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12/12(토) “로마서 12:1-8” / 작성: 이창호E
[본문] 로마서 12장 1-8절
[찬송가] 312장 ‘너 하나님께 이끌리어’

16장으로 구성된 로마서는 크게 1장-11장과 12장-16장,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1장에서 11장은 교리적 또는 신학적 부분이며, 12장에서 16장은 실천적 또는 윤리적 부분입니다. 즉 1장-11장까지는 [‘우리가 무엇을 믿는가?’]를 신학적으로 설명했고, 12장-16장은 [‘믿는 사람은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인가?’]를 실천적 차원에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를 신학적 용어로 설명하면 1-11장은 [‘칭의(justification)’]에 대한 내용이며, 12-16장은 [‘성화(sanctification)’]에 대한 내용입니다.

칭의(稱義), 즉 이신칭의(以信稱義, justification by faith)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을 하나님께서 더 이상 죄인으로 여기지 않고 의인으로 간주해 주신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하면 내가 구원을 받을 만한 자격이 있거나 구원받을 능력이 있어서가 아니라, 죄인인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일방적인 사랑과 신비한 구원의 능력이 나를 살려주시고 의롭다고 여겨주셨다는 의미입니다. 이 구원의 진리를 신학적으로 설명해나가던 바울은 인간이 더 이상 이해할 수도 설명할 수도 없는 그 신비의 무한히 깊음을 깨달았습니다. 그는 신묘막측(神妙莫測, 하나님은 신비하고 오묘하심은 측량할 길이 없다)하신 하나님은 지적 탐구의 대상이 아니라 경배와 찬양의 대상임을 깨닫고, 바로 앞장에서 로마서의 신학적, 교리적 부분의 끝을 다음과 같이 맺었습니다.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풍성함이여, 그의 판단은 헤아리지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았느냐 누가 그의 모사가 되었느냐 누가 주께 먼저 드려서 갚으심을 받겠느냐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그에게 영광이 세세에 있을지어다 아멘’ (롬 11:33-36)]

주일설교를 통해 살펴보았던 삭개오는 같은 민족에게 매국노라고 비난받는 세리였습니다. 그럼에도 예수님께서는 그의 집에 들어가 구원의 은총을 베풀어주셨습니다. 그러자 그는 삶의 목적이었던 모든 물질을 내려놓겠다고, 즉 주님을 목적 삼는 삶을 살겠다고 고백했습니다. 무엇이 그의 삶을 180도 변화시켰습니까! 바로 주님의 한량없이 깊은 은혜와 사랑입니다. 자신을 향하신 신묘막측하신 주님의 사랑을 깨달았기에 그는 불의하게 모은 재물을 기꺼이 내려놓겠다고 선포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오늘 본문인 12장은 로마서 1-11장까지 나타난 하나님의 신비하신 사랑을 깨달은 사람은 어떤 삶을 살아야 할지, 즉 ‘성화’에 대해 설명합니다. 따라서 오늘 본문이 ‘그러므로‘라는 접속사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1)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바울은 로마 교인들을 향해 친근하게 [‘형제들아’] 부릅니다. 그는 사도의 권위로 로마 교인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라 형제의 자격으로 다가갔습니다. 로마 교인들에게 형제의 자격으로 친근하게 다가간 바울은 그들에게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권하고 있습니다. 인간의 자비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비하심은 어떻습니까? 만약 하나님의 자비하심에 한계가 있다면 오늘의 나는 존재할 수 있었을까요? 하나님께서 택하신 이스라엘의 역사를 살펴볼 때,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끊임없이 배반했습니다. 하다하다 그들은 하나님의 독생자이신 예수님까지도 모욕하며 십자가에 매달지 않았습니까! 그럼에도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내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은 오래 참으심, 인내하심입니다.
또한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은 모든 사람을 구원에 이르게 하시는 자비하심입니다. 율법의 행위로는 결코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하심을 얻을 수 없는 자들에게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의롭다하심을 얻게 하기로 하신 자비하심입니다. 이를 위해 하나님께서는 독생자 예수님을 십자가에서 죽게 하셨습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께서는 어리석은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독생자를 죽이시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이같은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바탕으로 바울은 로마교인들에게 권하고 있습니다. 주님을 믿는 공동체라면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을 바탕으로 서로를 권해야 합니다. 그런데 여기에는 조건이 있습니다. 주님 안에서 형제, 자매로 서로가 대등한 관계이어야 합니다.

주님 안에서 우리 모두는 형제, 자매입니다. 침례교에는 직분이 목사와 집사만 있습니다. 물론 다른 교단과의 교류를 위해 호칭 장로제를 사용하는 침례교회도 있습니다. 그래서 대부분의 침례교회에서는 서로 형제, 자매라고 호칭합니다. 저보다 연장자에게 형제님, 자매님이라고 부르는게 처음에는 많이 어색했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고 보니 이 호칭을 통해 나이와 신분을 뛰어넘어 대등한 관계가 형성되는 것을 보았습니다. 나이에 관계없이 존대 말을 사용하는 부부가 있습니다. 서로 존대하는 부부가 부부싸움이 많겠습니까? 서로 반말하는 부부가 부부싸움을 많이 하겠습니까? 부부간에 존대하면 서로를 존중하는 대등한 관계가 형성됩니다. 주님의 신묘막측한 은혜를 입은 믿음의 공동체는 사회적 신분이나 연령차이나 남녀노소에 관계없이 서로를 존중하는 대등한 관계에서 주님의 자비하심으로 서로를 권해야 합니다. 서로를 존중하는 대등한 관계에서 주님의 자비하심으로 상대방의 잘못을 꾸짖기보다는 그가 바로 설 수 있을 때까지 주님의 사랑으로 품고 말씀으로 격려해서 바른 삶으로 이끌어가야 합니다.

바울은 주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로마 교인들에게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고 권했습니다. 당시 이스라엘은 하나님께 제사를 지냈습니다. 제사에는 당연히 동물이나 곡물과 같은 제물이 있어야 했습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에 바치는 제물은 당연히 정결하고 흠이 없어야 했습니다. 바울은 우리 몸을 제물로 드리라고 합니다. 우리의 몸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거룩한 제물이 되기 위해서는 우리 몸은 정결하고 흠이 없어야 합니다. 몸이 정결하고 흠이 없어야 한다는 의미는 내 뜻이나 내 주장이나 내 의지를 모두 비운 상태를 의미합니다. 삶속에서 부족함을 채우기 위해 예배를 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제사에 바쳐진 동물이 모두 죽었듯이, 예배는 나를 죽이는 시간입니다. 예배를 통해 내가 죽어야 합니다. 말씀 안에서 내가 온전히 죽어야만 말씀 안에서 우리는 살 수 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우리 [‘몸을 산 제물로 드리라’]고 권합니다. 우리 몸을 산 제물로 드리라는 의미는 우리의 삶 자체가 하나님께 드려지는 산 제물이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즉 바울은 우리의 삶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거룩한 제물이 되고 제사가 되어야 한다고 권하고 있습니다.

코로나19를 통해 ‘대면 예배’, ‘비대면 예배’라는 새로운 용어가 생겼습니다. 이 사태가 있기 전까지 온라인으로 드리는 예배에 대해 부정적인 인식이 많았습니다. 온라인으로 드리는 예배는 온전한 예배가 아니고, 예배당에 함께 모여 드리는 예배만이 진정한 예배라고 여겼습니다. 물론 온라인상으로 드리는 예배는 예배당에 나와서 드리는 예배에 비하면 복장, 태도 등 여러 가지 면에서 취약점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온라인 예배는 온전한 예배가 아니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저는 스위스 제네바한인교회에서 믿음생활을 처음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제네바한인교회에 목회자가 없을 때가 있었습니다. 그때 교인들은 우리나라에서 공수해 온 주일설교 오디오 테이프를 틀어놓고 예배를 드렸습니다. 주일예배 영상을 담은 비디오 테이프를 틀어놓고 TV 앞에 모여서 예배를 드린 경우도 있습니다. 오디오 테이프를 통해 들리는 말씀을 통해 얼마나 은혜를 받았는지 모릅니다. 그러다가 비디오 테이프를 통해 영상으로 예배를 드리면서 얼마나 감사했는지 모릅니다. 대면 예배냐 비대면 예배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예배에 임하는 우리의 자세가 중요합니다. 성경도 마찬가지입니다. 종이로 인쇄된 성경책도 성경이고, 스마트 폰이나 스마트 패드의 성경 어플에 있는 성경도 성경입니다. 비대면 예배가 장기화 되면서 예배에 임하는 우리의 태도가 나태해질 우려도 분명히 있습니다. 그러나 대면 예배를 드리면서도 다른 생각을 하거나 꾸벅 꾸벅 조는 교인들이 있는 것처럼, 비대면 예배를 드린다고 나태해지는 분들도 있지만, 모두가 다 나태해질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우리 교회의 모토(Motto)는 [‘예배의 생활화, 생활의 예배화’]입니다. 저는 모두가 위기라고 생각하는 이 시기야 말로 비대면 예배를 통해 우리의 가정이 예배당이 되고, 나아가 우리의 삶의 현장이 예배당이 되어서, ‘예배의 생활화, 생활의 예배화’를 우리의 삶속에서 구현시킬 수 있도록 주님께서 허락하신 큰 기회라고 생각합니다.

바울은 우리 삶을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는 예배를  하나님께 드리는 [‘영적 예배’]라고 말합니다. 영적 예배를 ‘성령의 예배’로 착각하는 경우도 있는데, ‘영적’으로 번역된 헬라어 [‘로기켄(λογικην)’]은 ‘성령, 혹은 영’이 아니라 ‘말씀’을 의미하는 [‘λογος(로고스)’]의 형용사로 reasonable 즉, '합리적인', '논리적인', '말이 되는'이란 뜻을 지닌 단어입니다. 즉 영적 예배는 ‘합당한 예배’, ‘참되고 사리에 맞는 예배’, ‘구속받은 피조물이 드려 마땅한 예배’란 뜻입니다. 따라서 ‘영적 예배’란 우리의 삶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삶이 되고, 온전히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삶을 사는 이들이 드리는 예배를 의미합니다.  

우리의 몸을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는 것, 하나님께 드리는 합당한 예배가 무엇인지를 바울은 다음과 같이 구체적으로 설명합니다.

[‘(2)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첫째로 이 세대를 본받지 않는 것입니다. 즉 세상의 조류에 휩싸이지 말라는 것입니다. 주식투자에서 ‘개미’는 ‘주식에 관한 지식이 없는 일반 주식투자자를 일컫는 투자용어입니다. 개미투자자들의 가장 큰 특징은 증시에 대한 지식이 부족하기에 다른 사람의 의견을 쫓아가기에 자칫하면 막차를 탈 위험이 매우 높다는데 있습니다. 세대를 본받아 재물을 목적삼고 살았던 삭개오는 주님의 은혜를 체험하고 불의한 재물을 기꺼이 내려놓겠다고 선포했습니다. 그런 그를 향해 주님께서는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눅 19:9)]라고 칭찬하셨습니다.

두 번째로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는 것입니다. 새해가 맞이하면서 사람들은 잘못된 것을 내려놓고 새롭게 거듭나겠다고 결단하곤 합니다. 그런데 대부분 작심삼일로 그칠 때가 많습니다. 금연하겠다고 결단했지만 실패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새롭게 변화하겠다고 결단한다고 내가 새롭게 될 수 있습니까? 물론 의지가 강한 사람의 경우 금연에 성공하고 다이어트로 살을 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신앙적인 면에서 우리의 의지만으로 우리가 거듭날 수 없습니다. 오로지 세상 것을 내려놓고 주님을 목적삼고 주님의 말씀 안에서 나를 비울 때만 우리는 변화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세 번째로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선택의 기로에서 고민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무엇이 하나님의 뜻인지 알게 해달라고 기도하곤 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내가 택한 선택이 선한 것인가 아니면 부정직한 방법인가를 구분하면 됩니다. 그리고 내가 택한 선택에 하나님의 기뻐하심이 있는가 아니면 내 욕심을 채우기 위한 것인가를 살펴봅니다. 마지막으로 내가 택한 선택이 선한 것이고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이라고 판단된다면 그것을 이루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계속해서 바울은 [(3b)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고 권합니다.
새번역은 [‘여러분은 스스로 마땅히 생각해야 하는 것 이상으로 생각하지 말고’]로 해석했습니다. 즉 자신을 과대평가하지 말라는 의미입니다. 자신을 과소평가하는 것도 좋지 않지만, 자신을 과대평가하는 것은 자칫하면 현실에 만족하지 못하거나, 하나님과 사람들 앞에서 자신의 의를 드러내는 우를 범할 수 있기에 조심해야 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처신해야 할까요?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고 권합니다.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에게는 큰 믿음을 주시고, 다른 사람에게는 작은 믿음을 주실까요?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에게 동일한 믿음을 주셨는데, 사람마다 하나님께서 주신 믿음에 자신을 의지하는 바가 각기 다릅니다. 12명의 제자들 모두가 주님을 향한 믿음이 동일하지 않았습니다. 가장 대표적인 예가 가룟 유다입니다. 가룟 유다가 다른 제자들과 동일한 믿음을 갖고 있었다면 그는 예수님을 팔아넘기지 않았을 것입니다. 바울은 내게 주어진 상황 속에서 하나님께서 주신 믿음에 내가 얼마나 의지하는가를 잘 생각해보라고 합니다.

바울이 각자 처한 상황에서 하나님께서 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자신을 생각해보라고 한 이유는 성화의 과정이 모두가 동일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생김새가 다르듯이 우리의 능력도 모두 다릅니다. 저 사람에게는 있고 나에게 없는 능력이 있습니다.

[(4-5) ‘우리가 한 몸에 많은 지체를 가졌으나 모든 지체가 같은 기능을 가진 것이 아니니 이와 같이 우리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 되어 서로 지체가 되었느니라’]

각자 다른 삶의 자리에서 살고 있고, 각자 다른 능력을 지닌 우리가 모여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고 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 된 우리는 제일 먼저 주님께서 주신 능력이 서로 다름을 인정해야 합니다. 최근 방영하는 무명가수 오디션 프로그램을 보면서 제가 신선하다고 느낀 점이 있습니다. 경쟁 프로그램인데도 상대방에 대해 질투하거나 반목하지 않고, 서로를 인정해주는 모습이 참 인상적이었습니다. 사람마다 주님께서 주신 능력이 다름을 인정할 때, 우리는 비로소 아름다운 믿음의 공동체를 이루게 됩니다.

6절에서 8절은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는 지체가 각자 주님께서 허락해주신 삶의 터전에서 주님께서 주신 능력을 주님께서 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최선을 다해 매진해야 함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 신묘막측한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우리가 어떤 삶을 살아야 할지에 대해 나누어 보았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을 바탕으로 대등한 관계에서 바른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서로가 권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목적 삼을 때만 세상의 조류에 휩싸이지 않고 늘 새롭게 변화된다는 사실을 잊지마십시다.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며 주님께서 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삶의 자리에서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는 뜻이 이루어 질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는 삶이야 말로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우리가 드릴 수 있는 영적 예배라는 사실을 잊지 마십시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을 믿는다면서도 정작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는 뜻보다는 내 욕심을 채우기에 급급했음을 회개합니다. 온라인으로 예배를 드리면서 어느 순간부터 나태해져가고 있는 우리 믿음의 실상을 깨닫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주님, 이번 사태가 세속적 조류에 휩싸여 있던 우리의 삶의 자리를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예배의 자리로 새롭게 변화시켜 주시기 위한 주님의 뜻임을 믿습니다. 주님의 말씀 안에서 나를 온전히 죽일 수 있도록 도와주시옵소서. 내가 주님 안에서 온전히 죽음으로 주님의 말씀으로 인해 살아나는 은혜를 허락해 주시옵소서. 상황이나 장소와는 관계없이 선하시고 기뻐하시는 온전하신 주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예배의 생활화, 생활의 예배화를 삶 속에서 구현해갈 수 있도록 도와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묵상을 돕는 질문]
1. 로마서의 구조와 내용은? (1-11장, 12-16장)
2.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은 무엇입니까?  
3.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는 무엇을 뜻합니까?
4. 영적 예배란?  
5.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한다는 말의 의미는?

(작성 이창호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