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고린도후서 4:1-18
찬송가: 597 이전에 주님을 내가 몰라

고린도후서 4장은 3장에 이어 하나님의 영광이 율법이나 사람에게 있지 아니하고 예수 그리스도에게만 있음을 설명합니다. 고린도교회에 바울의 가르침과 사역에 오해를 갖고 대항하던 자들은 유대의 전통을 따라 율법을 지켜야한다고 주장하던 이들로 여전히 율법에 매여 그리스도인의 규범(음식, 성, 결혼, 그리고 법적 소송 등)은 바르게 이해하지 못한 채, 고린도의 개방된 문화 속에서 근친상간 죄를 범한 자들이었습니다. 사실, 바울은 이러한 복잡한 문제들로 인해 고린도 교회에 2차방문을 했었습니다. 누가도 사도행전에 기록하지 않았지만 고린도후서 12:14; 13:1-2에 ‘세번재 방문’이라 언급함으로 가슴아픈 ‘sorrowful visit’가 있었음을 유추 할 수 있습니다. 특별히, 2:1절 이후 가슴 아픈 방문이었기에 다시는 가지 않기로 결심까지 했었던 차였습니다. 그로인해, 사도바울은 디도를 교회에 보내 일어나는 일을 자세히 알아보면서 문제를 해결하려 했고. 에베소에서 고린도전서를 쓴 바울은 드로아에 가서 디도의 소식을 듣기 위해 기다렸습니다. 엎친데 겹친 격으로, 디도의 도착이 늦어지자, 마게도니아까지 바울은 이동하여 기다렸습니다. 결국 마게도니아에서 디도를 만나 고린도교회에 있던 문제들에 대한 해결과 바울에 대항 했던 이들에 대한 돌이킴과 회개에 대한 소식을 듣고 3차 전도여행 기간 중에 마게도니아에서 고린도후서를 쓴 것입니다.

이런맥락에서, 사도바울은 4장을 통해 비록 2차방문 때 받은 수많은 모함과 상처에도 불구하고 3장에 이어 부드럽고 문학적인 표현을 통해 바울은 고린도교회 교인들에게 은혜와 사명을 신학적으로 재정립하도록 도움으로 아픔과 상처를 아름답게 승화시킵니다.

먼저, 1절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 직분을 받아 긍휼하심을 입은 대로 낙심하지 아니하고” 여기서 직분은 3장6절에 언급한 ‘새 언약의 일꾼’을 가리킵니다. ‘직분’으로 번역된 헬라어는 ‘디아코니아’(diakonia)입니다. ‘Service’, 즉, 섬긴다 또는 봉사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직분은 하나님의 긍휼하심으로 말미암아 은혜를 입은 자들에게 주신 사명입니다. 여기서 잊지 말아야 할 사실은 은혜도 직분도 모두 하나님께서 주셨다는 것입니다. 나 자신이 은혜와 직분의 주인이 되면 이는 거짓이며, 3-4절에 언급된 대로 ‘복음을 가리는 것이며’ ‘마음을 혼미케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를 비치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바울은 단호하게 직분의 목적을 정의합니다. 5절입니다. “우리는 우리를 전파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 예수의 주 되신 것과 또 예수를 위하여 우리가 너희의 종 된 것을 전파함이라” 이를 통해 바울은 은혜와 직분의 주인은 사람이 아닌 하나님이심을 분명히 합니다.

둘째로, 이 분명한 직분의 목적을 위해 두 개의 그림언어를 사용합니다. 7절입니다.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심히 큰 능력은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주목해야 할 두단어가 무엇입니까? ‘보배’와 ‘질그릇’입니다. ‘보배’를 뜻하는 헬라어 ‘테사우로스’(thesauros)는 간직된 것, 보석을 뜻합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보배입니까? 바로 앞서 6절에 언급된 ‘영광을 아는 빛’이 그 보배입니다. 영광은 하나님을 들어내는 영원한 빛을 뜻하며, 그 빛이 바로 예수그리스도입니다. 보배 되신 예수 그리스도가 연약하고 가치 없는 질그릇 같은 우리에게 거하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사45:9; 시22:15)
뿐만 아니라, 보배 되신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 우겨쌈을 당하여도 답답한 일이 생겨도 박해를 받아 버린바 되어도 괜찮다고 바울은 말합니다. 동시에 보배를 담은 질그릇의 특권이 사명임도 언급합니다. 10절입니다.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진 다는 것은 희생한다는 뜻입니다. 왜 희생합니까? 그 희생 뒤에 그 죽음 뒤에 들어날 예수의 생명이 직분 맡은 질그릇 같은 우리들에게 나타나게 하려 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11절)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죄와 사망의 권세를 깨뜨린 것은 부활의 승리 때문이었듯이,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할 때 부활의 영광에도 참여하게 된다는 바울의 신학을 볼 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사도바울은 16절에 다음과 같이 마지막 권면을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왜 낙심하지 않습니까? 은혜로 말미암아 직분을 받은 자들은, 질그릇에 보배를 담고 살아가는 이들은 겉사람은 계속 낡아지지만 속사람은 날마다 새로워지기 때문이며, 직분맡은 이들은 잠시 받는 환난에 떨지 않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바라기 때문이고, 직분 맡은 그리스도인들이 주목하는 것은 잠깐 있다 사라지는 것들이 아닌 영원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두 가지를 생각해 봅니다.
첫째로, 직분은 자랑할 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자랑할 분은 예수 그리스도일 뿐입니다. 질그릇같이 연약하고 부족한 우리와 동거하며 동행하시는 예수 그리스도 그분만을 자랑해야 합니다. 우리의 삶이 조금이나마 영광의 광채가 난다면 이는 우리의 공로와 수고 때문이 아닌 예수 그리스도의 내주하심 때문입니다.

둘째로, 직분을 맡은 모든 그리스도인은 희생을 피할 수 없습니다. 누군가를 섬긴다는 것은 자신를 부인하는 일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기 위해 지불해야 했던 것은 십자가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성육신하셔서 우리와 더불어 살아가시며 고난 받고 조롱당하셔야 했던 자기부인 이였습니다.

잊지맙시다. 우리의 연약함과 불신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우리 안에서 살아 역사하시는 예수그리스도, 그 복음만을 자랑하십시다. ‘하나님의 손이 짧지 않은 것은’ 바로 나 같은 죄인까지도 품고 사랑하시기 때문 아니겠습니까?

오늘 하루를 시작하며 나 같은 죄인을 사랑하시는 하나님과 질그릇같이 아무런 가치도 필요도 없는 내 안에서 광채를 발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기억하십시다. 또한 허물투성이인 우리에게 직분을 믿고 맡기시고 봉사를 통해 성령의 열매와 은사들을 더하시는 성령님을 기억하십시다. 그리하여, 이기심의 독성과 폐해를 되돌려 주고 받은 인생이 아니라 바른 믿음으로 예수 그리스도만 자랑하며 섬김의 본을 보이는 믿음의 명문가정이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은혜와 직분의 주인이 하나님 아버지이심을 기억하게 하여 주셔서 감사합니다.
수많은 직함과 공로로 스스로를 포장하려고 애쓰지 않게 하여 주옵소서.
정직히 나의 나됨이 나에게 있지 않고 오로지 보배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에게 만 있음을 고백하며 예수 그리스도만 자랑하는 우리 모두 되게 하옵소서. 그리하여 존귀한 보배를 담는 질그릇이라는 존재만으로 감사하며 정결한 삶 살아내는 100주년기념교회 모든 교우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묵상을 돕는 질문
1. 교회에서 힘들게 봉사하고 누군가의 격려 또는 알아줌을 기대해 본적이 있는가?
2. 어떻게 하면 누군가가 알아주지 않더라도 봉사에 매진할 수 있는 마음자세를 스스로 고취시킬 수 있을까?
3. 질그릇에 담긴 보화를 생각해 봤는가? 가치 있어 보이는가?
4. 지나친 포장이 보화를 가릴 수도 있다고 생각해 봤는가? 왜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하는가?

작성자: 박창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