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10/27(화) “사도행전 20:1-12” / 작성: 이창호A
[본문] 사도행전 20:1-12
[찬송가] 459장 “누가 주를 따라”

[마게도냐와 그리스에 가다(1-6)]
데메드리오가 일으킨 소요가 진정되자 바울은 제자들을 불러 권면한 후에 다시 마게도냐로 길을 떠납니다. 바울의 권면은, 20장 17절부터 나오는 밀레도에서 에베소 교회 장로들에게 했던 권면과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입니다. 계속되는 억압과 박해에도 굴하지 말 것과 하나님의 새로운 백성으로서 부르심에 합당한 삶을 요청했을 것입니다.
   마게도냐로 떠나게 된 일은 데메드리오의 소동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주님의 말씀이 힘이 있어 마술과 요술을 이기고, 세력을 얻었던 때(19:20), 마게도냐와 아가야를 거쳐 예루살렘에 가기로 이미 작정한 것이었습니다. 바울은 이 계획을 실행하기 위해 자기보다 먼저 디모데와 에라스도를 마게도냐로 보내어, 교회들의 영적 형편을 돌보고 권면하는 일을 하게 하는 한편, 예루살렘 교회를 향한 연보를 모으는 일을 감당하게 했을 것입니다. 바울은 떠나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오랫동안 남아 영광스러운 복음의 추수 보기를 원하지 않고, 미련 없이 에베소를 떠납니다. 교회의 어려움이 눈에 띄게 안정되면, 기득권이라고도 할 것 없는 자신의 자리를 내어놓고 하나님이 주신 사명을 이루기 위해 길을 떠났습니다.
   구원받은 신자로서 이 정도의 모범적 삶을 살 수 있을까 의구심이 들 정도로 바울은 신실한 신자의 표본이요 모범이었습니다. 그는 순전하게 최선을 다했습니다. 사도행전 문맥에서의 바울은, 사람이면 누구나 갖고 있을 법한 간사함을 발견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순전하게 자기 분깃과 얻게 될 이익에 대한 관심은 내려놓은 채 사는 길은 바울만 걸을 길이 아니라 오늘 우리도 걸어야 할 길입니다.
   바울은 먼저 에게 해를 건너 마게도냐로 가기 위해 드로아에 머물며, 디도를 기다립니다. 고린도교회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편지를 써서 디도 편에 전달했고, 그 결과를 듣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러나 마냥 기다리지 못하고 마게도냐로 건너가게 됩니다. 바울은 이전 2차 전도여행에서 방문했던 것과 동일한 여정으로  빌립보, 데살로니가, 베뢰아 교회들을 방문하며 교회를 든든히 세우고, “헬라”라고 불리는 아가야 지방에서 석 달을 머무는데, 대부분을 고린도에서 체류하며 그곳의 형제들을 권면하고 섬겼던 것으로 보입니다. 바울은 이때, 로마서를 기록합니다(롬16:23).
   에베소를 떠나 자신이 섬겨야 할 사람들을 두루 찾아다니며 섬기던 바울은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을 재촉하기 위해 해상 항로를 이용하여 수리아로 가고자 했지만 자기를 해하려는 유대인들의 공모를 알고는, 마게도냐를 거쳐 육로로 우회하기로 작정하고 이방교회 여러 대표자들과 길을 함께합니다.

[(3) 거기 석 달 동안 있다가 배 타고 수리아로 가고자 할 그 때에 유대인들이 자기를 해하려고 공모하므로 마게도냐를 거쳐 돌아가기로 작정하니 아시아까지 함께 가는 자는 베뢰아 사람 부로의 아들 소바더와 데살로니가 사람 아리스다고와 세군도와 더베 사람 가이오와 및 디모데와 아시아 사람 두기고와 드로비모라]

   유대인들이 바울을 해하려고 공모했다고 합니다. 그들의 공모는 비밀리에 이루어졌을 것입니다. 바울의 정보망이 당시 지중해 세계 전역에 있었을 리도 만무하고, 부족하고 없는 것 투성이의 전도팀이었을 것이지만 이런 공모가 미리 바울 일행에게 발각되었다는 것은 하나님의 도우시는 손길이 아니고서는 설명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바울이 로마에도 복음을 전해야 한다는 사명을 주시고, 사명을 이루기까지 안전하도록 이끄시고 보호하십니다. 우리 하나님,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는 이런 분입니다.
   우리는, 우리 편에서 감히 기대할 수 없었던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았다고 해서 구원 받은 이후의 삶에 소홀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래서 말씀을 따르고, 부르심을 이루는 삶을 향해 나아가야 하는지도 모르고 살아갈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과 승천으로 우리를 예수 안에서 자녀 삼으신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하나님의 자녀다운 삶을 살아가도록 말씀하시고, 그 삶을 이루어나가기를 원하십니다. 아무렇게나 우리가 하고 싶은 대로, 마음 가는 대로 살아가는 것이 백성된 삶이 아니라 우리 각자에게 주신 부르심을 이루는 삶을 살아가도록 인도하십니다. 우리가 그 부르심을 완성하기까지 우리를 지키시고 보호하십니다. 그래서 바울에게 건강을 주시지 않으셨고, 세상의 부와 명예도 주시지 않았지만 바울을 보호하시고, 말씀을 이루는 삶에서 이탈하지 않도록 붙들어주신 것입니다.
   주님의 부르심을 마치기까지 자기 백성을 지키시는 하나님의 자비로우심을 묵상하며, 오늘 나는 그 길의 중앙을 걷고 있는지, 길을 비켜나 어긋난 길을 걷고 있는지 되돌아보아야 합니다. 이 수확의 계절에, 삶으로 맺은 열매가 어떤 것인지 살펴보며 말씀 이루는 오늘을 살아가는 모든 교우님들 되시기를 기도합니다.


[유두고의 죽음과 되살아남(7-12)]
   본문으로 돌아가서, 4절에서 언급되었던 이방 교회의 대표들은 드로아에 먼저 도착하여 바울 일행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바울 일행은 무교절 후에 빌립보에서 배로 떠나 5일 만에 드로아에 있는 이방 교회의 대표들과 합류했고, 일주일을 보내게 됩니다. 바울은 잠시 들러 일주일을 머물렀던 드로아에서도 시간을 허비하지 않고, 말씀을 전합니다.

[(7) 그 주간의 첫날에 우리가 떡을 떼려 하여 모였더니 바울이 이튿날 떠나고자 하여 그들에게 강론할새 말을 밤중까지 계속하매]

   바울 일행은 그 주간의 첫날, 곧 안식 후 첫날인 주일에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기념하는 예배를 드렸습니다. 설교를 시작한 바울은 한두 시간 설교한 것이 아니라 밤중까지 계속 설교했습니다. 이는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셨고, 이에 따라 그리스도인들도 주님을 따라 부활하게 되리라는 요지의 설교였을 것입니다.
   쉬지 않고 계속된 설교에 3층 창문에 걸터 앉아있던 유두고가 졸음을 이기지 못하고 떨어져 죽었습니다. 9절 말미에, “일으켜보니 죽었는지라”는 말은 그가 실제로 죽었음을 증거합니다. 유두고의 죽음으로, 가장 은혜로워야 할 예배의 시간, 축제의 시간이 가족을 잃은 슬픈 장례식장이 될 뻔한 상황입니다. 바울도 당혹스러웠을 것입니다. 그는 엘리야가 목숨을 잃은 사르밧 과부의 아들에게 했던 것처럼, 엘리사가 수넴 여인의 죽은 아들 위에 올라가 자신의 몸을 포갠 엘리사처럼 죽은 청년의 몸을 안고 생명이 그에게 있다고 단호하게 선포합니다.

[(10) 바울이 내려가서 그 위에 엎드려 그 몸을 안고 말하되 떠들지 말라 생명이 그에게 있다 하고]

   떠들지 말라, 생명이 그에게 있다 말하며, 바울은 죽은 유두고를 붙들고 기도했습니다. 그랬더니 유두고가 살아났고, 올라가 함께 떡을 떼어먹고 날이 새기까지 이야기했다고 합니다. 바울이 전했던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 그저 예전에 있었던 일이 아니라 유두고에게도 실제로 일어남으로써 주님께서 죽음을 깨트리고 부활하신 참 생명, 영원한 생명이심을 드러낸 사건입니다.
   바울은 그 자신이 부활을 말할 뿐만 아니라 그 부활을 살아내었고, 유두고를 살려냄으로써 부활을 모두에게 보여주는 사역을 친히 감당했습니다. 12절에, "사람들이 살아난 청년을 데리고 가서 적지 않게 위로를 받았더라”는 말은 죽은 줄로만 알았던 유두고가 살아났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 그저 말이 아니라 자신들의 삶에 실재한다는 것을 믿을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이와 같아야 합니다. 부활을 말할 뿐만 아니라 부활을 살아내며, 부활을 보여주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우리의 주일 예배가 부활하신 주님의 능력을 힘입는 영적 체험의 장임과 동시에, 우리 삶의 현장이 부활을 보여주는 삶이어야 합니다. 입으로는 부활을 말하지만, 삶으로는 다른 이들을 주님 앞에서 낙심하게 만들고, 그들에게 남은 실낱 같은 희망의 끈마저 끊어버린다면, 가는 곳마다 그리스도인에게 거는 기대감에 찬물을 끼얹고 낙심하게 만든다면, 그는 부활의 능력을 제대로 살아내고 있다고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선대하셔서 자녀 삼으신 우주적 교회, 그속에서 교회로 존재하는 우리 모두가 마땅히 살아내어야 하는 삶이 바로 부활의 삶입니다. 자기 백성을 위해 삼위 하나님께서 행하신 위대하신 선, 투브가 무엇입니까? 바로 예수께서 성육신하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셔서 승천하신 사건이 아니겠습니까? 위대한 투브를 행하신 하나님께서 오늘 우리를 부활을 말할 뿐만 아니라 살아내며, 증명하는 삶으로 초청하고 있습니다.
   그 삶은 꼭 죽은 사람을 살려내어야 하는 기적이 아닙니다. 나로 말미암아 깨어진 심령이 회복되어 하나님 앞에서 선한 꿈을 꿀 수 있다면, 그것이 우리가 행할 투브입니다. 분열되었던 공동체가 하나되고, 막힌 담이 허물어지고, 한 치의 거짓없이 순전한 모습으로 주님 앞에 나오게 만든다면, 그것이 투브입니다. 그리스도인이라면 응당 살아내어야 할 예배의 생활화, 생활의 예배화입니다. 오늘 이 부활의 능력을 덧입는 저와 모든 교우님들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기도]
하늘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 이 땅 가운데서 우리가 진짜 이루려는 것이 하나님의 뜻인지, 사사로운 나의 입지와 기득권인지 헤아려 분별할 수 있는 지혜를 주시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려는 주의 백성을 지키시고 보호하시는 자비로운 하나님이심을 깨닫고 경험하는 복된 인생을 살게 해주시옵소서. 그리하여 부활을 말할 뿐만 아니라 살아내고, 부활을 보여줄 수 있는 그리스도인이 되어 가는 곳마다 위로와 평안, 주님의 사랑을 전하는 우리가 되게 해주시옵소서. 무엇보다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를 선대하셨음을 기억하여 복음에 빚진 자로서 우리에게 주신 말씀을 이루는 하루를 살게 해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묵상을 돕는 질문]
1. 바울이 배로 수리아로 가려다가 계획을 바꾼 이유는 무엇입니까? (3)
2. 살면서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내 인생 계획이 수정되었던 경험이 있으면, 그 과정을 써보고 하나님의 은혜를 떠올려보세요.
3. 유두고의 죽음에 대응하는 바울의 자세를 보며, 떠오르는 인물과 사건은 무엇입니까? (10)
4. 이 부활을 살아내고 있습니까? 부활을 살아내기 위한 방법은 무엇이 있을까요?

(작성:이창호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