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2/20(토) “고린도후서 11:1-15” / 작성: 최현준
[본문] 고린도후서 11:1-15
[찬송가] 449장 ‘예수 따라가며’

[어리석은 자의 호소(1-4)]
바울은 마게도냐에서 디도를 만나 고린도교회의 교우들이 거짓 사도들로 인해 혼란을 겪고 있으며 바울의 사도적 권위가 의심받고 있음을 전해 들었습니다. 고린도후서 11장 1-15절은 바울이 자신의 사도적 권위를 변호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진리로 고린도교회를 교훈하여 고린도교회가 예수 그리스도의 신부로서 순결함을 회복할 것을 호소하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1) 원하건대 너희는 나의 좀 어리석은 것을 용납하라 청하건대 나를 용납하라]

바울은 ‘용납하라’는 표현을 거듭 사용하며 자신의 어리석음에 대하여 고린도교회의 교우들에게 양해를 구하였습니다. 바울의 어리석음은 지혜가 부족한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고린도의 교우들에게 ‘자랑’하지 말 것을 교훈했음에도(고전1:29-31; 5:6; 9:16; 10:17; 13:4) 사도적 권위를 변호하기 위해 자신을 어느 정도 드러내야 했던 것을 의미합니다. 바울이 고린도의 교우들에게 ‘자랑’을 금하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 드러낼 것을 요청하였는데 이제 그가 스스로 자랑한다면 고린도의 교우들은 바울이 ‘자기모순(自己矛盾)’에 빠진 것으로 여겨 바울의 말에 귀 기울이지 않을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나의 어리석은 것을 용납하라’며 거듭 호소하였습니다.

[(2-4) 내가 하나님의 열심으로 너희를 위하여 열심을 내노니 내가 너희를 정결한 처녀로 한 남편인 그리스도께 드리려고 중매함이로다 그러나 나는 뱀이 그 간계로 하와를 미혹한 것 같이 너희 마음이 그리스도를 향하는 진실함과 깨끗함에서 떠나 부패할까 두려워하노라 만일 누가 가서 우리가 전파하지 아니한 다른 예수를 전파하거나 혹은 너희가 받지 아니한 다른 영을 받게 하거나 혹은 너희가 받지 아니한 다른 복음을 받게 할 때에는 너희가 잘 용납하는구나]

바울은 자신을 드러내는 태도가 오해를 불러올 수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렇게 했던 것은 고린도교회에 들어온 거짓 사도들이 바울의 사도적 권위를 공격할 뿐 아니라 바울이 전한 복음까지 훼손하였기 때문이었습니다.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고린도교회를 사랑했기에 거짓 사도들로 인해 위기에 처한 고린도교회를 구하고자 고육지책(苦肉之策)으로 자신을 드러내게 된 것입니다. ‘열심’이라고 번역된 단어는(ζηλόω) ‘시기’ 또는 ‘질투’의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칠십인역(LXX)은 여호수아 24장 19절을 헬라어로 번역하며 ‘하나님은 거룩하신 하나님이시요 질투하시는(ζηλόω) 하나님이시니’에서 ‘질투’라는 의미로 사용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질투하시는 하나님’이라고 자기 속성을 표현하신 것은 이스라엘의 우상숭배가 옳고 그름의 차원이 아니라 하나님을 사랑하거나 다른 신을 사랑하는 문제임을 경고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즉, 바울이 표현한 ‘하나님의 열심’이란 단순히 무언가를 온 정성을 다해 섬기는 태도가 아니라 고린도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임을 알 수 있습니다.
바울은 고린도교회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신랑되신 예수 그리스도께 중매하려고 했습니다. ‘중매하다’로 번역된 단어는(ἁρμόζω) ‘결합시키다’, ‘함께 맞추다’라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바울은 다른 서신에서도 그리스도와 교회를 신랑과 신부의 관계로 비유하여 설명하였습니다(롬7:2; 엡5:23-25). 주님께서 우리를 통해 되찾기 원하시는 사람들은 주님의 잃어버린 아들이며 딸이고 주님의 신부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잃어버린 자녀를 간절히 되찾고자 하는 부모의 심정으로 복음을 전하고 잃어버린 신부를 되찾고자 하는 신랑의 마음으로 열심을 냈던 것입니다. 일반적인 중매가 처녀와 총각을 만나게 하는 것인데 반해 바울은 고린도교회를 ‘정결한 처녀로 한 남편인 그리스도께 드리려고 중매’한다고 표현하였습니다(2절). 부부는 언약에 근거한 사랑으로 연합되어 한 몸을 이루며 그것은 한순간의 뜨거운 감정이나 상황에 따라 변화하는 감정 이상의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언약에 근거한 사랑으로 고린도교회를 신실하게 사랑하셨고 바울은 그 사랑에 근거하여 고린도교회에 호소하고 있습니다.

에덴에서 뱀이 하와를 미혹했던 것 같이 고린도의 거짓 사도들이 고린도교회를 진리에서 떠나도록 유혹하였고 바울은 마지막 아담으로 오신 그리스도께서(고전15:45) 신부인 고린도교회를 잃어버리지 않도록 고린도교회에 경각심을 일깨워 주었습니다. ‘만일 누가 가서’라는 표현은 거짓 사도들의 본질을 나타냅니다. ‘만일 누가 가서’로 번역된 헬라어를 직역하면 ‘가는 그 사람’ 또는 ‘오는 그 사람’입니다. 반면 사도로 번역되는 헬라어 아포스톨로스(ἀπόστολος)는 ‘보냄을 받은 자’라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즉, 거짓 사도들은 하나님으로부터 보냄을 받지 않고 스스로 사도라 칭하며 고린도교회에 접근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거짓 사도들은 고린도교회에 다른 예수를 소개했고 성령이 아닌 다른 영을 받게 하였고 다른 복음을 전파하였습니다. 메시지를 공격하거나 비판하기 힘들 때 메시지를 비판하는 것보다 메신저를 공격하는 일은 흔히 있는 일이었으며, 거짓 사도들은 바울의 사도적 권위를 공격하여 바울이 전한 복음까지 훼손하려 하였습니다. 이에 바울은 복음이 오해받지 않도록 자신을 변호하게 되었습니다.

[너희를 높이려고 나를 낮추어(5-11)]
[(5-6) 나는 지극히 크다는 사도들보다 부족한 것이 조금도 없는 줄로 생각하노라 내가 비록 말에는 부족하나 지식에는 그렇지 아니하니 이것을 우리가 모든 사람 가운데서 모든 일로 너희에게 나타내었노라]

로마 교육의 최종적 목표는 유능한 정치가와 행정가를 양성하는 것이었기에 대중 연설을 위한 ‘수사학(Rhetoric)’을 중점적으로 다루는 수사학교가 로마 전역에 설립되었고 수사학은 고위 공무원이나 군대의 장교, 상류계급의 일원이 되는 중요한 수단이 되었습니다. 거짓 사도들은 화려한 언변과 매력적인 대중 연설로 고린도의 그리스도인들을 사로잡았고 이와 같은 사회 분위기 속에서 거짓 사도들은 바울의 부족한 수사학을 근거로 그의 전문성과 사도적 권위를 공격하였던 것입니다. 바울은 ‘내가 비록 말에는 부족하나’라고 인정하였지만 ‘지식에는 그렇지 않다’고 호소하였습니다. 마치 에덴에서 뱀이 달콤한 말로 하와를 꾀어내었던 것처럼 거짓 사도들은 화려한 언변으로 고린도교회에 ‘다른 예수’를 전파하였고 매력적인 웅변술로 ‘다른 영’을 받게 하였습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않고 오직 능력에 있으며(고전4:20), 복음을 전하는 것은 설득력 있는 지혜의 말이 아니라 성령의 나타나심과 능력에 있음을(고전2:4) 교훈하며 고린도교회가 거짓 사도들로 인해 구원에 이르는 지식을 잃어버리지 않도록 호소하였습니다. 온라인 예배가 익숙해지면서 소속된 지역 교회의 예배와 설교 뿐 아니라 인터넷을 통해 다양한 교회의 예배와 설교를 접하는 일상이 가속화 되고 있습니다. 지역 교회에 소속되어 예배를 드리고 설교를 듣던 전통적인 방식의 변화는 변하지 않는 신앙생활의 본질까지도 혼란스럽게 만들고 있습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예배와 설교를 취사선택하는 방식으로 드리고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자신의 귀에 즐거운 설교를 찾고 자신의 기호에 부합하는 예배를 찾는 과정에서 좋은 설교, 좋은 예배의 기준이 자신이 될 수 있음을 경계해야 합니다. 설교와 예배가 성경적이고 예수 그리스도 중심적인지 질문하고, 무엇이 진리를 따라 행하는 것인지 우리 안에 분명한 기준을 가지고 있어야 흔들림 없이 신앙생활 할 수 있습니다.

[(7) 내가 너희를 높이려고 나를 낮추어 하나님의 복음을 값없이 너희에게 전함으로 죄를 지었느냐]

거짓 사도들은 바울의 부족한 수사학을 근거로 바울의 사도적 권위를 공격한데 이어 바울이 고린도교회로부터 경제적 지원을 받지 않은 것을 문제 삼아 바울의 사도적 권위를 공격하였습니다. 그리스-로마 시대에 철학자나 대중 연설가에게 경제적인 후원자가 없었다는 것은 전문성이 결여된 아마추어이거나 실력이 없는 사람으로 여겨졌습니다. 거짓 사도들은 바울이 고린도교회에 복음을 전하고 가르쳤음에도 경제적인 보조를 받지 않은 것은 그가 경제적인 후원을 받을만한 자격이 없기 때문이라고 모함했습니다. 바울은 고린도교회를 향한 앞선 서신에서 자신이 경제적인 보조를 받지 않는 이유에 대해 설명한 바 있습니다(고전9:4-18). 바울은 복음의 속성 중에 값없이 주어진 은혜의 차원에 근거하여 복음을 전하는 자신도 보상받을 권리를 기꺼이 내려놓았던 것처럼 위로부터 아래로 임하는 복음의 속성에 근거하여 복음을 받는 고린도의 그리스도인들을 높이고자 자신을 낮추는 차원에서 보수를 받지 않았노라고 고백합니다.
복음이 위에서부터 아래로(Upside-Down) 임하여 이 땅에 소망을 두고 살았던 우리의 삶을 하늘까지 높아지게 한 것처럼 바울은 자신을 낮추어 고린도교회를 높이고자 하였습니다. 주님께서 가난하게 되심으로 우리를 부요하게 하려 했던 것처럼(고후8:9) 예수님을 믿고 부자가 되고 출세(出世)하여 세상을 이롭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주님과 동행하며 자신을 낮추고 자기희생적 사랑으로 이 땅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회복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마땅한 생활 방식입니다.

[(8-11) 내가 너희를 섬기기 위하여 다른 여러 교회에서 비용을 받은 것은 탈취한 것이라 또 내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 비용이 부족하였으되 아무에게도 누를 끼치지 아니하였음은 마게도냐에서 온 형제들이 나의 부족한 것을 보충하였음이라 내가 모든 일에 너희에게 폐를 끼치지 않기 위하여 스스로 조심하였고 또 조심하리라 그리스도의 진리가 내 속에 있으니 아가야 지방에서 나의 이 자랑이 막히지 아니하리라 어떠한 까닭이냐 내가 너희를 사랑하지 아니함이냐 하나님이 아시느니라]

바울은 교회의 경제적인 보조를 전혀 받지 않고 언제나 자비량으로 사역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내가 너희를 섬기기 위하여 다른 여러 교회에서 비용을 받은 것은 탈취한 것이라.’는 표현에서 ‘탈취하다’라고 번역된 헬라어는 전쟁 중에 전사한 적들의 갑옷을 벗겨 취하는 행위에서 나온 것으로 ‘전리품을 취하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바울이 다소 과격해 보이는 표현을 사용한 것은 그가 먹고사는 것에 여유가 있어서 경제적인 후원을 받지 않았던 것이 아니라 전쟁터와 같은 치열한 삶의 현장에서 기꺼이 자신의 물질을 후원하는 다른 교회들의 헌신이 있었기에 고린도교회로부터는 경제적인 후원을 받지 않아도 되는 상황이었음을 강조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와 같은 바울의 상황을 두고 거짓 사도들은 바울이 고린도교회를 사랑하지 않기 때문에 의지하지 않는 것이 아니냐며 트집을 잡았습니다.

[(새번역11)내가 왜 이렇게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내가 여러분을 사랑하지 않기 때문입니까? 내가 여러분을 사랑한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알고 계십니다.]

이에 바울은 고린도교회를 사랑하지 않기 때문에 의지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고린도교회를 오히려 사랑하기 때문에 경제적 부담을 주지 않고자 조심하고 또 조심한 것이었음을 설명했습니다. 로마 문화에서 누군가로부터 가르침을 받은 사람은 존경하는 마음을 담아 선물과 호의 등을 베푸는 관습이 있었는데 바울이 고린도교회의 경제적인 후원을 거절한 것은 당시의 문화적 배경에서 단순히 돈을 거절한 것이 아니라 사랑하는 마음을 거절한 것으로 오해를 받았던 것입니다. 이에 바울은 자신이 고린도교회를 사랑한다는 사실에 하나님께서 증인 되신다고 강력하게 호소하였습니다. 로마시대로부터 오늘날까지 대인관계에서 돈이라는 매개는 마음을 표현하는 선한 영향력의 통로가 되기도 하지만 서로에 대한 강력한 구속력을 발휘하는 것이 사실입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은 사랑을 움직이기도 하고 사랑을 변화하게도 합니다. ‘어떻게 사랑이 변할 수 있습니까?’라는 질문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치기 어린 것으로 취급받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고린도교회를 사랑하기 때문에 기꺼이 경제적으로 헌신할 수 있었고 주님의 사랑을 동력 삼아 힘있게 사역을 감당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경제적인 보상이나 이익이 없으면 좀처럼 행동하지 않는 자본주의 사회를 살아가지만, 시대와 상황을 초월하여 그리스도인의 삶의 동기는 언제나 주님을 사모하는 마음이며 성령님께서 우리 안에 그리스도의 사랑을 부어주심으로 날마다 새것처럼 생기 넘치는 주님의 사랑을 동력삼아 이웃을 섬기고 맡겨주신 사명에 충성할 수 있습니다.

[그 행위대로 되리라(12-15)]
[(12-15) 나는 내가 해 온 그대로 앞으로도 하리니 기회를 찾는 자들이 그 자랑하는 일로 우리와 같이 인정 받으려는 그 기회를 끊으려 함이라 그런 사람들은 거짓 사도요 속이는 일꾼이니 자기를 그리스도의 사도로 가장하는 자들이니라 이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니라 사탄도 자기를 광명의 천사로 가장하나니 그러므로 사탄의 일꾼들도 자기를 의의 일꾼으로 가장하는 것이 또한 대단한 일이 아니니라 그들의 마지막은 그 행위대로 되리라]

‘기회’로 번역된 헬라어는 로마 시대에 군사용어로 사용되었으며 ‘전쟁을 수행하기 위한 전진 기지’를 의미했습니다. 바울은 거짓 사도들과의 영적 전투를 수행하며 고린도교회의 호감을 얻고자 웅변술을 연마하거나 고린도교회로부터 얼마의 후원금을 받아 돈으로 얽힌 연대감에서 안정을 추구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는 자신의 사역 원칙을 고수하여 정공법으로 대응함으로써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는 것이 아니라 능력에 있음을 선포하였습니다. 바울은 고린도교회에 접근한 거짓 사도들을 광명의 천사로 위장한 사탄의 일꾼들이라고 했습니다. 거짓 사도들의 욕망과 세속적 가치관의 아우성에는 진리의 삶이 없었고 그들의 가르침은 듣기에 좋은 말일 뿐 생명의 능력이 없었습니다. 바울은 화려한 웅변술이 아니라 진리를 따라 살려는 삶으로 설교했고 말씀에 합당한 삶의 모범을 통해 진리를 전달하였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이 땅의 환호와 인기를 척도로 삶을 평가받지 않습니다. 내가 하는 일에 돈이 따라오고 후원하려는 사람들이 늘어난다고 해서 바른길을 가고 있다고 착각하지 않습니다. 때로는 주변에서 오해를 받고 가는 길이 험하게 느껴지더라도 길이요 진리요 생명 되신 주님과 동행하고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거짓 선지자들의 마지막은 그 행위대로 될 것이라는 경고의 말씀이 진리를 따라 사는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오히려 장래의 은혜가 있음을 소망하고 확신하게 합니다. 영과 진리로 예배하며 주님을 목적 삼아 살아가는 우리의 삶이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시는 ‘할렐루야’ 찬양의 삶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세상을 사랑하여 세상을 쫓아 살던 우리를 주님의 신부로 불러 주시고 사랑해주시니 감사드립니다. 세상의 인정과 경제적 보상을 염려하며 살던 우리를 용서하시며 긍휼히 여겨 주시고 주님 한 분만으로 만족하는 인생이 되게하사 믿음으로 담대하게 살아갈 수 있도록 인도해 주시옵소서. 주의 말씀으로 마음과 생각을 지켜 거짓과 속임수가 가득한 세상에서 늘 깨어있게 하시고 세상의 아우성에도 진리 안에서 흔들림 없는 삶으로 세상에 생명의 울림이 되는 삶이 되게 해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묵상을 돕는 질문]
1. 거짓 사도들이 바울의 사도성을 공격한 내용은 무엇이었으며 바울은 거짓 사도들의 공격에 어떻게 대처하였습니까?
2. 거짓에 대한 바울의 대응을 교우님의 삶에 어떻게 적용하시겠습니까?
3. 고린도교회를 그리스도의 신부로 비유하여 교훈하고자 했던 것은 무엇입니까?
4. ‘한 남편인 그리스도’의 신부로 살아가는 삶을 위해 무엇을 결단하시겠습니까?
5. 말이 아닌 삶으로 진리를 증거하며 영과 진리로 예배하는 삶을 위해 무엇을 결단하시겠습니까?


(작성: 최현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