 해지는 시간을 기다렸다면, 욥은 해 뜨는 시간을 학수고대했습니다. 자신에게 임한 고통으로 인해서 잠을 이룰 수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수개월동안 고통 가운데서 잠자리에 들 때마다 빨리 아침이 오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잠자리에서 이리저리 몸을 뒤집는 전전반측(輾轉反側)하고 있는데, 그런 욥을 친구들이 이해해 주지 못했던 것입니다. 아니 이해하려고 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욥은 자신의 매일이 ‘베틀의 북’같다고 합니다. 베틀의 북은 베를 직조할 때의 틀로서 가로로 굉장히 빨리 지나갑니다. 욥은 4절에서는 언제 밤이 다 지나갈까 하며 새벽까지 이리 뒤척 저리 뒤척한다고 했었습니다. 즉 시간이 아주 천천히 가는 것처럼 느껴진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배틀의 북과 같이 빨리 지나간다고 합니다. 이 말씀은 그 초점이 ‘속도’에 있지 않고, ‘의미’에 있습니다. 그렇게 긴 밤을 하얗게 지새우며 보냈는데, 돌아보니 빨리 지나간 것 같기는 한데, 여전히 그 지난 세월이 자신에게는 아무런 희망을 주지 못하는 무가치했던 시간으로 여겨진다는 의미입니다.

또한 욥은 이렇게 독백합니다. 7-8절입니다.
내 생명이 한낱 바람 같음을 생각하옵소서 나의 눈이 다시는 행복을 보지 못하리이다 나를 본 자의 눈이 다시는 나를 보지 못할 것이고 주의 눈이 나를 향하실지라도 내가 있지 아니하리이다

욥은 자신의 생명이 ‘한낱 바람’과 같다고 고백합니다. 들판에서 서 있으면 이쪽에서 저쪽으로 바람이 훅 불고 갑니다. 그것이 자신의 인생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한낱 바람’을 개역한글성경에서는 ‘한 호흡’이라고 번역했는데, 그것이 더 깊이 와 닿습니다. 즉 욥은 자신의 인생이 “후-”라는 것입니다. 또한 자신은 다시는 행복(좋은 것)을 보지 못하게 될 것 같다고 합니다. 즉 이제는 자신 앞에는 끝없는 불행만이 전개될 것 같고, 앞으로는 험한 꼴만 볼 것 같다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자기를 아는 사람들이 자기를 다시 보지 못하고, 하나님께서도 자신을 찾으실 때도 자신이 없을 것이라고 하는 것은, 이제 자신은 별로 살고 싶지도 않다고 표현하는 것입니다.

이제 욥의 하소연은 하나님에게로 향합니다. 11-12절이 이렇게 증거합니다.
그런즉 내가 내 입을 금하지 아니하고 내 영혼의 아픔 때문에 말하며 내 마음의 괴로움 때문에 불평하리이다 내가 바다니이까 바다 괴물이니이까 주께서 어찌하여 나를 지키시나이까

고대 사람들에게 ‘바다’는 두려움의 대상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을 돌보시는 것을 표현할 때에 “네가 물 가운데로 지날 때에 내가 너와 함께 할 것이다. 강을 건널 때에 물이 너를 침몰하지 못할 것이다(사43:2)”라고 하셨습니다. 또한 ‘바다 괴물’은 ‘사람들을 고통스럽게 하고, 세상을 혼란시키는 존재를 대표’합니다. 욥은 하나님께 자신은 그렇게 산 적이 없는데, 자기를 바다처럼 다른 사람들을 삼키는 존재로, 바다 괴물처럼 다른 사람들을 괴롭히는 존재로 여겨, 자기를 감시하느냐고 하소연하는 것입니다.

욥의 하소연은 이렇게 이어집니다. 17-19절이 이렇게 증거합니다.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크게 만드사 그에게 마음을 두시고 아침마다 권징하시며 순간마다 단련하시나이까 주께서 내게서 눈을 돌이키지 아니하시며 내가 침을 삼킬 동안도 나를 놓지 아니하시기를 어느 때까지 하시리이까

욥의 이 하소연과 비슷한 표현인데, 정반대의 의미의 성경구절이 있습니다. 시편 8:4-5절이 이렇게 증거합니다.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돌보시나이까 그를 하나님보다 조금 못하게 하시고 영화와 존귀로 관을 씌우셨나이다

“인간이 하나님보다 조금 못하게 하셨다”라는 고백은 너무 엄청납니다. 창조주이신 하나님과 피조물인 인간은 무한한 질적 차이가 있습니다. 하나님과 인간과의 차이는 인간과 하루살이와의 차이보다 억 만 배의 억 만 배보다 큽니다. 시편기자의 이 고백은 하나님께서 인간을 너무 존귀하게 만드셔서 감동하고 감격하는 것입니다.
반면의 욥의 고백은 “하나님 제게 신경을 꺼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저를 좀 놔 주십시오. 내가 침을 삼킬 정도의 시간이라도 맘 편하게 살게 해 주십시오”의 비명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함부로 살도록 내버려 두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왜냐하면 존귀하게 지으셨기 때문입니다.

지난주일 설교 말씀을 통해서 확인했듯이 하나님께서는 사도 바울도 내버려 두지 않으셨습니다. 유대교의 주류에 편입되기 위해서 예루살렘에서 213km나 떨어진 다메섹까지 그리스도인들을 색출하려 연행하려고 가던 그를 돌려세우시고, 주님의 사도가 되게 하셨습니다.
또한 아라비아 광야에서 3년, 고향 다소에서 13년 동안 침거하고 있던 그를 내버려두지 않으시고 바나바와 더불어 안디옥 교회의 공동담임으로 불러내시고, 또 전도자로 불러내셨습니다. 전도자로 살면서도 풍토병에 걸리기도 하고, 돌에 맞아 죽은 것으로 여김을 받아 버려지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주님께서 바울을 내버려두시지 않으심으로 말미암아 그는 신묘막측한 은혜의 지도와 불가사의한 섭리의 지도를 그리는 인생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사순절 셋째 주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을 핏값을 주고 구속(救贖)해 주신 주님이 바로 우리의 주님이십니다. 주님께서 우리도 구속하시기 위해서 십자가에서 피를 흘려주셨습니다.

혹 우리의 삶에 힘듦이 있을지라도, 사도 바울과 같이 우리도 우리의 삶을 온전히 주님께 걸고, 주님과 함께 걷고 달리십시다. 사도 바울의 인생 지도가 찢어지지도, 색이 바래지도, 삭아 없어지지도 않게 만들어 주신 주님께서 우리의 인생지도도 동일하게 엮어지게 할 것입니다.
오늘도 주님께서 마음과 정성을 다하여 심어주신 삶의 자리에서 신묘막측한 은혜의 지도와 불가사의한 섭리의 지도를 그려 가시는 한 날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기 도
하나님 아버지!
욥이 “내가 무엇이라고 아침마다 찾아오셔서 단련하시며, 왜 나를 향한 눈을 떼지 않으십니까? 내가 침을 삼키는 동안만이라도 내버려두실 수 없습니까”라고 하소연해도, 그 모든 과정이 욥으로 하여금 신묘막측한 은혜의 지도와 불가사의한 섭리의 지도를 그리고 있기 때문임을 압니다.

혹 우리의 삶에도 크고 작은 고달픔과 어려움이 있을지라도, 그 모든 것이 주님께서 우리를 새롭게 하고 계시는 것이며, 우리가 우리의 삶을 주님께 걸고 주님을 목적으로 삼고 살면, 우리의 인생 지도도 찢어지지도 않고, 색이 바래지도 않고, 삭아 없어지지 않음을 잊지 않게 하여 주옵소서.

오늘도 주님의 십자가와 십자가의 주님으로 인해서,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의 영원한 주류로 살아가는 한 날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에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묵상을 돕는 질문
1. 오늘 본문의 말씀을 찬찬히 다시 읽고 그 내용을 정리해 보십시오.
2. 욥은 자신의 인생이 힘든 노동(전쟁)과 같다고 고백했습니다. 당신의 삶에서 그와 같았던 때는 언제였습니까?
3. 욥은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침을 삼킬 여유도 주시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당신이 그렇게 느낀 때는 언제였습니다. 그 때의 일(상황)은 어떻게 정리가 되었습니까?
4. 하나님께서 마음과 정성을 다하여 심어주신 삶의 자리에서 부르심에 응답하는 삶을 살기 위해서 무엇을 결단하시겠습니까?


(작성 : 정한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