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10/06(화) “사도행전 11:1-18” / 작성: 김대인

[본문]: 사도행전 11:1-18
[찬송]: 515장 눈을 들어 하늘보라

[이방인에게 전해진 복음(1-3)]
저마다 지닌 사고의 틀이 뛰어 넘어진다는다는 것은 특별한 사건이나 환경이 아니라면 평소에 일어나지 않는 매우 드문 일입니다. 그러나 그 어려운 일을 해내는 일들로 인해 세상은 이전에 경험하지 못한 새로운 환경을 맞이하게 됩니다. 초대교회 마가의 다락방에 모여 있던 120명의 사람들을 계수할 때, 통상적으로 남자의 수만 세던 문화를 깨뜨리고 남자와 여자, 성인과 어린 아이의 차별의 장벽을 깨뜨렸을 때, 강력한 성령의 임재가 나타난 것처럼 말입니다. 그 작은 차이가 성령의 시대를 여는 열쇠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의 경험과 사고에 갇혀 늘 하나만 아는 지독한 편견 속에 갇혀있다는 것은 슬픈 현실입니다.

베드로가 이방인이던 고넬료에게 복음을 전하고, 이어 세례를 베푼 뒤 성령이 임한 것은 당시 초대교회에는 매우 중요한 사건이었습니다. 그래서 누가도 사도행전에서 10장부터 오늘 본문에 이르기까지 많은 양을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하고 성령이 임한 사건을 설명하고 해석하는 데 할애하고 있습니다. 이전까지 복음이 유대인이라는 높은 벽을 뛰어 넘지 못하고 있었으나, 베드로의 사건을 중심으로 하나님께서 그 벽을 허무시는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방인이 복음을 받았다는 소식이 유대에 있는 사도들과 형제들에게 전해졌습니다. 이방인들이 복음을 받아들였고, 그들 심령에 회심이 일어났으며, 그 결과 이방인들에게 세례를 베풀었다는 것이 오늘날에는 무슨 큰일인가 생각할 수 있지만, 당시 초대교회에는 충격적인 사건이었습니다. 여전히 유대인 그리스도인들 안에는 할례를 받지 않은 이방인들과 할례를 받은 자신들을 구분 짓는 엄격함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2-3) 베드로가 예루살렘에 올라갔을 때에 할례자들이 비난하여 이르되 네가 무할례자의 집에 들어가 함께 먹었다 하니]

주님께서 승천하실 때 분명 사마리아는 물론 땅 끝까지 복음을 전하라 하셨는데, 주님의 명령을 잊어버린 채 복음의 확장성을 가로막고 있는 이들은 다름 아닌 예수님의 지상명령을 직접 들은 제자들이었고, 예수님 공생애 때 직접 가르침을 받았던 이들이었습니다. 베드로가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했다는 소식을 듣고 당사자인 베드로의 설명을 직접 듣고 싶었던 사람들은 스스로 높은 장벽을 쌓았던 보수적인 유대 그리스도인이며, 극단주의자들이었고, 엄격한 율법주의자들이었습니다.

태생적 유대인으로 기독교 공동체에 속한 사람들은 이방인 고넬료에게 복음을 전한 베드로가 매우 경솔하게 저지른 행동을 했고, 이해의 차원이 아닌 베드로를 책망할 생각이었습니다. 자신들의 전통과 관습을 깨고 무할례자들의 집에서 함께 음식을 먹음으로 베드로 자신도 부정해졌고, 고넬료에게 복음도 의미가 퇴색되었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극단적인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에게 베드로의 이방인 전도가 왜 문제가 되었을까요? 그것은 복음의 희귀성을 유지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가치 있는 것은 소수만 누려야 그 가치가 빛을 발합니다. 소수만 가치를 누릴 때 그 가치는 특별한 것이 되며 가치를 가진 이들에게 우월감을 줍니다. 믿는 다는 것으로 유대인들에게는 물론 다른 종교에게도 고난을 받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우월감조차 내려놓아야 한다면 믿음으로 당하는 그 인고의 세월을 견디기 어렵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또한 아직 이방인 전도에 대한 내규가 명확하게 세워지지 않은 상황에서 이루어진 베드로의 전도는 공동체의 질서를 깨뜨리는 행위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렇기에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은 복음의 가치를 지키고 싶었습니다. 적어도 제도와 조직 안에서 복음의 가치를 훼손하고 싶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율법적인 성향의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을 비난만 할 수 없는 것이, 우리도 역시 살아가면서 수많은 편견과 고집, 특권 속에 살고 싶어 하기 때문입니다. 단 한 번 살아가는 인생, 삭개오처럼 남다른 열정과 통찰, 역량과 주변 도움 등으로 인생의 최고의 자리만을 고집합니다. 적어도 최고의 자리까지는 아니어도 남들 보기에 부끄럽지 않은 모습으로 살고 싶어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나에게 원하시는 모습인지에 대해서는 확신할 수 없으면서도, 경쟁사회에서 살아가기 위해 어쩔 수 없다는 자기 위로 속에, 편견과 고집으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외면할 때가 많습니다.

[편견 극복하기(4~18)]
그러나 참 다행입니다. 본문에 나타난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지닌 편견을 사용하셔서 오히려 더 놀라운 복음의 확장을 이루어가신다는 것입니다. 베드로의 방문에 고넬료와 그 집안 전체가 어떻게 반응했는지 우리는 앞서 10장에서 살펴보았습니다. 베드로가 놀랄 정도로 성령의 부어주심이 강력하게 이루어졌고, 사람들은 베드로에게 며칠을 더 머물도록 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자 했습니다. 편견에 사로잡혔던 베드로가 고넬료 집안사람들에게 임한 성령님을 경험한 것은 베드로로 하여금 복음의 개념을 놀랍도록 확장시킨 사건입니다.

성령님이 하시는 복음의 확장이 비단 베드로에게만 머물진 않았습니다. 베드로를 비방하고 흠잡으려고 하는 사람들에게도 역시 고넬료 집안에 임한 성령님의 역사는 편견을 깨뜨리기에 충분했습니다. 후에 사도행전 15장에 이방인 전도에 대한 규정을 세우기 위한 예루살렘 공의회가 열리는 계기로 이어지게 된 것입니다. 우선 베드로는 자신을 비난하는 사람들을 향해 항변합니다.
[(4-10) 베드로가 그들에게 이 일을 차례로 설명하여 이르되 내가 욥바 시에서 기도할 때에 황홀한 중에 환상을 보니 큰 보자기 같은 그릇이 네 귀에 매어 하늘로부터 내리어 내 앞에까지 드리워지거늘 이것을 주목하여 보니 땅에 네 발 가진 것과 들짐승과 기는 것과 공중에 나는 것들이 보이더라 또 들으니 소리 있어 내게 이르되 베드로야 일어나 잡아 먹으라 하거늘 내가 이르되 주님 그럴 수 없나이다 속되거나 깨끗하지 아니한 것은 결코 내 입에 들어간 일이 없나이다 하니 또 하늘로부터 두 번째 소리 있어 내게 이르되 하나님이 깨끗하게 하신 것을 네가 속되다고 하지 말라 하더라 이런 일이 세 번 있은 후에 모든 것이 다시 하늘로 끌려 올라가더라]

이미 사도행전 10장에 언급한 내용을 다시 베드로의 입으로 증언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한 것은 자신의 일이 아니라 하나님이 하신 일이라는 설명이기 때문입니다. 베드로의 설명으로 인간의 생각과 편견을 깨뜨리시는 하나님을 만납니다. 보통 인간은 편견이 깨질 때 두려움을 느낍니다. 굳건하게 세워왔던 자기 의가 무너지는 경험은 결코 유쾌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편견이 깨질 때 우리는 훨씬 더 자유로움을 소유하게 됩니다. 그리고 절대 진리가 아니던 개인의 편견을 왜 그리도 고집했었는지 후회하게 됩니다.

생활도, 사고도, 모두 부정하고 온전치 못한 이방인들은 하나님께 받아들여지면 안 된다고 생각했던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이 베드로의 환상을 통해 결국 우리 모두가 다 부정한 사람들이었고 성령의 임재가 필요한 사람들임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신분을 떠나, 지휘고하를 넘어,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모든 이들을 깨끗한 자로 인정해주시며 성령을 주시겠다는 약속을 지키시는 하나님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을 자신들만의 하나님으로 가둘 수 없음에도, 그러한 죄를 자행하던 지난날들을 부끄럽게 생각했을 것입니다. 이렇듯, 하나님의 뜻 안에서 우리의 편견은 지엽적이고 비본질적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베드로는 고넬료 집안의 성령 임함을 통해, 하나님의 관점에서 누구도 속되거나 깨끗하지 않은 사람이라 말할 수 없다는 것을 설명했습니다. 인종적, 종교적 편견은 극복해야 할 신앙의 장애물임을 분명히 했습니다. 누구든 아무 공로 없어도 오직 예수 이름을 믿음으로 얻는 구원임을 알려주셨습니다. 잘 해야만, 온전해야 만, 출신이 좋아야만, 받을 수 있다는 관습의 찌꺼기가 제거된 것입니다. 마치 바울의 눈에 비늘이 벗겨지는 것처럼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깨끗하다고 하신 사람을 누구도 부정하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복음을 전하러 간 베드로조차도 쉽게 수긍할 수 없던 문제였으나 고넬료 가정을 통해 복음은 우리의 편견에 갇힐 수 없음을 확실히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깨끗하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9-10) 또 하늘로부터 두 번째 소리 있어 내게 이르되 하나님이 깨끗하게 하신 것을 네가 속되다고 하지 말라 하더라 이런 일이 세 번 있은 후에 모든 것이 다시 하늘로 끌려 올라가더라]

인간은 차별하고 구분해도, 성령 하나님께는 차별이 없습니다. 유대인에게 성령이 임하듯, 이방인에게도 동일한 방식과 절차로 성령님이 임했습니다.
[(15) 내가 말을 시작할 때에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시기를 처음 우리에게 하신 것과 같이 하는지라]

물론 깨끗함과 부정함, 바름과 그릇됨, 옳음과 틀림은 늘 우리 인생의 풀어야할 문제입니다. 거룩을 지향하는 우리의 신앙은 늘 정함, 정의, 옳음을 향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사람을 판단하고 평가하는 기준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주님의 제자 된 우리는 사랑만 할 뿐입니다. 주님께서는 깨끗한 짐승과 부정한 짐승의 구분을 깨뜨리심으로 차별 없이 모든 이들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이심을 드러내셨습니다. 할례를 받은 사람과 할례를 받지 않은 사람 모두가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 각자 지닌 편견과 관심을 잠시 내려놓고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으로 창조된 모든 이들에게 사랑의 마음을 품어야 합니다. 일을 잘하고 못하고와 상관없이, 나에게 유익이 되는 것과 유해함과 상관없이, 그가 진실의 사람이냐 거짓의 사람이냐 와 상관없이 기본적으로 사람에 대한 태도는 늘 부드럽고 관대하게 대하는 것이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나의 삶과 인생에 주님의 불러주심이 필요하듯, 원수라 생각했던 삭개오와 같은 이들에게도 주님의 부르심이 필요합니다.

본문에서 놀라운 것은 한 가지 더 있습니다. 보통 복음을 전하는 자가 마음을 부드럽게 하고, 듣는 자가 거부반응을 가져야하는 것이 정상입니다. 복음을 전할 때에는 설득해야 하는 수고가 있기에 전도가 힘든 것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본문은 편견을 지닌 복음전도자와 편견 없이 환영하는 이방인을 만납니다. 하나님께서는 베드로 일행이 도착할 수 있도록 고넬료를 미리 준비시키셨습니다. 하나님의 일하심이 베드로에게만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복음을 받아야 할 고넬료에게도 임했으며, 한 천사가 고넬료에게 욥바에 있는 베드로를 초청하라 알려주었습니다. 베드로가 구원의 말씀을 전해줄 것이라는 예언까지 받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의도적으로 고넬료와 베드로를 만나도록 하시고, 각자의 환경 속에서 다른 메시지로 인해 그들의 마음이 열리게 하신 것입니다.

베드로가 복음을 전했고, 고넬료가 복음을 들었으나, 이 위대한 사건의 주인공은 베드로나 고넬료가 아니라 성령 하나님이십니다. 베드로가 복음을 전하기 시작하자, 그 즉시 성령 하나님이 역사하셨습니다. 문자적으로는 말하고 있을 때에 성령이 임한 것입니다. 이는 베드로가 탁월한 설교가였기 때문이 아닙니다. 성령의 세례를 받으리라는 세례요한의 예언이 이렇게 이방인에게도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이방인에게 주어진 영적인 유월절이 된 것입니다. 이방인들에게 주어지는 성령의 선물이 하나님의 역사이기에 누가 감히 하나님의 열정을 막을 수 있겠습니까? 내 기준과 판단은 하나님의 일하심 앞에서 무기력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역사에 베드로의 이야기를 들은 모든 이들은 침묵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비난은 멈추고 잠잠하게 하나님의 일하심을 느낄 수밖에 없었습니다. 과하지도 경솔하지도 않은 모든 이야기 속에는 하나님께 영광을 올릴 충분한 이유가 되었습니다. 더 나아가 자신들의 선언을 위대한 진리로 인정하는 유대인 그리스도인이 되었습니다. 율법적 유대인들이 지닌 장벽을 하나님이 허무시는 것입니다.
[(18) 그들이 이 말을 듣고 잠잠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이르되 그러면 하나님께서 이방인에게도 생명 얻는 회개를 주셨도다 하니라]

오늘 본문에서 교회의 연합을 배웁니다. 교회 공동체는 누구도 구별해서는 안 됩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속성이 그러하기 때문입니다. 편견을 가진 누구라 할지라도 하나님 일하심에 각자가 지닌 편견의 벽이 허물어지는 것을 봅니다.  성령 하나님은 항상 우리보다 먼저 가서 일하십니다. 성령님의 자신을 내어주심에는 차별 없이 보편적으로 주어집니다. 모든 믿는 이들에게와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는 이들에게는 모두 성령님의 은혜가 부어지며, 죄를 사하고 완전한 구원을 약속하시는 하나님의 선물이 전해지는 것입니다. 기억하십시다. 이 모든 것이 성경적이지 않던 장벽들이 허물어졌을 때 일어난 역사입니다. 성령님의 사역에 걸림돌이 되는 모든 것들을 부수고, 오직 주님의 말씀과 일하심에 발맞춰가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축복합니다.

[기도]
사랑의 주님.
우리 안에 편견과 허상이 이토록 무섭게 자리하고 있음을 말씀 안에서 봅니다. 어설픈 내 기준으로 허용 가능한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을 구분하였고, 내가 받아줄 사람과 거절할 사람을 나누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왜 저런 사람을 만나게 하셨고, 왜 저런 사람을 허용하시는지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복음은 그런 것이 아니며, 하나님은 모든 죄인의 하나님이시건만, 내가 아는 편협한 하나님만 고집하며 살아온 우리는 율법적인 그리스도인이었습니다. 주님, 수많은 오해와 착각을 내려놓고, 우리의 마음과 생각이 오직 주님을 향해 활짝 열리게 하옵소서. 우리 마음과 생각이 오직 하나님으로만 조율되게 하옵시고, 이 땅의 수많은 고넬료와 율법적 그리스도인, 베드로, 삭개오와 같은 이들에게 성령님의 음성에 따라 복음 들고 가는 보편적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묵상을 돕는 질문]
1. 최근 누군가와 대화하던 중 대화가 통하지 않게 되거나, 가까웠던 관계가 멀어진 것을 통해 나에게 있던 편견이 발견된 적이 있습니까?
2. 복음은 확장성이 있으며, 주님께서도 지상명령으로 땅 끝까지 전하라고 하셨으나, 이 사명을 망각한 채 제자들이 율법적인 신앙을 가지게 된 이유는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3. 우리의 편견조차 하나님의 도구가 될 수 있습니다. 이 말이 나에게 어떻게 은혜가 되는지 묵상해봅시다.
4.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으로 창조된 사람을 아직도 충분히 사랑하지 못하고 있다면 이 시간 그 안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을 보며 사랑할 수 있도록 기도합시다.

(작성: 김대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