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2/18(목) “고린도후서 9:1-15” / 작성: 최형철
[본문] 고린도후서 9:1-15
[찬송가] 211장 ‘값비싼 향유를 주께 드린’

사도 바울은 8장에 이어서 9장에서도 계속해서 고린도교회의 성도들에게 연보에 대해 권면합니다.

[준비하게 하려 함이라(1-5절)]
[(1-2) 성도를 섬기는 일에 대하여는 내가 너희에게 쓸 필요가 없나니 이는 내가 너희의 원함을 앎이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마게도냐인들에게 아가야에서는 일 년 전부터 준비하였다는 것을 자랑하였는데 과연 너희의 열심이 퍽 많은 사람들을 분발하게 하였느니라]

   바울은 연보를 '성도를 섬기는 일'이라 지칭합니다. 예루살렘에 큰 기근이 들어 그곳에 사는 성도들이 극심한 어려움에 직면하게 되었는데 이러한 어려움을 공동으로 대처하기 위해 아시아에 흩어져 있는 교회들이 구제 하게 된 것입니다. 이처럼 형제의 아픔에 동참하여 그 아픔을 나눌 뿐 아니라 그에게 필요한 물질과 사랑을 공급하는 것이야말로 '성도를 섬기는 일'입니다.
   고린도교회의 성도들은 이 일에 동참하기를 자발적으로 원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앞선 고린도전서를 통해 매주 첫날인 주일에 각 사람이 수입에 따라 미리 모아 둘 것(고전 16:2)을 권면했습니다. 고린도교회의 성도들이 1년 전부터 미리 구제금을 준비했다는 것은 많은 사람에게 감동을 주는 사건이었습니다. 특히 마게도냐 지역에 사는 성도들에게는 선한 일에 더욱 분발하게 하는 촉매제의 역할을 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도 교회 안에 귀한 믿음의 동역자를 만나, 그분이 하시는 선한 일에 대해서 듣게 되었을 때, 그 선한 일에 동참하고 싶은 마음이 생기지 않습니까? 이처럼 선한 일에는 선한 영향력이 따르게 됩니다.

[(3-4) 그런데 이 형제들을 보낸 것은 이 일에 너희를 위한 우리의 자랑이 헛되지 않고 내가 말한 것 같이 준비하게 하려 함이라 혹 마게도냐인들이 나와 함께 가서 너희가 준비하지 아니한 것을 보면 너희는 고사하고 우리가 이 믿던 것에 부끄러움을 당할까 두려워하노라]

   바울은 앞서 8장에서 고린도교회에 보낸 디도와 두 형제를 소개했습니다. 바울이 이들을 앞서 고린도교회에 보낸 이유는 바울을 비롯한 사도의 자랑이 헛되지 않도록 할 뿐 아니라, 구제금을 미리 준비시키기 위함이었습니다. 이를 통해 우리는 당시 고린도 교회의 모금 상황이 그렇게 순조롭지 못하였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선한 결단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을 그것을 이루어내는 것입니다. 바울은 자신이 다른 여러 교회들에게 자랑했던 고린도교회의 열심이 사실대로 이루어지기를 바랐으며, 자신의 말에 증거가 있기를 바랐습니다. 더욱, 바울은 구제금을 전해 받을 마게도냐인들이 자기와 함께 고린도교회를 방문했을 때 아직 구제금이 마련되지 않았다면 심히 큰 부끄러움을 당하게 될 것을 염려했습니다. 즉, 바울은 고린도교회 성도들의 체면과 자존심까지도 생각해 주는 배려를 잊지 않았던 것입니다.
   선행을 베푸는 데는 분명한 때와 기회가 있습니다. 기회가 지나가 버리면 그 대상자들은 극심한 고통에 허덕이게 되거나 아니면 우리보다 앞서 다른 이웃이 그들에게 도움을 주게 될 것입니다.

[(5) 그러므로 내가 이 형제들로 먼저 너희에게 가서 너희가 전에 약속한 연보를 미리 준비하게 하도록 권면하는 것이 필요한 줄 생각하였노니 이렇게 준비하여야 참 연보답고 억지가 아니니라]

   참 연보는 절대 의무적이어서는 안됩니다. 의무적이거나 책임적인 구제는 주는 자와 받는 자 모두에게 은혜롭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더 나아가 자기 만족적인 것이 되어서도 안됩니다. 자기만족을 위한 구제는 가난한 자를 위한 구제가 아니라 곧 자신을 위한 이기적인 것일 뿐입니다. 참 연보는 그 동기가 사랑에서 비롯되어야 합니다. 5절에서 '연보'라고 번역한 헬라어 '율로기아'는 '복'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으며, '억지'라고 번역한 헬라어의 '플레오넥시아'는 '탐심'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진정한 구제는 탐심에서 비롯된 억지로 드리는 물질이 아니라 받은 은혜와 사랑을 나누며, 상대방을 위한 동기에서 비롯되어야 합니다.

[넘치게 하심이라(6-11절)]
[(6-7) 이것이 곧 적게 심는 자는 적게 거두고 많이 심는 자는 많이 거둔다 하는 말이로다 각각 그 마음에 정한 대로 할 것이요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즐겨 내는 자를 사랑하시느니라]

   바울은 파종과 수확의 이미지를 통해 구제가 주는 풍성함을 증거합니다. 여기서 대조되는 '적게'와 '많이'를 원어의 의미를 살리면 '인색하게'와 '풍성하게'로 대치할 수 있습니다. 즉 구제란 인색하게 하면 인색하게 거두고, 풍성하게 하면 풍성하게 거두는 복의 원리를 담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구제 하는 고린도교회의 성도들에게 바울은 결코 인색함이나 억지로 하는 것이 아니라 즐겁고 기쁜 마음으로 참여할 것을 권면합니다. 무엇보다 바울은 구제금을 자신의 능력 한도 내에서 해야 하며, 작정한 것은 지체하지 말고 실행해야 함을 강조합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결심이란 쉽게 변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즐겨 내는 자를 사랑하신다'라는 이 문장만 떼어내서 보면 마치 구제금을 많이 하는 사람을 하나님께서 사랑하신다고 오해할 수 있으나, 문맥 속에서 우리가 분명히 확인할 수 있듯이 하나님께서 공급해주신 물질을 자원하고 기쁜 마음으로 어려운 지체를 위해 나누어주는 사랑의 태도를 하나님께서 사랑하십니다.

[(8-9) 하나님이 능히 모든 은혜를 너희에게 넘치게 하시나니 이는 너희로 모든 일에 항상 모든 것이 넉넉하여 모든 착한 일을 넘치게 하게 하려 하심이라 기록된 바 그가 흩어 가난한 자들에게 주었으니 그의 의가 영원토록 있느니라 함과 같으니라]

   사도 바울은 구제하는 자에게 임하는 복에 대해서 증거합니다. 그것은 모든 것에 넉넉하여 착한 일을 넘치게 할 수 있도록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이러한 사실은 곧 관대한 마음이 있는 곳에는 그 마음이 표현될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준비해 주신다는 의미를 가집니다. 또한, 기쁨으로 구제하는 자는 곧 하나님의 도구로 사용된다는 의미도 담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마땅히 우리 자신에게 부여된 은혜를 다른 사람의 유익을 위해 사용해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 넘치게 쓰임 받는 것 그 자체가 은혜임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바울은 시편 112편 9절의 말씀을 인용하여 즐거운 마음으로 다른 사람을 도운 사람의 의는 영원토록 남아 있음을 증거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재물을 이기적인 측면에서만 사용하지 않고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주는 자의 선한 행실을 영원토록 기억하시고, 그 모든 행위를 의로 여기시기 때문입니다.

[(10-11) 심는 자에게 씨와 먹을 양식을 주시는 이가 너희 심을 것을 주사 풍성하게 하시고 너희 의의 열매를 더하게 하시리니 너희가 모든 일에 넉넉하여 너그럽게 연보를 함은 그들이 우리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게 하는 것이라]

바울은 다시 한번 고린도교회의 성도들에게 풍요로움을 허락하신 분이 하나님이심을 증거합니다. 농부에게 씨와 먹을 양식을 주시는 분도 하나님이시요, 농부가 그 씨를 심어 풍성한 열매를 맺을 수 있는 것도 하나님으로부터 가능한 일입니다. 그렇기에 지금 허락된 물질과 풍요로움이 하나님으로부터 왔음을 우리는 늘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고린도교회의 성도들에게 물질의 풍요로움을 주신 이유는 구제를 통해 의의 열매를 더욱 풍성하게 맺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구제를 하는 자들에게 의의 열매를 맺을 뿐만 아니라 받는 자들에게도 감사의 열매를 맺게 합니다. 구제는 베푸는 손길 위에도, 도움을 받는 손길 위에도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는 통로가 됩니다.

[이 직무로 증거를 삼아(12-15절)]
[(12-14) 이 봉사의 직무가 성도들의 부족한 것을 보충할 뿐 아니라 사람들이 하나님께 드리는 많은 감사로 말미암아 넘쳤느니라 이 직무로 증거를 삼아 너희가 그리스도의 복음을 진실히 믿고 복종하는 것과 그들과 모든 사람을 섬기는 너희의 후한 연보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또 그들이 너희를 위하여 간구하며 하나님이 너희에게 주신 지극한 은혜로 말미암아 너희를 사모하느니라]

   봉사의 직무 중 가장 구체적으로 드러나는 것은 성도들의 물질적인 부족을 구제하는 일입니다. 여기서 바울이 사용한 '봉사'란 고대 아덴의 부요한 시민들에 의해 자진해서 행해진 공공봉사를 가리키는 헬라어 '레이투르기아'입니다. 이 단어가 유대인들에게는 종교적인 봉사의 의미로 사용되었습니다. 실제로 초대교회에 있어서 봉사의 직무를 감당하는 집사를 선출하는 가장 큰 목적은 구제를 위한 직무를 전담할 사람이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구제하는 봉사의 직무가 베푸는 자에게는 복음을 진실히 믿고 복종하는 증거가 되며, 받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채워주심으로 인한 감사와 영광을 돌리는 은혜의 통로가 됩니다. 무엇보다 이 구제를 통해 이방인 교회와 유대인 교회 사이의 형제애를 느낄 수 있는 기회가 되어, 모두가 하나님의 자녀이며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한 형제임을 확인하게 될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구제라는 은혜의 직무를 통해 감사와 영광을 받으시고, 부족함을 채워주시며, 교회를 하나 되게 하십니다.

[(15) 말할 수 없는 그의 은사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노라]

   바울은 하나님께 감사함으로 고린도교회 성도들을 향한 연보에 대한 권면을 마칩니다. 여기서 '은사'는 헬라어 '도레아'로 하나님께서 주시는 '선물'을 뜻합니다. 고린도교회로 하여금 구제하는 일에 적극 참여하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은사라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선을 행할 마음이 있다면 그것은 우리에게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신 은사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더 나아가 선한 일을 시작하게 하실 뿐만 아니라 온전히 마치게 하시는 분도 하나님이시기에 우리는 주어진 풍성한 은사를 자원함으로 참여하여 하나님의 은혜에 동참하는 자로 살아가야 합니다.

   우리가 그동안 하나님 앞에 더 많은 것을 움켜지기 위해 아우성을 쳤다면, 우리의 탐심을 내려놓고 세미한 음성을 통해 말씀하시는 주님의 말씀에 귀 기울이며 살아가십시다. 영과 진리로 주님과 주님의 말씀을 목적 삼음으로, 받은 은혜를 나누고 섬기는 주님의 선한 일에 동참함으로 진리의 생명의 통로가 되는 우리 모두 되기를 소망합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우리에게 주어진 물질이 모두 주께로부터 왔음을 입술로만 고백하는 것이 아니라 구제함으로 고백하는 삶을 살아가게 하옵소서. 움켜지기 위해 동분서주하며 아우성이었던 이전의 삶을 돌이키며, 주님의 말씀에 귀 기울여 순종함으로 나누기를 기뻐하는 삶을 살아가게 하옵소서. 우리는 고린도교회의 성도들처럼 선한 일에 동참하기로 결심은 하지만 그것을 온전히 이룰 능력이 없음을 고백하오니, 사도 바울을 통해 말씀으로 고린도교회 성도들을 일깨워주신 것처럼, 우리도 말씀으로 선한 일에 더욱 분발할 수 있도록 날마다 우리를 일깨워주옵소서. 그래서 선한 일을 시작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실 뿐만 아니라 이루시는 분도 하나님이심을 고백하며 감사하는 삶을 살아가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묵상을 위한 질문]
1. 바울이 말한 ‘성도를 섬기는 일’은 무엇입니까? 그리고 나는 어떻게 성도를 섬기고 있습니까?
2. 바울은 왜 디도와 두 형제를 고린도에 먼저 보냈습니까? 더욱이 ‘참 연보’란 무엇입니까?
3. ‘하나님은 즐겨 내는 자를 사랑하시느니라’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4. 선한 일을 시작하게 하시고 마치게 하시는 주님을 바라보며 실천해야 할 선한 행실이 무엇인지 묵상하고 결단해 보세요.

(작성: 최형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