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사사기 9장 22-57절
찬송가 204장 ‘주의 말씀 듣고서’

오늘 본문은 <아비멜렉이 이스라엘을 다스린 지 삼 년에>라는 말씀으로 시작합니다. 아비멜렉은 이스라엘의 사사였던 기드온의 아들 70명 중에 한 사람으로 자기 형제들을 다 죽이고 이스라엘의 왕이 된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이름의 뜻인 ‘나의 아버지가 왕이다’에서 보여주는 것처럼 그는 교만한 사람이었으며, 스스로 왕이 되고자 자기 형제들을 죽이는 악행까지 저지른 아주 나쁜 사람이었습니다. 그렇게 왕권을 잡은 아비멜렉이 이스라엘을 다스린 지 3년이 되었을 때, 아비멜렉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 시작되었습니다. 이 말은 아비멜렉이 왕이 되었지만 왕권을 제대로 펼쳐보기도 전에 몰락하고 말았다는 의미입니다. 23절을 보시겠습니다.

“하나님이 아비멜렉과 세겜 사람들 사이에 악한 영을 보내시매 세겜 사람들이 아비멜렉을 배반하였으니”

‘하나님이 아비멜렉과 세겜 사람들 사이에 악한 영을 보내..’셨다고 했는데, 아비멜렉과 세겜 사람들은 친척지간이었을 뿐만아니라, 이 둘은 서로 공생관계에 있을 정도로 아주 밀접한 사이였는데 그 관계에 금이 간 것입니다. 세겜은 므낫세 지파에 속한 땅입니다. 기드온이 므낫세 지파였기에 세겜은 기드온의 주 활동지역 중 하나였습니다. 뿐만아니라 9장 1절에 보면, ‘여룹바알의 아들 아비멜렉이 세겜에 가서 그의 어머니의 형제에게 이르러 그들과 그의 외조부의 집의 온 가족에게 말하여 이르되’ 즉 세겜에는 아비멜렉의 외갓집이 있었으며, 그의 외삼촌과 외조부의 집안 사람들은 아비멜렉이 이스라엘의 왕이 되는데 일등공신 역할은 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 그들이 지금은 아비멜렉을 배반하였습니다. 배반의 이유가 무엇입니까? 24절입니다.

“이는 여룹바알의 아들 칠십 명에게 저지른 포학한 일을 갚되 그들을 죽여 피 흘린 죄를 그들의 형제 아비멜렉과 아비멜렉의 손을 도와 그의 형제들을 죽이게 한 세겜 사람들에게로 돌아가게 하심이라"

세겜 사람들이 아비멜렉을 배반한 직접적인 이유는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이 둘 사이에 금이 가게 된 이유는 하나님께서 그들의 악행에 심판자로 임하셨기 때문이라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는 역사를 주관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심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 세상에 불의한 일들이 일어나고 있고 그로 인해 선량한 사람들이 해를 당하고 있을지라도, 그것을 하나님은 방관자로 지켜만 보고 계신 게 아니라 때가 되면 하나님이 직접 심판자로 개입하신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악한 일로 의기투합한 사람들의 관계는 결코 해피엔딩이 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악한 동기로 맺어진 관계속에는 항상 악이 내재되어 있기에 언제고 자기 이익을 위해서라면 무슨 일이든 서슴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름다운 관계속에는 항상 누군가의 희생과 헌신이 있습니다. 그 희생과 헌신으로 말미암아 그 관계가 아름다워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악한 동기로 맺어진 관계속에는 희생과 헌신을 찾아볼 수 없고 오직 이기적인 욕심만이 있기에 해피엔딩이 될 수 없는 것입니다.

오늘은 새로운 대통령이 선출된 날입니다. 실은 4년 전에도 오늘처럼 똑같이 새로운 대통령이 선출되었습니다. 그러나 4년이 지난 지금 그때 선출된 대통령은 감옥에 있으며 앞으로 법에 따라 심판받을 것입니다. 이는 악한 일로 의기투합한 결과입니다. 악한 동기로 맺어진 관계는 언제나 희생과 헌신은 찾아볼 수 없고, 오직 이기적인 욕심만이 있기에 해피엔딩일 수 없음을 성경은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고, 역사는 그것을 입증하고 있습니다.

세상은 남들보다 더 큰 꿈을 품고 더 큰 소원을 이루기 위해 열심히 살면 언젠가 큰 인물이 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큰 꿈과 더 큰 소원을 갖기 전에 그것이 하나님이 원하는 것인지를 먼저 점검해야 한다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이 원하는 것인지 아닌지를 깨닫기 위해서 반드시 전제되어야 할 것이 바로 자기부인입니다. 자기부인이란 자기를 비우는 것이고, 욕망을 내려놓는 것이며, 그로인해 당할 손해까지도 기꺼이 감수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아비멜렉은 자기부인보다 먼저 자신의 꿈과 야망을 우선시 했습니다. 그 야망을 이루기 위해서라면 자신의 형제 70명을 죽이는 것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스스로 왕이 되기 위해 형제들을 죽인 행위는 포악한 것이며, 그 결과는 심판과 사망임을 보여 주십니다. 이 심판은 아비멜렉을 도와 악한 일을 도모한 세겜 사람들에게 먼저 임합니다. 40절입니다.

“아비멜렉이 그를 추격하니 그 앞에서 도망하였고 부상하여 엎드러진 자가 많아 성문 입구까지 이르렀더라”

아비멜렉은 이스라엘 성읍 중 가장 큰 성읍이었던 세겜성을 점령한 다음, 세겜 망대로 도망간 백성들을 끝까지 추격하여 그들을 불태워 죽였습니다. 그리고 한자리에서 천명을 불태워 죽인 아비멜렉은 그것도 양이 차지 않았는지, 이번에는 세겜성보다 작은 성읍인 데베스를 공격합니다. 아비멜렉의 공격을 받은 데베스의 백성들은 데베스에 있는 가장 견고한 망대 꼭대기로 올라가 몸을 피했습니다. 그러자 아비멜렉은 그 망대마저 불사르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바로 그때 한 여인이 망대 위에서 맷돌 윗짝을 던졌는데, 그것에 정통으로 맞아 아비멜렉은 두개골이 깨져 거반 죽게 되었습니다. 52절~53절입니다.

“아비멜렉이 망대 앞에 이르러 공격하며 망대의 문에 가까이 나아가서 그것을 불사르려 하더니 한 여인이 맷돌 윗짝을 아비멜렉의 머리 위에 내려 던져 그의 두개골을 깨뜨리니”

맷돌에 맞아 거반 죽게 된 아비멜렉은 죽어가는 순간에도 여인에게 죽었다는 불명예를 남기지 않기 위해 그의 병기 잡은 소년에게 죽여줄 것을 부탁하여 결국 그 칼에 찔려서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습니다. 파멸의 순서만 달랐을 뿐, 세겜 사람들과 아비멜렉은 모두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게 되었는데, 성경은 그 이유가 아비멜렉의 죄와 세겜 사람들의 악행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아비멜렉은 스스로 왕이 되고자 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길이 아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비멜렉이 왕이 되고자 한 것은 하나님을 자기 인생의 왕으로 인정하지 않고 스스로 자기 인생에서도 왕이 되고자 한 것입니다. 이처럼 스스로 자기 인생의 왕이 되고자 할 때, 그 인생은 파멸에 이를 수 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반드시 인생사용설명서인 성경의 말씀대로 살 때만, 행복한 삶을 살 수 있도록 창조되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꿈과 소원을 이루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을 살고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알기 위해서는 먼저 자기를 비우고, 이기적인 욕심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그럴 때만 욕망에 눈이 멀어 하나님의 뜻에 무감각해 있는 나를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습니다. 나의 시선이 아닌 주님의 시선 안에서 객관적으로 나를 바라볼 때만 우리는 참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은 나를 위한 이기적인 삶이 아니라, 우리를 위한 헌신과 희생의 삶임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나의 하나님, 나의 사람’을 위한 삶이 아니라, ‘우리의 하나님, 우리의 이웃’을 위한 삶을 살아갈 때만 우리는 주님 안에서 날마다 새로운 존재로 거듭나게 될 것입니다.

기도

사랑의 주님, ‘나의 하나님, 나의 사람’을 위한 이기적인 욕망을 내려놓고, ‘우리의 하나님, 우리의 이웃’을 위해 섬김과 봉사의 삶을 살아가게 해 주옵소서. 오늘 새로운 대통령이 선출되었습니다. 악한 이들과 의기투합하는 어리석은 지도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이루며 국민을 위해 섬김과 봉사의 삶을 실천하는 지혜로운 지도자가 되게 해 주옵소서. 우리들도 오늘 선출된 대통령이 지혜로운 지도자가 될 수 있도록 함께 힘을 모아 협력하며 기도하는 국민의 한 사람이 되게 해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묵상을 돕는 질문
1. 악으로 의기투합한 결과는 어떻게 드러났습니까?
2. 더 큰 꿈을 품고 더 큰 소원을 이루는 것 보다 중요한 것은 무엇입니까?
3.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을 살기 위해 나에게 요구되는 것은 무엇입니까?
4. ‘나의 하나님 나의 사람’에서 ‘우리의 하나님 우리의 이웃’을 위한 삶을 살기 위해 어떤 구체적인 실천이 나에게 필요하겠습니까?


(작성: 이성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