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11/02(월) “사도행전 22:1-29” / 작성: 이대은
[본문] 사도행전 22장 1-29절
[찬송가] 373장 ‘고요한 바다로’

사도 바울은 사도행전 21장에서 자신이 모세를 배반하고, 유대의 관습을 지키지 말라고 선동했으며, 성전을 비방하고, 이방인을 성전에 들여보내 성전을 더럽혔다는 거짓 고소를 당합니다. 오늘 말씀에서는 이에 대해 해명하는 내용이 나오는데, 앞으로 여섯 번에 걸쳐 이어질 자기변호의 첫 번째에 해당합니다.

[사도 바울의 자기 소개 (1-5절)]

[(1) 부형들아 내가 지금 여러분 앞에서 변명하는 말을 들으라]

바울은 그들을 부형들, 즉 아버지와 형제들이라고 부릅니다. 스데반이 마지막 설교를 하며 부른 호칭과 같습니다. 바울은 거기에 모인 유대 백성들에게 구타를 당하였고, 결박을 당한 상태였지만 그들에게 적개심이 아닌 존경심과 동정심을 품고 있었습니다. 자신이 예전에 맹목적으로 따랐던 그 길을 걷는 동포들에게 깍듯하고 애틋한 마음으로 나아가려는 모습입니다. 악을 선으로 이기는 그리스도인의 진면목을 보여줍니다. 여기서 변명이라는 말은 헬라 수사학에서 피고 측 연설을 지칭할 때 사용하는 단어로, 자신이 전하는 복음의 타당성을 해명하겠다는 뜻입니다.

[(3) 나는 유대인으로 길리기아 다소에서 났고 이 성에서 자라 가말리엘의 문하에서 우리 조상들의 율법의 엄한 교훈을 받았고 오늘 너희 모든 사람처럼 하나님께 대하여 열심이 있는 자라]

바울은 자신이 누구인지를 밝힙니다. 법률 수사학에서는 진술을 하는 사람의 인격이 특별히 중요했기 때문에, 바울 역시 자신의 출생지와 성장 과정 및 교육 수준과 더불어 성품을 간단히 설명합니다. 그리고 바울 자신이 그들과 다르지 않고 오히려 유대인의 정체성을 잘 간직하고 있음을 보여주려는 의도입니다. 바울은 자신이 길리기아 지역의 수도이자 헬라 교육의 중심 도시였던 다소에서 태어났고, 예루살렘에 유학 와서 성장하며 최고의 스승에게서 최상의 교육을 받았다고 합니다. 그는 유대인이면서도 나면서부터 로마 시민권자였을 정도로 명문가의 자제였으며 지식이 뛰어났을 뿐 아니라 무엇보다도 하나님께 대하여 열심을 냈다고 소개합니다.

[(4-5) 내가 이 도를 박해하여 사람을 죽이기까지 하고 남녀를 결박하여 옥에 넘겼노니 이에 대제사장과 모든 장로들이 내 증인이라 또 내가 그들에게서 다메섹 형제들에게 가는 공문을 받아 가지고 거기 있는 자들도 결박하여 예루살렘으로 끌어다가 형벌 받게 하려고 가더니]

게다가 바울은 실천적인 인물이었습니다. 행동하는 지성으로서 자신이 믿는 바를 그대로 실행에 옮겨 이 도, 즉 예수님의 길을 박해하는 일에 앞장섰습니다. 바울은 대제사장과 장로들이 그 증인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바울은 유대인 최고위층과 가까웠으며 그들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았던 검증된 인물임을 호소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의 이력을 살펴보면 과연 히브리 사람 중에 히브리 사람이라고 할만한 스펙을 지닌 인물임을 누구든지 인정하게 됩니다. 하지만 이는 자랑이 아니라 변론을 듣고 있는 사람들과 자신이 다를 바 없다는 사실을 전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회심 사건을 이야기합니다.

[예수님을 만난 바울(6-16절)]

바울은 다메섹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을 잡으러 가는 길에서 오히려 자신을 찾아오신 하나님께 잡혀 거기에서 세례를 받고 예수님을 믿게 됩니다. 바울의 회심은 사도행전에 3번이나 기록되어 있을 정도로 의미심장합니다. 먼저 9장의 기록은 누가가 제 삼자의 입장에서 작성한 것이고, 22장은 유대인 백성들 앞에서, 26장은 아그립바 왕 앞에서 직접 말한 내용이기 때문에 그 세부 내용에는 다소 차이가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주권적인 역사로 예수님을 박해하던 자가 예수님을 따르는 자가 되었다는 사실은 같습니다.

[(6-8) 가는 중 다메섹에 가까이 갔을 때에 오정쯤 되어 홀연히 하늘로부터 큰 빛이 나를 둘러 비치매 내가 땅에 엎드러져 들으니 소리 있어 이르되 사울아 사울아 네가 왜 나를 박해하느냐 하시거늘 내가 대답하되 주님 누구시니이까 하니 이르시되 나는 네가 박해하는 나사렛 예수라 하시더라]

바울은 시간을 구체적으로 제시합니다. 해가 가장 밝은 오정쯤에 그것보다 더 큰 빛이 자신을 둘러 비쳤다는 말로 자신이 착각하거나 환상을 본 것이 아니었고 하나님의 현현 사건이었음을 전합니다. 그 빛 가운데 엎드러졌는데 사울아 사울아 이름을 두 번 부르는 소리가 들리고, 바울은 누구이신지를 묻습니다. 사울의 회심을 다루는 다른 두 구절에서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고 말한 것과 달리 여기에서는 나사렛 예수라고 하여, 유대인이 박해한 그분이 바로 하나님이였음을 당당히 말합니다. 바울은 자신을 따르는 이들을 박해하는 것이 자신을 박해하는 것이라고, 다소 이상한 방식으로 교회와 자신을 동일시하는 이 나사렛 예수가 하나님이심을 바로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어찌하여야 할지를 물은 뒤에 주님의 말씀을 따라 다메섹으로 들어가 한 사람을 기다립니다.

[(12-13) 율법에 따라 경건한 사람으로 거기 사는 모든 유대인들에게 칭찬을 듣는 아나니아라 하는 이가 내게 와 곁에 서서 말하되 형제 사울아 다시 보라 하거늘 즉시 그를 쳐다보았노라]

경건한 사람이며, 모든 유대인에게 칭찬을 듣는 아나니아가 그를 찾아옵니다. 경건함은 곧 율법을 따르는 것이라고 표현함으로써 바울은 계속해서 자신이 율법을 어기거나 반대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강변합니다. 아나니아는 사울에게 와서 박해자를 형제라고 부르며 다시 보라고 하였고, 바울은 즉시 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아나니아는 하나님이 베푸신 은혜가 어떠한 것인지 설명합니다.

[(14-15) 그가 또 이르되 우리 조상들의 하나님이 너를 택하여 너로 하여금 자기 뜻을 알게 하시며 그 의인을 보게 하시고 그 입에서 나오는 음성을 듣게 하셨으니 네가 그를 위하여 모든 사람 앞에서 네가 보고 들은 것에 증인이 되리라]

아나니아는 바울의 구원 과정을 네 가지로 설명합니다. 첫째, 우리 조상들의 하나님이 너를 택하였다. 둘째, 자기 뜻을 알게 하셨다. 셋째, 그 의인을 보게 하셨다. 넷째, 그 음성을 듣게 하셨다 입니다. 이는 우리가 겪는 구원 과정을 그대로 묘사합니다. 우리는 자신의 힘으로 구원을 받지 않습니다. 다만 하나님께서 우리를 택하셔서 자신의 뜻, 즉 하나님의 아들을 죽이시고 살리셔서 죄인을 자기 자녀로 삼으신 뜻을 깨닫도록 하십니다. 또 구세주이신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셔서 우리의 눈으로 보게 하셨고 지금도 보게 하시며, 아들의 음성을 들려주셔서 그대로 살게 하십니다. 그런 후에 바울에게 사명을 주시는데, 바로 예수님을 위해 유대인과 이방인 모든 사람 앞에서 보고 들은 것에 증인이 되라는 것이었습니다. 우리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보고 들어 믿게 된 예수님의 증인으로 사는 것이 구원의 결과입니다. 따라서 이 구원의 여정과 그 결과를 우리 삶에 날마다 적용하며 살아야 합니다. 여기에서도 바울은 아나니아가 자신에게 우리 조상들의 하나님이라고 했으며, 유대인과 이방인을 포함하는 모든 사람 앞에서 증인이 되라고 말했다고 하며 자신이 유대의 하나님과 그 관습을 떠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전합니다. 이때 아나니아는 바울에게 결단을 촉구합니다.

[(16) 이제는 왜 주저하느냐 일어나 주의 이름을 불러 세례를 받고 너의 죄를 씻으라 하더라]

구원의 과정을 설명하였다면, 이제는 그 구원을 받는 방법을 설명합니다. 비록 하나님이 주권적으로 은혜를 베푸셔서 우리를 부르시고 구원을 베푸시지만 우리 입장에서도 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바로 일어나고, 이름을 부르고, 세례를 받고, 죄를 씻는 것입니다. 한국어 성경은 원어의 순서와 다소 다릅니다. 헬라어 성경에서는 일어나, 세례를 받고, 죄를 씻고, 주의 이름을 부르라는 형태로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일어나라는 말씀은 바로 순종하는 행동을 취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세례를 받으라는 것은 공적으로 자신의 죄를 하나님께 고백하고 용서받음을 결단하고 알리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이 짓던 죄에서 벗어나고 죄를 씻어야 합니다. 그리고 주의 이름을 부르라고 합니다. 주의 이름을 부르는 것은 이 모든 과정을 포괄하는데  아나니아는 주저하지 말라고 촉구합니다. 지금 주님께서 이름을 불러주신 은혜를 받으신 분은 주저하지 마시고 주님의 이름을 부르십시오. 주님이 우리를 불러주심은 우리가 주님을 부르심으로 완성됩니다. 그 주님께서 바울의 삶을 바꾸신 것처럼 우리의 삶도 바꾸실 것입니다.

[(17-29) 예루살렘 회상과 바울의 구금]

[(17-18) 후에 내가 예루살렘으로 돌아와서 성전에서 기도할 때에 황홀한 중에 보매 주께서 내게 말씀하시되 속히 예루살렘에서 나가라 그들은 네가 내게 대하여 증언하는 말을 듣지 아니하리라 하시거늘]

그리고 바울은 자신이 후에 예루살렘에 돌아가 성전에서 기도했다고 말합니다. 이는 사도행전 9장과 갈라디아서 1장에서 간략하게 설명하는 내용으로서 바울이 회심하고 3년이 지난 후, 약 15일간 있었던 일을 말합니다. 바울은 동포들에게 자신이 성전을 찾아가 기도할 정도로 율법을 지키고 준수하며 따랐다는 사실을 호소합니다. 황홀한 중에 기도할 때 하나님은 예루살렘에서 전도하고자 하는 그를 막아 떠나라고 하십니다.

[(19-21) 내가 말하기를 주님 내가 주를 믿는 사람들을 가두고 또 각 회당에서 때리고 또 주의 증인 스데반이 피를 흘릴 때에 내가 곁에 서서 찬성하고 그 죽이는 사람들의 옷을 지킨 줄 그들도 아나이다 나더러 또 이르시되 떠나가라 내가 너를 멀리 이방인에게로 보내리라 하셨느니라]

사도 바울은 자신이 과거에 저지른 죄를 상세히 설명하며 자신이 그들에게 전해야 할 부채가 있으며, 또 그들이 자신의 말은 들을 것이라고 기대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바울에게 명하여 떠나서 이방인에게 가라고 말씀하십니다. 바울의 소원과는 다르게 하나님의 뜻은 바울을 이방인의 사도로 세우신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 순간 유대인들은 극렬하게 반응합니다.

[(22-23) 이 말하는 것까지 그들이 듣다가 소리 질러 이르되 이러한 자는 세상에서 없애 버리자 살려 둘 자가 아니라 하여 떠들며 옷을 벗어 던지고 티끌을 공중에 날리니]

그들은 여기까지 바울의 이야기를 듣다가 소리를 지르며 이러한 자는 세상에서 없애 버려야 한다고 말합니다. 유대인의 반응이 급작스럽게 느껴질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바울을 구타하고 죽이려고 했던 이유가 이방인을 성전으로 데려와서 성전을 더럽히려고 했기 때문임을 기억하면 이 반응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물론 구약성경을 보면 유대인들도 이방의 빛이 되라는 명을 받았음을 봅니다. 하지만 유대인들은 이를 이방인이 유대교로 개종하여 유대교 관습을 따른다는 뜻으로 이해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이 바울에게 이방인에게 나가 예수를 믿도록 전하셨다는 주장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신성모독에 해당하는 참람한 죄라는 뜻으로 옷을 벗어 던지고 티끌을 날리기까지 합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바울과 유대인의 큰 차이를 봅니다.

바울은 하나님이 나를 구원하셨기 때문에 여러분도 구원하십니다 라고 말하지만, 유대인은 하나님이 나를 구원하셨기 때문에 당신은 구원하지 않으신다고 말합니다. 또 바울은 유연하여 어떻게든 같은 점을 찾아 유대인들의 입장에 서려고 하지만, 유대인들은 경직되어 어떻게든 다른 점을 찾아 바울을 박해하려고 합니다. 이 극심한 대조는 자유롭게 하는 복음을 믿는 우리가 어떠한 자세를 취해야 할지 생각해 보도록 만듭니다. 고린도전서 9장 19절과 23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고린도전서 9:19, 23) 내가 모든 사람에게서 자유로우나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된 것은 더 많은 사람을 얻고자 함이라 내가 복음을 위하여 모든 것을 행함은 복음에 참여하고자 함이라]

바울은 복음 안에서 참으로 자유로웠습니다. 또 자신을 부르신 하나님 안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굳건히 확립했습니다. 따라서 누구라도 될 수 있었고, 어디에도 갈 수 있었으며, 모든 것을 할 수 있었습니다. 이후 소요가 일어나려 하자 천부장은 다시 바울을 데려가 심문하려고 합니다. 그제야 바울은 자신이 로마 시민임을 밝히고 정당한 절차를 밟으라고 요구합니다. 앞서도 자신이 로마 시민임을 이야기할 수 있었지만, 유대인들 앞에서 일부러 드러내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러자 오히려 두려움에 빠진 천부장은 결박을 풀고 제사장들과 공회 앞에서 바울이 재차 변론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는 것으로 오늘 말씀은 마무리됩니다.

은행에서 청원경찰로 일하는 한 분이 최근에 이런 얘기를 해주었습니다. 예전에는 마스크를 쓰면 당신 도둑이냐고 벗으라고 야단했지만, 이제는 마스크를 벗고 있으면 당신 코로나 보균자 아니냐고 쓰라고 야단을 한다고 합니다. 상황이 변하면서 같은 행동도 전혀 다른 의미를 지니게 된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바울은 이제 예수 그리스도가 오신 이후에 율법과 성전과 유대의 관습은 전혀 다른 의미를 지니게 되었으며 새로운 틀에 맞춰 모든 것을 새롭게 바라보도록 요청합니다. 예수님은 율법을 거부하거나 부정하시는 분이 아니며 오히려 완성하신 분이심을 증거하고, 자신 역시 모세의 율법과 유대의 관습을 존중하는 정통 유대인이지만 참 하나님이신 예수님을 만났다고 증언하는 것입니다. 은행에서 마스크를 쓰든, 쓰지 않든 그것이 모든 사람의 안전을 위한 것이듯 바울은 율법을 지키든, 그렇지 않든 복음을 위해서, 한 사람이라도 더 구원하고자 그랬습니다. 오늘 우리는 자유케 하시는 하나님께 부름 받은 존재임을 기억하며 바울을 본받아 한 사람을 구원하기 위해서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유연함을 지키는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는 은혜가 있기를 소원합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바울은 주님의 부름을 받고 보고 들은 바를 전하는 증인으로 살기 위해 누구든지 될 수 있고, 어디에든 있을 수 있고, 무엇이든 할 수 있다고 삶으로 웅변합니다.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셨기 때문에 당신도 사랑한다는 관용의 자세를 잃지 않고 참으로 자유로운 존재로 살아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우리를 불러 주셔서 감사합니다. 우리 역시 주님을 부르는 삶으로 응답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묵상을 위한 질문]
1. 바울이 유대인들에게 자신도 그들과 다를 것이 없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전하기 위해 했던 말과 행동은 무엇입니까?
2. 주님 부르기를 주저하고 계시다면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먼저 부르신 주님의 은혜를 깊이 생각하시고 주님을 부름으로 응답하십시오.
3. 바울처럼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셨기 때문에 당신도 분명히 사랑하실 것이라고 생각하고 말합니까? 유대인처럼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셨기 때문에 당신은 사랑하기 어렵다고 생각하지는 않았습니까?
4. 우리는 사도 바울처럼 참으로 복음 때문에 자유롭습니까? 사도 바울이 말하는 자유는 방종이 아닌 복음을 위한 자유입니다. 나는 사도 바울처럼 모든 사람에게서 자유로우나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되었다고 고백하며 복음을 위하여 모든 것을 행하고 있습니까?

(작성: 이대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