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시편 9:1-20
찬송가 432장 ‘큰 물결이 설레는 어둔 바다’


심판의 찬미(1-8절)
오늘 본문 시편 9편과 내일의 본문인 시편 10편은 본래 하나였다가 2개로 나뉘었다고 여겨집니다. 그렇게 보는 이유로는 히브리어성경과 히브리어성경을 헬라어로 번역한 <70인역성경> 그리고 <70인역성경>을 라틴어로 번역한 <불가타성경>에는 모두 시편 9편과 10편이 하나로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9편에는 표제어가 있는 반면에, 10편에는 표제어가 없습니다. 무엇보다도 9편과 10편의 내용이 히브리어 알파벳 순서로 되어 있습니다. 히브리어 알파벳은 모두 22자입니다. 거의 2절씩 알파벳 순서대로 시작이 되고 있습니다. 한시(漢詩)는 끝자리의 운자를 맞추지만, 히브리 시는 첫 자를 맞추곤 했습니다. 시편 150편 중에는 알파벳 순서로 된 시편이 모두 8개가 있는데, 첫 시편이 9-10편이고, 그 중에서 가장 대표적인 것은 119편입니다. 아시는 바와 같이 시편 119편은 성경에서 가장 긴 장입니다. 176절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그 176절이, 8절씩 22부분으로 나뉘어 있습니다. 즉 시편 119편 1-8절까지 8절은 히브리어의 첫 알파벳인 ‘알레프’로 시작되고, 9-16절까지 8절은 히브리어 두 번째 알파벳인 ‘베트’로 시작됩니다. 그렇게 해서 마지막 22번째 알파벳까지 하면 176절이 됩니다. 이러한 시를 ‘알파벳 시편’이라 부르기도 하고, ‘답관체 시편(Acrostic Psalm)’이라 부르기도 합니다. 그렇게 시를 쓰는 이유는 시편을 좀 더 잘 외고, 가르칠 때에 편하기 위해서 라고 합니다. 우리도 성경에 여러 가지를 외울 때 그와 같은 방법으로 하곤 하지 않습니까? 과거에 신학대학원에 들어가기 위해서 입시공부를 할 때에, 사사시대의 12사사를 그와 같은 방법으로 외웠던 기억이 있습니다. ‘옷(니엘), 에(훗), 삼(갈), 드(보라), 기(드온), 돌(라), 야(일), 입(다), 입(산), 엘(론), 압(돈), 삼(손)’과 같이, 시를 그와 같은 방법으로 외는 것입니다.

오늘 시편의 표제어가 <다윗의 시, 인도자를 따라 뭇랍벤에 맞춘 노래>라고 되어 있습니다. ‘뭇랍벤’이라는 단어가 시편에서 여기에만 나오기 때문에 그 의미를 알기가 쉽지 않습니다. 뭇랍벤에서 ‘벤’은 ‘아들’이라는 의미입니다. 야곱의 막내아들의 이름이 ‘벤-야민’입니다. 그 뜻이 ‘오른손의 아들’입니다. ‘벤허’라는 제목의 영화가 있었는데 벤허가 ‘훌의 아들’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이 뭇랍벤은 ‘아들의 죽음’이란 의미로 여겨집니다. 그래서 NIV영어성경은 ‘아들의 죽음을 노래한 곡조를 따라(To the Tune of the Death of the Son)’라고 표제어를 달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시편은 어떤 배경으로 지어졌는지가 명확하지 않습니다.

1-2절이 이렇게 증거합니다.
내가 전심으로 여호와께 감사하오며 주의 모든 기이한 일들을 전하리이다 내가 주를 기뻐하고 즐거워하며 지존하신 주의 이름을 찬송하리니

다윗은 전심으로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며, 하나님을 기뻐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2가지를 결심을 합니다. 첫째는 ‘주님의 모든 기이한 일들을 전하겠습니다’라고 합니다. 둘째는 ‘지존하신 주님의 이름을 찬송하겠다’고 다짐합니다. ‘찬양과 경배’가 무엇인지를 다양하게 정의할 수 있겠지만, 저는 이렇게 정의하는 것을 좋아합니다. “찬양은 하나님의 역사(행하심)를 노래하는 것이고, 경배는 하나님의 성품을 노래하는 것이다.” 물론 노래한다는 것은 목소리로만 하는 것이 아니라 삶으로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1-2절은 다윗의 찬양과 경배가 되는 셈입니다.
크고 작은 질병에서 고침을 받은 사람이 이렇게 하나님께 고백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 하나님은 제 치유자이십니다.”, 또 인생의 질곡에서 빠져나온 사람이 하나님께 이렇게 고백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 하나님은 제 삶을 인도하신 분이십니다.” 이런 것들이 하나님께 찬양을 드리는 것입니다. 또한 형편없는 나에게도 한결같이 대해 주시는 하나님께 이렇게 고백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하나님은 긍휼이십니다.” 또한 내가 어디에 있든지 거기 계시는 하나님을 향해 “하나님, 하나님은 무소부재하신 분이십니다”라고 노래할 수 있습니다. 그것이 경배입니다.

다윗이 하나님께 감사드리며, 하나님을 기뻐하는 그 이유를 3-6절이 이렇게 증거합니다.
내 원수들이 물러갈 때에 주 앞에서 넘어져 망함이니이다 주께서 나의 의와 송사를 변호하셨으며 보좌에 앉으사 의롭게 심판하셨나이다 이방 나라들을 책망하시고 악인을 멸하시며 그들의 이름을 영원히 지우셨나이다 원수가 끊어져 영원히 멸망하였사오니 주께서 무너뜨린 성읍들을 기억할 수 없나이다

다윗이 드리는 감사와 기쁨의 이유는 원수들이 도망을 가다가 넘어졌는데 그것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의와 송사를 변호해 주셨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즉 하나님께서 보좌에 앉으셔서 의롭게 심판하신다고 신앙 고백하는 것입니다. 다윗이 하나님께서 나의 의와 송사를 변호해 주시며, 의로운 심판을 행하신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은, 다윗의 삶이 그만큼 정결하였음을 의미합니다. 우리도 동일합니다. 하나님께서 내 의와 송사를 변호해 주신다는 것은 내가 하나님 앞에서 바르게 살기 위해서 몸부림을 쳤음을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앞에서 바르게 살려는 몸부림이 세상적으로는 재미없게 보일지라도 그것이 우리를 지켜 줍니다.

또한 이방나라를 책망하시고, 그들의 이름을 지우시고, 주님께서 무너뜨린 성읍을 기억할 수 없다는 것은 출애굽과 가나안 땅에서의 전쟁을 치를 때에 하나님께서 역사하신 일을 표현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이스라엘 자손들이 출애굽할 수 있게 된 것은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이고, 사랑하심의 결과였습니다. 이스라엘 자손들이 아무리 원하였더라고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풀지 않으셨다면 애굽의 손아귀에서 벗어나지 못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애굽에서 벗어나 자유로운 백성이 되게 해 주시기 위해서 애굽에 10가지 재앙을 내리셨고, 홍해를 갈라주셨고, 그 바닥을 마른 땅과 같이 만들어 주셨습니다. 그리고 광야 40년 동안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인도해 주셨고, 의복이 헤어지지 않고, 발이 부르트지 않게 역사해 주셨습니다. 가나안 땅을 차지하게 되는 때에도 하나님의 역사는 그치지 않았습니다. 이스라엘 자손들은 애굽에서 노예였기 때문에 군대를 조직하거나, 무기를 사용하는 것이 근원적으로 차단되어 있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어떻게 가나안 땅을 차지 할 수 있었겠습니까? 그래서 다윗은 조상 이스라엘 자손들이 성읍을 무너뜨렸다고 하지 않고, “주님께서 무너뜨린 성읍들을 기억할 수 없습니다.”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구원과 심판(9-20절)
다윗이 하나님에 대해서 9-10절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여호와는 압제를 당하는 자의 요새이시오 환난 때의 요새이시로다 여호와여 주의 이름을 아는 자는 주를 의지하오리니 이는 주를 찾는 자들을 버리지 아니하심이니이다

다윗은 하나님께서 압제를 당하는 사람들에게 요새가 되신다고 합니다. 다윗이 사울의 칼을 피해 도망을 다닐 때에 하나님께서 요새가 되심을 깊이 체험했을 것입니다. 지금은 전쟁이 발발하면, 전후방이 따로 없고, 높은 곳 낮은 곳이 따로 없습니다. 왜냐하면 전투기로 공격을 하거나 대포나 미사일을 날리면 높은 곳에 있어도 소용이 없습니다. 하지만 고대에는 달랐습니다. 높은 곳의 요새는 전쟁에 절대적으로 유리했습니다. 하지만 다윗은 참된 요새는 자연 지형에 만들어진 건물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러하시다고 고백합니다.
다윗은 하나님에 대해서 체험적으로 깊이 압니다. 시편 27:10에서 다윗은 “내 부모는 나를 버렸으나 여호와는 나를 영접하시리이다”라고 고백합니다. 다윗이 자기 부모에게서 버림받은 적은 없지만, 혹 그런 처참한 상황일지라도 하나님은 자기를 찾는 사람들을 버리지 않으시는 분이시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다윗의 하나님에 대한 고백은 13-14절에서 이렇게 이어집니다.
여호와여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나를 사망의 문에서 일으키시는 주여 나를 미워하는 자에게서 받는 나의 고통을 보소서 그리하시면 내가 주의 찬송을 다 전할 것이요 딸 시온의 문에서 주의 구원을 기뻐하리이다

다윗은 자신이 대적자들로 인해서 죽음의 문턱에까지 갔었지만, 하나님의 이끌어주심과 건져올려주심으로 인해서 하나님을 찬양하며, 하나님의 구원을 기뻐한다고 고백합니다.

바울과 실라가 빌립보에서 귀신이 들려 점을 치던 소녀를 고쳐주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에게 돌아온 것은 감사와 박수가 아니라 심한 매질과 감옥에 갇힘이었습니다. 그 때에 바울과 실라는 그 속에서 무엇을 했는지를 사도행전 16:25절이 이렇게 증거합니다.
한밤중에 바울과 실라가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송하매 죄수들이 듣더라

인간적으로 생각하면 참 억울합니다. 바울 일행은 잘못한 것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결과는 감옥 안이었습니다. 그것도 깊은 감옥이었습니다. 그 때에 바울과 실라가 ‘기도하였다’는 것은 쉽게 이해가 됩니다. 하지만 찬송을 드렸다는 것은 빨리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찬송은 그런 상황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바울과 실라가 그 상황에서 찬송을 드렸다고 하는 것은, 그 상황을 진심으로 수용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비록 상황이 어렵고 힘들어도, 그 상황으로 인도하신 분이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진심으로 수용하면,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찬양이 터져 나옵니다. 마침내 하나님께서 옥문을 열어주셨고, 간수의 마음의 문도 열어, 그 집안에도 복음이 전해지게 되었습니다.

오늘의 시편은 악인의 심판을 기원하며 이렇게 마무리가 됩니다. 19-20절이 이렇게 증거합니다.
여호와여 일어나사 인생으로 승리를 얻지 못하게 하시며 이방 나라들이 주 앞에서 심판을 받게 하소서 여호와여 그들을 두렵게 하시며 이방 나라들이 자기는 인생일 뿐인 줄 알게 하소서 (셀라)

지금 다윗의 기원처럼 시편에는 시인이 하나님께 악인을 벌해달라는 기도를 드리는 내용이 있습니다. 어떻게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그런 기도를 드릴 수 있는가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그것은 지금 시인이 처한 상황이 악인으로 인해서 그만큼 처절하고 고달프고 힘들다는 의미로 수용해야 합니다. 그래서 그 하소연을 하나님께 하는 것이고, 하나님을 향해 고통스럽다며 비명을 지르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은 그 상황을 이해하려고 하는 것이 바른 태도입니다. 그렇지 않을 때 우리는 욥의 친구와 같이 됩니다. 내가 가진 믿음의 틀과 하나님에 대한 생각이 신앙의 전부는 결코 아닙니다.
또한 그 기도 하나님께 맡기는 믿음의 고백으로 드리는 것으로 받아야 합니다.
다윗이 아들 압살롬에게 쿠데타를 당하여 도망을 가야만 했습니다. 심지어 신발도 신지 못하고, 머리를 풀어헤치고, 눈물을 삼키며 감람산으로 올라가야만 했습니다. 그 때에 다윗은 이렇게 기도를 드렸습니다. 시편 3:1절입니다.
여호와여 나의 대적이 어찌 그리 많은지요 일어나 나를 치는 자가 많으니이다

다윗은 이렇게 기도하고서도 압살롬과 그와 함께 한 무리들을 내 손으로 해치우겠다고 달려나가지 않았습니다. 이 기도는 하나님께 맡기겠다고 하는 표현입니다. 사실 다윗은 사울왕에게 쫓겨 다니던 시절에도 사울왕을 죽일 기회가 2번이나 있었음에도 그렇게 하지 아니하고, 한번은 겉옷자락만 가만히 베고, 또 한 번은 머리맡에 있던 병과 칼만 가지고 나왔습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바른 믿음의 태도라고 여겼기 때문이었습니다.

우리의 인생에는 이해가 되는 일도 많지만, 이해가 되지 않는 일도 적지 않습니다. 또 이유를 알 수 없는 고난의 터널을 통과해야 할 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우리가 그런 과정을 겪고 있는 것을 모르지 않으십니다. 그런 때에도 우리가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며, 역설의 진리의 삶을 살게 될 때에, 우리가 삶으로 쓰는 시편은 우리의 인생 지도를 은혜와 섭리의 지도를 그려가는 믿음의 색종이가 될 것입니다. 오늘 하루도 하나님께서 마음과 정성을 다하여 심어주신 삶의 자리가 하나님께 찬양과 경배를 올려드리는 은총의 현장이 되기를 축복합니다.


기 도
하나님 아버지!
우리들이 하나님이 없이도 인생을 충분히 잘 살 수 있을 것이라는 착각과 오만함에서 벗어나게 하시고, 우리의 인생을 하나님과 더불어 살아가는 것이 가장 복되며, 우리의 매일매일을 하나님 앞에 세우는 것이 가장 가치가 있는 것임을 잊지 않게 하여 주시옵소서.

하나님, 우리가 매 순간은 하나님의 행하심이 이해가 되지 않아 실망하기도 하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외면하시는 것 같아 두려움을 느낄 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의 삶을 돌아보면 하나님의 세심한 손길과 인도하심에 감사를 드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예루살렘 성벽을 다 쌓은 후에, 수문 앞 광장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던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하나님께서 마음과 정성을 다하여 심어주신 삶의 자리를 수문 앞 광장으로 만들어, 그곳에서 역설의 진리의 삶을 살아갈 뿐 만 아니라, 매일 나의 시편을 쓰게 하여 주시옵소서. 오늘도 그런 은총 속에 살아가는 한 날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묵상을 돕는 질문
1. 당신이 하나님의 말씀을 좀 더 가까이 하고, 깊이 이해하기 위해서 취하는 방법은 무엇이 있습니까?
2. 당신은 최근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기 위해서 하나님께 올려드린 찬양과 경배는 무엇이었습니까(목소리로 드리는 것뿐만 아니라 삶으로 드리는 것도 포함하여)?
3. 당신이 최근에 통과해야 했던 삶의 질곡은 어떤 것이었습니까? 그 과정을 어떻게 견뎌내고 이겨내셨습니까?
4. 오늘도 하나님께 마음과 정성을 다하여 심어주신 삶의 자리에서 자기 십자가를 지는 삶, 자기를 부인하고 역설의 진리의 삶을 구현하기 위해서 무엇을 결단하시겠습니까?


(작성 : 정한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