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9/07(월) "사도행전 2:1-13" / 작성: 이창호A
[본문] 사도행전 2:1-13
[찬송가] 195장 “성령이여 우리 찬송 부를 때”

[마침내 임하신 성령(1-4)]
열두 사도를 비롯한 120여 명의 제자들이 한 곳에 모여 있었습니다. 그들이 모여 있었던 이유는 주님의 말씀을 지키기 위함이었습니다. 주님은 승천 직전에 제자들에게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서 들은 바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행1:4). 일찍이 하나님께서도 요엘 2장 28절에서 말씀하신 대로 “내 영을 만민에게 부어줄 것”이라고 말씀하신 바 있습니다. 그리고 오순절이 되었을 때, 홀연히 성령이 임하셨습니다.

[(2-3)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그들이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 마치 불의 혀처럼 갈라지는 것들이 그들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하나씩 임하여 있더니]

   오순절은 이스라엘이 출애굽한 것을 기념하는 유월절 이후 50일째 되는 날이었습니다(레23:15-16). 이 절기는 지중해 세계에 흩어져 살던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을 순례하는 3대 절기 중 하나였고, 맥추절로도 불렸던 추수의 절기였습니다. 유월절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의 결과로, 그 최초의 수확으로 교회가 탄생하는 순간입니다. 예수를 그리스도라고 고백하는 사람 모두가 성령을 받았습니다.
   성령이 임재하실 때, 급하고 강한 바람이 불었고, 그들 머리 위에 불의 혀처럼 갈라지는 것이 보였습니다. 바람과 불 모두 성령의 임재를 상징합니다. 에스겔 37장의 마른 뼈들의 계곡에서, 마른 뼈가 살아날 때 불어넣었던 생기가 바로 성령을 뜻하는 “루아흐”입니다. 또 모세가 타지 않는 떨기나무 불 가운데서 하나님을 만났고, 이스라엘이 불기둥의 인도를 받았다는 점에도 불도 하나님의 임재를 나타냅니다. 주님의 제자들은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서로 다른 언어들로 말하기 시작하였습니다.

[(4) 그들이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언어들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

   성령 충만할 때,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은사들이 있습니다. 대표적인 것이 방언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타나는 방언은 고린도전서 13장에서 언급되는 방언과는 결이 다릅니다. 이 방언은 실제로 당시 세계 각국에서 통용되던 단어로, 120명이 동시에 내뱉는 큰 소리의 방언이 당시 예루살렘 순례자들에게까지 들렸습니다. 세계 각처에서 온 사람들이, 자기들이 살고 있던 지역 언어로 하나님의 큰 일이 선포되는 것을 들었습니다.

[(5-8) 그 때에 경건한 유대인들이 천하 각국으로부터 와서 예루살렘에 머물러 있더니 이 소리가 나매 큰 무리가 모여 각각 자기의 방언으로 제자들이 말하는 것을 듣고 소동하여 다 놀라 신기하게 여겨 이르되 보라 이 말하는 사람들이 다 갈릴리 사람이 아니냐 우리가 우리 각 사람이 난 곳 방언으로 듣게 되는 것이 어찌 됨이냐]

   유대인들은 주님께서 이 땅에 오시기 얼마 전부터, 오순절을 출애굽 후, 시내산에서 율법을 받은 기념일로 여겼고, 이를 기념하여 오순절에는 70개 민족의 언어로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시간을 가졌다고 합니다. 그런데 뜻밖에 주님의 제자들로부터, 7절에 나오는 대로 갈릴리 사람들이 세계 각국의 언어로 주님의 십자가 희생과 부활에 대해 증거하는 것을 듣게 된 것이었습니다.
   성령을 받은 사람들이 말할 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희생과 부활입니다. 억지로 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강력한 임재 앞에서 경험하는, 내 속에서 터져나오는 외침과도 같은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너희와 우리를 이처럼 사랑하셔서 독생자를 보내셨다, 구원 얻을 유일한 이름을 주셨다, 주 예수 앞으로 나오라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 말을 하려면, 곧 성령 충만해야 하고, 성령 충만한 사람은 세상 사람들과 삶의 결이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늘 죄를 짓는 습관에 젖어, 주님의 사랑의 말씀을 떠올리지 못하는 사람은 절대로 할 수 없는 말입니다. 거룩을 사모하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바르게 되기를 갈망하는 사람, 성령 충만한 사람만이 선포할 수 있습니다. 우리 주님의 길을 내가 걸어가야 할 길로 여기고, 내가 주도하는 인생이 아니라 성령을 기다리기로 작정한 주님의 제자만이 말할 수 있는 내용입니다.
   주님의 십자가 희생과 부활 외에 우리가 자랑할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하나님의 온전한 소유, 성령에 붙들린바 되어 나의 언행심사로 복음을 선포하는 삶을 살아가고 계십니까? 우리의 입으로 자랑하고 말하는 것이 주님 외에 아무것도 없습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용하셔서 진리를 드러내시고, 세상을 정화해 나가십니다. 교회인 신자는 늘 그리스도와의 관계 속에서 자신의 삶을 조망하고 주님의 영광과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살아가야 합니다. 이렇게 살아가고 계십니까? 세상이 교회를 걱정하는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가장 큰 이유는 구원받았다는 신자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 대신에 다른 것들을 말하고, 전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구원받은 신자다운 말과 행동이 내 속에 있는지,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선포하는 성령의 인도하심이 내 삶 속에서 나타나는지 되돌아보아야 합니다.


[놀란 사람들(5-13)]
성령을 받은 제자들이 9절부터 11절에 이르는 각국 방언으로 하나님의 큰 일을 말하기 시작하자 이를 들었던 많은 경건한 사람들이 깜짝 놀랍니다. 당시 흩어져 살던 디아스포라들은 순례기간이 되어 예루살렘으로 오기도 했지만, 말년을 예루살렘에서 보내고, 또 죽어서 그곳에 묻히기 위해 아예 이주를 한 사람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이들이 오순절 성령 강림의 목격자가 되었고, 깜짝 놀랍니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희생과 부활을 전하는 그들의 메시지에 놀란 것이 아니라, 그들이 무시해 마지않는 갈릴리 촌동네 사람들이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세계의 각국 언어를 기적적으로 말한다는 사실 그 자체에 놀랐습니다. 거기 모여 있었던 120명의 사람들이 모두 갈릴리 사람은 아니었겠지만 갈릴리 어부 출신들이 많았고, 예수님부터가 출신지가 갈릴리였기 때문에 예수의 무리들이 갈릴리 사람으로 여겨졌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들의 반응은 6절에 나타난 대로 소동하였고, 7절에는 신기하게 여겼으며, 12절에는 놀라고 당황하였습니다. 일부는 13절의 표현대로 조롱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베드로의 설교를 통해 한꺼번에 삼천 명이 회개하고 세례를 받게 됩니다.
   복음서를 보면, 선문답하듯 자신의 십자가 고난과 부활, 이후의 일들을 말씀해주시는 예수님의 모습과 이를 도무지 이해하지 못하는 제자들의 모습이 오버랩됩니다. 그러나 성령이 임재하시는 이 장면까지 오고나면 주님의 말씀이 무슨 말씀이었는지 이해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일을 위해 제자들을 가르치시며, 하나님 나라를 위해 준비시키십니다. 이들이 그리스도 부활의 첫열매로 교회가 되었고, 사도들의 가르침에 따라 오늘도 우리가 모이고 있습니다.
   교회라는 이름은 가졌으나 사람을 온전하게 하고, 구원하는 복음을 담지하지 못하고, 주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증거하지 못한다면, 교회의 역할을 다할 수 없습니다. 이는 존재 목적 자체를 잃어버린 것입니다. 오순절, 예루살렘의 온기는 절대로 제자들에게 따뜻하지 않았습니다. 불과 50일 전 유월절 전날에 주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주님은 부활하셨지만 여전히 주님을 십자가에 못박았던 정치, 종교 권력자들은 자기 자리를 보전하고 기세등등하게 살고 있었습니다. 성령의 역사하심으로 그들은 분연히 하나님의 큰 일을 세계 각국 언어로 말하기 시작했지만 그들 자체가 용맹했다든가 담력이 뛰어났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바로 성령께서, 그들 스스로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임을 대중 앞에서 자처하도록 그들을 강하게 하셨습니다.
   성령께서 제자들을 바꾸셨듯 우리도 바꾸어 주십니다. 세상의 눈치를 보지 않고, 받게 될 불이익을 계산하지 않으며, 바른 길 걸어가는 용기를 주십니다. 생명 있는 복음의 능력으로 가만 있으라는 세상 앞에서 분연히 떨치고 일어나 정의로움을 외치게 해주십니다. 그리고 그 능력은 말을 흩어지게 만들었던 바벨의 장벽도 넘게 만드십니다.
   창세기 11장에, 자기 이름을 내고 흩어짐을 면하고 했던 사람들의 말이 혼잡해졌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말씀을 신뢰하지 못했던 고대 인류의 말을 흩으심으로써 그들이 의도했던 바를 중지시키셨습니다. 그 이후, 오순절 사건을 통해 세계 각국의 언어로 하나님의 큰 일이 소개됨으로써 언어의 장벽을 뛰어넘게 되었습니다. 성령의 임재를 통해 “전적으로 새로운 사회적 동질성”이 창출된 것입니다. 문화는 다양할 수 있습니다. 언어도 다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령 안에서 하나가 됩니다.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 아무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가 보좌 앞과 어린 양 앞에 서서 구원의 찬송을 올려드리는 요한계시록 7장의 비전이 성취되는 날을 기대하며, 우리가 먼저 사회적 장벽을 깨뜨리는 일에 앞장서야 합니다.
   오순절 성령께서 오늘 우리와 함께하십니다. 주님의 말씀을 생각나게 하시고, 거룩의 길로 이끄시며, 구체적으로 사회적 장벽을 깨뜨리고 하나님의 크신 일을 선포하게 하십니다. 이 일에 쓰임받는 우리 모두가 되어야 할 줄 믿습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오순절 성령 강림으로, 임마누엘의 약속을 신실하게 이루신 하나님의 사랑을 보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죽음의 위협 앞에서도, 도망가지 않고 주님께서 기다리라고 하신 성령을 기다렸던 말씀을 지키고자 하는 열정이 오늘 우리에게 있기를 원합니다. 하나님의 손을 붙잡고, 또 하나님의 손이 되어, 하나님의 행하시는 크신 구원의 역사를 전하고 드러내는 인생 살기 원합니다. 인도해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묵상을 돕는 질문]
1. 제자들이 한 곳에 모여 있었던 까닭은 무엇입니까? (1)
2. 성령께서 오셨을 때, 일어나고 보였던 구체적 정황은 어떠했습니까? (2-4)
3. 성령을 받은 제자들이 세계 각국 언어로 말하기 시작한 것은 무엇에 관한 것이었습니까? (11)
4. 예수님의 제자들을 바라본 여러 사람들의 반응은 무엇이었습니까? (6-7, 12-13)

(작성:이창호A)