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3/12(금) “갈라디아서 6:1-10” / 작성: 정한조
[본문] 갈라디아서 6:1-10
[찬송가] 496장 ‘새벽부터 우리’



[나누어서 지는 짐과 홀로 지는 짐(1-5절)]
갈라디아서 1:1-5까지가 도입부(인사)이고, 1:6-6:10까지가 본론부이며, 6:11-18이 종결부입니다. 그러니까 오늘 본문이 본론의 마지막 부분에 해당합니다. 오늘 본문은 그리스도인 공동체가 가져야 할 믿음의 자세에 대해서 증거합니다. 갈라디아서는 율법주의에 대해 경계하고 있는데, 율법주의의 큰 특징은 사람을 자유하게 하지 않고 얽어매는 것입니다. 그래서 율법주의는 실패의 길로 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은 다른 법을 말합니다.
[(2) 너희가 짐을 서로 지라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

율법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주신 법, 주님께서 주신 삶의 원리를 따르면 실패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 실천사항이 서로 상대의 짐을 덜어주는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시편 55:22은 이렇게 증거합니다. [“네 짐을 여호와께 맡기라 그가 너를 붙드시고 의인의 요동함을 영원히 허락하지 아니하시리로다”]
우리의 짐을 하나님께 맡기라고 권합니다. ‘맡기다’의 문자적인 뜻은 ‘던지다’입니다. 우리의 짐을 하나님께 던지면 흔들리지 않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짐을 던지지 못하면 그 짐을 들고 있느라 주님을 신뢰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인생이 흔들리게 됩니다.

또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11:28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주님께서도 우리가 주님께로 가면 주님께서 우리의 짐을 져 주시어 우리를 쉬게 해 주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왜 사도바울은 우리의 짐을 서로 지라고 말씀하고 있겠습니까? 바울은 구약성경에 이런 말씀이 있다는 사실을 몰랐기 때문이었겠습니까? 또한 바울이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보내실 때 직접 뵌 적이 없었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하신 이 말씀을 듣지 못해서이겠습니까? 이 말씀에 대한 답변은 고린도후서 7:5-7이 대신해 줍니다.
[(고전 7:5-7) 우리가 마게도냐에 이르렀을 때에도 우리 육체가 편하지 못하였고 사방으로 환난을 당하여 밖으로는 다툼이요 안으로는 두려움이었노라 그러나 낙심한 자들을 위로하시는 하나님이 디도가 옴으로 우리를 위로하셨으니 그가 온 것뿐 아니요 오직 그가 너희에게서 받은 그 위로로 위로하고 너희의 사모함과 애통함과 나를 위하여 열심 있는 것을 우리에게 보고함으로 나를 더욱 기쁘게 하였느니라]

하나님께서는 바울에게 꿈이나 환상을 통하여 말씀하시기도 하셨지만, 바울이 마게도냐에 있을 때는 디도를 보내어서 위로해 주셨습니다. 바울은 디도가 온 것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위로하기 위해서 보내어 주셨다고 믿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역사를 펼치실 때, 대부분은 사람을 통해서 행하십니다. 그래서 본문에서 우리가 서로 짐을 져 주는 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법의 성취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M. Luther)는 6:2의 말씀을 보고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튼튼한 어깨와 힘찬 골격을 갖추어야 합니다.” 우리의 영적 어깨가 강건하고, 영적 골격이 튼튼해야 다른 사람의 짐을 나누어지고서도 흔들리지 않을 수 있습니다. 또한 우리가 서로의 짐을 나누어서 지는 것이 자신을 영적으로 튼튼하게 만들기도 합니다. 그렇게 서로 짐을 지는 공동체와 사회는 건강하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5절은 이렇게 증거합니다.
[(5) 각각 자기의 짐을 질 것이라]

이제는 자기 짐은 자기가 져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2절과 5절을 합해서 정리하면, ‘자신이 져야 할 짐은 자신이 지면서, 다른 삶의 짐을 나누어서 질 수 있어야 한다’입니다. 만약 자기 짐만을 지고, 다른 사람의 짐을 함께 져 주는 삶에 대해서 완전히 무관심하거나 외면하는 사람은 바르고 건강한 그리스도인이 되기 어렵습니다. 그는 주님께서 자신이 해결할 수 없는 짐을 대신 져 주었다는 것을 알지 못하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반면에 자기 짐을 스스로 지려고 하지 않고, 다른 사람에게 의존하려고만 맡기려고 한다면, 그는 공동체를 깨는 사람입니다.
프로 축구팀이 뛰어난 클럽, 명문구단이 되려면 일차적으로는 그 팀에 속한 선수 각 개인이 잘해야 합니다. 자기가 서는 포지션의 짐을 스스로 져야 합니다. 만약 손흥민 선수가 뛰고 있는 영국 프리미어리그 토트넘 홋스퍼 FC나 메시 선수가 있는 스페인 프리메라리가 FC 바르셀로나에 저 정도의 실력을 가진 선수가 한 명만 있어도 그 팀은 자국 프로축구리그에서 꼴찌를 면치 못할 것입니다. 2부 리그로 내려가야 함은 말할 필요도 없고, 3부 리그나 4부 리그로 가야 할지 모릅니다. 저와 같은 선수가 경기장에서 열심히 뛰어다닐수록 그날은 더 큰 패배를 기록하게 될 것입니다. 만약 저 같은 선수가 한 명 더 있다면, 그 팀은 프로팀 간판을 내려야 할 것입니다.
축구팀이 뛰어나려면 개인이 잘해야 하지만, 한 사람만 아주 잘한다고 해서 명문구단이 되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축구는 혼자서 하는 경기가 아니라 11명이 하는 경기이기 때문입니다. 뛰어난 축구팀이 되려면, 자신의 위치에서 역할을 잘 감당할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을 도울 수 있어야 합니다. 즉 상대의 짐을 함께 져 주는 것입니다. 자기 짐을 지고, 상대의 짐도 나누는 사람이 어제 살핀 성령의 열매를 맺어가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실제로 문제를 가진 사람을 접하게 되었을 때, 어떤 방법으로 해야 하는지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1) 형제들아 사람이 만일 무슨 범죄한 일이 드러나거든 신령한 너희는 온유한 심령으로 그러한 자를 바로잡고 너 자신을 살펴보아 너도 시험을 받을까 두려워하라]

죄를 범한 사람은 바로 잡아주라고 하십니다. ‘바로잡다(카타르티조)’는 ‘원상으로 회복시키다’의 뜻입니다. 즉 어떤 일이 일어나기 이전의 상태가 되도록 도와주는 것입니다. 또 이 단어는 ‘탈골을 치료할 때’에 사용했었습니다. 어깨뼈가 빠졌을 때, 병원이나 접골원에 가면 원래 뼈가 있는 곳에 바로 끼워줍니다. 그것이 ‘바로잡다’입니다.
또 마가복음 1:19에 보면, 예수님께서 야고보와 요한을 제자로 부르시는 장면이 나오는데, 그때 그들은 그물을 깁고 있었습니다. 바로 그 ‘그물을 깁다’와 ‘바로 잡다’가 같은 단어입니다. 어릴 때 바닷가에 살아서 어부들의 모습을 자주 보았습니다. 어부들은 물고기를 잡기 위해서 해가 뜨기 전 어두울 때 배를 타고 나갑니다. 그리고 날이 밝으면 돌아와서 그물을 손질합니다. 해초류가 있으면 제거하고, 찢어진 곳이 있으면 꼭 깁습니다. 왜냐하면 원래 상태로 해 놓아야 다음날 물고기를 또 잡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대부분의 영어 성경은 ‘바로잡다’를 ‘restore(회복하다)’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바로잡아 주는, 회복하게 해주는 일은 ‘신령한 너희’가 해야 한다고 합니다. 즉 그런 일은 특정한 사람만의 역할이 아니라 모든 그리스도인의 역할이라는 것입니다. 모든 그리스도인이 성령의 열매를 맺는 사람이 되어서 이 일을 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그리스도인은 영적이어야 합니다. 우리가 영적인 사람이 되는 것, 올해 교회 표어로 하면 우리가 영과 진리로 예배하는 사람이 되는 것은 나를 살릴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도 살립니다.

그런데 서로 짐을 져서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려고 하지 않고, 자기 기만에 빠진 사람에 대해서 이렇게 경고합니다.
[(3-4) 만일 누가 아무것도 되지 못하고 된 줄로 생각하면 스스로 속임이라 각각 자기의 일을 살피라 그리하면 자랑할 것이 자기에게는 있어도 남에게는 있지 아니하리니]

우리 속담에 ‘빈 수레가 더 요란하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것을 서양 속담에서는 ‘텅 빈 배가 가장 큰 소음을 낸다(Empty vessels make the most noise)’라고 표현합니다.
자신이 가득 채워지지 않은 수레이고, 가득 채워지지 않은 배임에도 ‘가득 찬 수레’, ‘가득 찬 배’라고 생각하는 것은 ‘자기를 속이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자신이 가득 차지 않았음에도 가득 찬 것처럼 행동할 때, 그것이 속이는 것이라는 것을 가장 빨리 그리고 가장 잘 아는 사람은 바로 자기 자신입니다. 그래서 더 과장하고, 더 포장하게 됩니다. 그렇게 나아가면 그 인생은 결국 무너지고 맙니다.
그래서 바울은 자기의 일을 살피라고 합니다. 그리고 자랑은 자기가 자기에게만 하는 것이지, 남에게 하는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꾸준한 선행(6-10절)]
[(6) 가르침을 받는 자는 말씀을 가르치는 자와 모든 좋은 것을 함께 하라]

가르침을 받는 사람은 말씀을 가르치는 사람과 모든 좋은 것을 함께 해야 하는 이유는 가르치는 사람이 전하는 말씀이 가장 좋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가장 좋은 것인 하나님의 말씀을 가운데 두고 가르침을 받는 사람과 가르치는 사람이 좋은 것을 함께 하는 것은 마땅한 일입니다.

[(7-8)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업신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질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

한 농부가 같은 땅에서 농사를 짓는다면 그 수확은 씨앗의 품종, 씨앗의 품질, 씨앗의 양에 따라 달라질 것입니다.
콩을 심으면 콩을 거두고, 팥을 심으면 팥을 추수합니다. 또 사과 씨앗을 심으면 사과를 따고, 감 씨를 심으면 감을 걷습니다. 콩을 심었는데 팥을 거두는 일이 없고, 팥을 심고서는 콩을 추수하려고 하는 것은 바르지 않습니다. 사과 씨앗을 심고서 감을 기다리거나, 감 씨앗을 심고서 사과를 먹으려고 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심은 콩이나 팥이 건강한 것이면 잘 여문 콩과 팥을 거둘 것이고, 부실한 것을 심으면 실하지 못한 결과를 거두게 될 것입니다. 또한 두 마지기의 땅에 심은 곡식은 두 마지기의 양만큼 거둘 것이고, 다섯 마지기의 땅에 심은 것은 다섯 마지기만큼을 거둘 것입니다. 과수원이 100평이면 거기에 해당하는 만큼 거둘 것이고, 10,000평이면 100평의 100배로 거둘 것입니다.
세상의 법칙, 영적인 법칙도 동일합니다. 시험을 앞두고 10시간 공부했을 때와 100시간을 공부했을 때, 100시간 했을 때 좋은 성적을 거두는 것은 하나님의 법칙입니다. 매일의 삶에서 말씀과 기도를 심으면 영적으로 성숙한 그리스도인이 되고, 세상의 것을 심으면 세상의 거두는 것은 하나님께서 정해 주신 것입니다.
특히 7절의 ‘업신여기다’의 문자적인 뜻은 ‘코를 비틀다’입니다. 그래서 심는 대로 거두는 것이 하나님이 법칙인데, 심지 않은 것을 거두려고 하는 것이나, 심은 것과 다른 것을 거두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코를 비트는 것과 같습니다.

[(9)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포기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

무엇을 심든지, 그 심는 것은 우리의 몫인데, 우리가 심어야 할 것을 ‘선(善)’이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거두게 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몫인데, 거두는 것은 아주 분명한데, 무엇을 얼마나 거둘지는 말씀하지 않습니다.
심는 역할도 내가 하려고 하고, 거두는 것도 내가 하려고 하면, 나는 ‘성과주의’나 ‘결과주의’에 빠져서, 하나님의 역할을 도둑질하려고 할 수도 있습니다. 언제나 결과는 하나님께 맡겨야 합니다. 우리가 선을 행하고 낙심하지 않고, 포기하지 않으면 때가 이를 때에, 하나님께서 정하신 시간이 되면, 거두게 된다고 하십니다. 즉 거두지 못하는 것은 없다는 의미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살아계시고, 우리와 함께하시기 때문입니다.

[(10) 그러므로 우리는 기회 있는 대로 모든 이에게 착한 일을 하되 더욱 믿음의 가정들에게 할지니라]

‘믿음의 가정들’은 가족들뿐만 아니라, 교회와 믿음의 공동체를 의미합니다. ‘착한 일(선)’을 믿음의 가정들에게 하라는 것은, 선을 행할 때 그들이 낙심하거나 포기하지 않도록 서로 격려해 주기 때문입니다.

심은 대로 거두는 것은 하나님의 법칙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심은 만큼만 거두게 하시지는 않으십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우리가 심은 만큼만 거두게 하셨다면, 우리는 지금 누리는 것을 결코 누리지 못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30배, 60배, 100배를 거두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은혜롭고 풍성하신 분이십니다.
오늘 하루 우리가 육체를 위한 것만 심다가 우리의 삶을 강도의 소굴로 만들지 않고, 영과 진리로 예배하는 삶을 살아 성령을 위하여 심음으로 우리의 삶을 기도하는 집으로 가꾸어 가는 한 날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기 도]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져야 하는 삶의 짐을 기꺼이 지게 하시고, 다른 사람의 짐도 나누어질 줄 아는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러기 위해서 우리의 영적인 어깨와 허리가 더 강건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또한 심는 대로 거두게 하시는 하나님의 법칙을 어기려고 하는 어리석음을 범치 않게 하시되, 우리가 심은 것의 30배, 60배, 100배를 거두게 하시는 하나님의 풍성함을 맛보게 하여 주시옵소서. 혹 선을 행하다가 낙심될 때도 때가 되면 거두게 하실 하나님을 소망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오늘 하루도 영과 진리로 살아, 우리의 삶을 강도의 소굴이 아니라 기도하는 집으로 가꾸어 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묵상을 돕는 질문]
1. 당신이 져야 하는 짐을 지면서도 다른 사람의 짐을 함께 나누어서 짐으로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게 된 일은 무엇이었습니까? 그때 어떤 유익이 있었습니까?
2. 하나님은 심는 대로 거두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심는 대로 거두게 하시는 하나님을 경험한 일은 무엇이었습니까? 또한 심은 것과 다른 것을 거두려고 했던 적은 없었습니까? 그때 어떤 교훈을 얻었습니까?
3. 선을 행하다가 낙심되는 일이 있어도 포기하지 않으면, 때가 이르면 하나님은 거두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거두게 하시는 하나님의 때를 경험한 일은 무엇이었습니까?
4. 동행하시는 하나님께 영과 진리로 예배하는 삶을 살며, 자신의 삶을 강도의 소굴이 아니라 기도하는 집으로 가꾸어 가기 위해서 무엇을 결단하시겠습니까?


(작성 : 정한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